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1123.22016211221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2> 제7의 가야, 다라국-상
대가야·신라와 함께 백제 인근의 저명한 나라로 기록
합천 쌍책 다라리서 대규모 고분군 발견
일본서기 기록 일치
여러 가야국·백제 신라와 활발히 교류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11-22 21:13:14/ 본지 16면
하늘에서 굽어본 경남 합천의 옥전고분과 황강.
일곱 째 가야?
'제 7의 가야, 다라국(多羅國)'을 아십니까? 조금 오래 되긴 했습니다만, KBS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되었던 고대사 다큐멘터리의 타이틀이었습니다. 우선 '제7'이란 실제로는 12개 이상이나 존재했던 가야의 여러 나라를 '삼국유사'가 6가야로만 서술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금관(金官), 아라(阿羅), 고녕(古寧) 또는 비화(非火), 성산(星山), 대(大), 소(小) 등의 6가야 이외에도 저명한 가야국이 있었음을 강조하여 시청자의 눈을 끌기 위한 카피였습니다. 물론 이미 720년에 편찬되었던 '일본서기'에는 12개 이상의 가야국명이 기록되고 있으니까, 일곱 번 째의 가야국이라는 표현에 그리 새삼스러울 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보이는 많은 가야국들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진 것도 없었고, 그 상세한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각국의 위치에 대해서조차 설왕설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일본서기'가 전하는 가야국과 같은 이름의 땅에서 대규모의 가야고분군이 발견됐고, 발굴조사 결과 엄청난 내용의 가야 유물이 쏟아져 나왔던 겁니다. 따라서 잃어버렸던 가야왕국 하나를 분명하게 확정할 수 있게 됐다는 '발견의 기쁨'이 포함됐던 타이틀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라리의 다라국
이러한 고분군이 발견된 곳이 합천군 쌍책면의 다라리(多羅里)였고, 이렇게 찾아지게 되었던 나라가 다라국(多羅國)이었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라국은 6세기 전반에 함안의 아라국(阿羅國)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가야 여러 나라와 함께, 백제와 신라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562년 무렵 신라에 통합되었던 북부 가야왕국의 하나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기록에서 보이는 다라국의 위세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라국에서 파견되었던 사신의 신분이 다른 가야국에 비해 낮았기 때문입니다. 낮은 신분의 인물을 보내, 높은 신분의 다른 가야국 사신과 동등하게 정책을 논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라국의 위상은 중국에까지도 전해집니다. 양나라의 무제가 백제 사신의 내왕을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에도 다라(多羅)는 대가야나 신라와 함께 백제 인근의 저명한 나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라국과 같은 지명이 합천의 다라리였고, 거기에서 엄청난 가야의 보물들이 발견됐던 겁니다. 물론 다라리라는 현재의 지명이 얼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신라 때에 합천이 대량(大良) 또는 대야(大耶)로 불렸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대량은 대라 또는 다라로 발음됐을 것이며, 대야는 대라와 통하는 말로, 크다는 대(大)와 많다는 다(多)의 뜻이 서로 가깝습니다. 더구나 고분군이 있는 성산리는 다라리의 이웃으로, 함안의 성산산성과 같이 성산(城山)이란 지명은 고대의 왕도(王都)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습니다.
옥전고분군의 위치
이러한 다라국의 실체를 확인시켜주게 되었던 것이 옥전고분군의 발견과 발굴조사였습니다만, 옥전(玉田) 그러니까 구슬밭이라는 지금의 지명은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던 많은 옥구슬들로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옥전고분군이 발견된 합천군 쌍책면의 옥전마을은 황강 하류가 굽이쳐 낙동강으로 나가는 물길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분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황강은 율곡면과 쌍책면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상포나루에서 동쪽으로 돌아 성산리와 다라리를 지나고, 적포에서 낙동강과 합쳐집니다. 옥전고분군 코밑의 상포나루가 그렇고, 합류 지점의 적포는 상·중·하로 나누어질 만큼 낙동강 수로의 요처였습니다.
이러한 교통의 요지에 다라국이 위치했던 것은 필연이었고, 백제와 신라, 또는 창녕과 함안의 가야국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다라국의 위상과 대외교류의 증거가 옥전고분군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 물적 증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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