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1109.22015202730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0> 대가야의 멸망
532~562년까지 신라와 백제의 회유·침략 앞에 차례로 격파돼
사다함 선봉 신라군…대가야 항복 받아내
현재 고령향교 일대 '대가야국성지' 추정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11-08 20:28:38/ 본지 15면

1916년에 찍은 경북 고령의 대가야 궁성지 전경.

마지막 가야왕국

대가야의 멸망은 가야사의 종말이기도 합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한결같이 562년 신라의 대가야 병합을 전하고 난 뒤 더 이상 어떠한 가야국에 관한 사실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532년 김해 가락국(금관가야)의 신라 투항 이후, 562년 대가야의 멸망까지, 부산·경남·전북지역에 산재해있던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신라 또는 백제의 회유와 침략 앞에 차례로 각개 격파되어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서기'가 562년 1월의 대가야 멸망을 전하면서, 그때까지 멸망했던 10개 가야국의 이름들을 나열하여, 이전까지 진행되었던 가야 각국의 멸망을 종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가야가 멸망하는 562년은 가야사 연표의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720년 일본에서 편찬된 '일본서기'와 1145년 고려에서 편찬된 '삼국사기'가 400년에 가까운 시간과 한국과 일본이라는 전혀 다른 편찬 주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똑 같이 신라의 대가야 병합을 562년으로 전하고 있으니까, 같은 시기 대가야 멸망은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562년 믿어도 되나?

다만, 같은 해라도 '삼국사기'는 9월의 일로 전하는데, '일본서기'는 1월의 사실로 전하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대가야의 멸망 연도에 대한 다른 전승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들여다보면, 그럴만한 기술이 눈에 들어옵니다. '삼국사기'는 562년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국성(國城)을 함락시켰다고 전하고, '일본서기'는 본문에는 562년으로 기록하면서도, 주(註)에서는 2년 전 560년의 멸망설을 아울러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562년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표현은 이미 그 이전에 복속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일본서기'가 따로 전하는 560년의 멸망설도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겁니다. 결국 이러한 전승의 차이는 대가야의 멸망이 562년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전쟁으로 결정되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기간에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신라에 병합되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국성(國城)의 함락

승자인 신라 측의 기록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지난 주에 살펴 본 것처럼, 8년 전의 554년에 백제를 도와 무리하게 충북 옥천까지 원정해서 신라에게 대패했던 후유증 때문에, 최후의 전쟁치고 대가야의 저항도 별게 없었고, 그 과정도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신라 진흥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異斯夫)는 사다함(斯多含)을 선봉으로 삼았는데, 사다함이 5천의 기병으로 성문에 달려 들어가 백기(白旗)를 세우자,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 떨게 되었을 때, 이사부가 전군을 이끌고 일시에 쳐들어가 항복을 받았다 합니다. 다만 성문은 전단문(檀門) 또는 전단량(檀粱)으로 표현되었는데, 같은 내용을 전하는 사다함 열전에 따르면, 전단(檀)은 성문의 이름이고, 량(粱)은 문을 가리키는 가야의 말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야의 언어가 존재했고, 신라의 언어와 차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면서, 가야의 말로 이름 부쳐진 대가야 국성(國城)의 존재도 아울러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이러한 대가야의 국성은 지산동고분군이 있는 주산(主山)에서 고령읍내로 뻗어 내린 길다란 말단 구릉부로, 지금 고령향교가 있는 일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령읍 연조리 608번지의 '고령 연조리 전 궁성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원래 일제가 세웠던 '임나대가야국성지(任那大加耶國城址)'의 비석은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대가야국성지(大伽倻國城址)'라 새긴 자연석의 비가 서 있습니다. 2000년 경북대박물관의 시굴조사에서는 궁성지의 동남쪽 일곽에서 6세기 초의 부뚜막과 벽체시설을 가진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바로 대가야의 최후를 맞이하던 궁성과 관련된 시설의 일부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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