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1130.22016200324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3> 제7의 가야, 다라국-하
소통으로 꽃피운 다라국 문화의 보고 옥전고분군
신라 축조법 닮은 4세기 경 목곽묘
5세기 중엽 유물엔 서역 물건도 보여 활발한 교역의 증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11-29 20:04:59/ 본지 16면
경남 합천군 옥전고분에서 발굴된 말투구. 이곳 다라국 세력의 위상을 짐작케한다.
옥전고분군의 발견
요즈음의 발굴조사는 고속도로나 철도 또는 댐이나 주택단지의 건설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에 떠밀려 시행되는 긴급조사가 대부분입니다만, 다라국(多羅國)의 존재를 웅변해주는 옥전고분군은 보기 드물게도 학술적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1984년 합천댐의 건설로 수몰될 황강 상류의 조사에서 많은 유적이 확인되자, 경상대박물관은 낮은 하류지역에는 보다 중요한 유적이 많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1985년 여름 지표조사를 통해 왕릉 급의 거대고분과 특이한 가야토기, 금동제(金銅製) 투구 파편 등을 수습하게 되자, 서둘러 대학의 예산 지원을 확보하고 발굴조사 허가를 얻어 본격 발굴에 착수하게 됩니다. 이후 모두 5차례의 발굴조사와 1차례의 시굴조사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는 조사개요 1권과 조사보고서 10권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공표되었습니다. 발굴시작부터 보고서의 간행까지 17년이란 세월이 걸렸답니다. 발굴조사와 보고서 간행의 모든 과정을 이끌었던 경상대박물관장 조영제 교수의 회고담입니다. 요즘같은 세상에서 보기 힘든 끈기있는 노력의 산물로, 참여했던 연구자들과 합천군의 의지에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쏟아진 다라국의 보물들
발굴조사된 119기의 고분에서는 무려 3000여 점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형봉토분 9기, 목곽묘 80기, 석곽묘 37기, 석실묘 2기가 조사되었고, 그 안에서는 금·은·동 장식의 관(冠)·큰칼·투구·허리띠, 금귀걸이, 아라비아 계통의 로만글래스, 8벌의 철판과 철 비늘의 갑옷, 15벌의 투구, 6벌의 말투구와 2벌의 말갑옷, 호화로운 말안장 장식들, 많은 가야토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고분군 아래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는 합천박물관에 가시면 이러한 유물의 내용과 의미를 쉽고 자세하게 아실 수 있습니다. 합천박물관은 설립 동기가 그러했고, 거의 대부분이 옥전고분군의 내용으로 가득한 일종의 고분박물관이지만, 박물관 이름은 합천군 전 시대의 역사를 보여줄 것 같은 것으로 되었습니다. 다라국의 옥전고분군이라는 특징이 포함되지 못한 이름이라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유적의 현장에 만들어진 군 단위 지자체의 박물관이라는 점이 소중합니다.
옥전고분군이 말하는 다라국사
옥전고분군의 규모나 유물상의 변화는 다라국의 발전상을 보여줍니다. 옥전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고분은 4세기 전반경의 49·52·54호분과 같은 목곽묘입니다. 나무방 바깥을 돌로 채우는 축조법은 신라와 통하고, 함안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가 출토됩니다. 수장묘의 출현으로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생각으로 나뉘고 있지만, 다라국사의 시작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4세기말~5세기 초가 되면 23호 목곽묘와 같이 규모와 수량이 커지고, 갑옷과 투구, 말장식과 금제품 같은 새로운 문물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발굴자는 다라국 최초의 왕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머리를 황강이 낙동강으로 빠져나가는 남동쪽에 두고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북향이나 풍수지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남동쪽에는 창녕의 비사벌국과 신라가 있는데, 굽다리접시 중에 창녕 것이 많고, 신라 것이 섞여 있는 것과 관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5세기 중엽의 M1호분이 되면 이전까지 5~6m에 불과하던 것이 20m 전후로 대폭 확대되고 돌방으로 변합니다. 돌방의 가운데는 벽을 쌓아 주인공과 부장품의 공간을 구분하게 되는데, 부장품 중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이국적인 아라비아 계통의 로만글래스가 들어있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서역의 물건이 신라를 통해 들어 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다라국 왕릉으로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
다라국은 5세기 후엽의 M3호분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관 밑에 쇠도끼를 가득 깔고, 14자루나 되는 큰칼 중에는 금동(金銅)과 은(銀)의 용(龍)과 봉황(鳳凰)으로 장식된 손잡이의 용봉환두대도도 여럿 있고, 금동제의 말안장과 금귀걸이도 나와, 최전성기 다라국왕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6세기 중엽이 되면 M11호분과 같이, 공주의 백제고분과 같은 석실에서 금귀걸이, 금동장식신발, 연꽃모양 목관장식과 같은 백제 계통의 문물이 보입니다. 친 백제적이었던 고령 대가야의 마지막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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