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321.22018201235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57> 여행을 마치면서
연구결과 축적돼 서서히 베일벗는 가야사…역사여행은 계속
연맹으로 치부한 교과서 근거 없어
'4국'이라는 표현 부여사 부정하는 꼴 풀어야할 숙제 산적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8-03-20 20:13:53/ 본지 18면
1970년대 김해 대동면 덕산리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 국보 275호.
못 다한 발걸음
지난해 1월 26일부터 시작된 우리의 가야사 여행은 어느 새 일 년하고도 두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가야의 유적과 거기에 얽힌 가야인의 사연을 따라 부산 경남의 여러 곳을 떠돌았습니다. 가야사의 고향 김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낙동강을 건너 부산에 들렀다가, 경북 고령으로 올라 가 전성기의 가야를 노래했습니다. 남하하면서 합천 해인사에 자리한 가야산신의 내력과 옥전 다라국의 역사도 들여다보았습니다. 창녕에서는 비사벌국과 진흥왕순수비가 전하는 신라 진출의 역사를, 낙동강 건너 함안에서는 전·후기 모두 대국이었던 아라국의 역사를 고구려나 고대 일본과의 관계에서 되살려 보았습니다. 마침내 지난 주에는 쇠가야의 고성에서 이야기여행의 보따리를 묶기로 하였습니다. 남쪽으로 독로국(瀆盧國)이 있었던 거제에도 가야했고, 서쪽으로 사물국(史勿國)의 사천과 다사국(多沙國)의 하동에도 가야했습니다. 사이기국(斯二岐國)의 의령과 가야금12곡의 작곡자 우륵의 고향인 산반해국(散半奚國)에도 가고 싶었고, 서부경남의 산청 함양 거창, 섬진강 줄기의 곡성과 구례를 거슬러, 전북의 남원 임실 장수 진안까지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가까운 탁순국(卓淳國)의 창원이나, 골포국(骨浦國)의 마산, 그리고 부산 기장의 장산국(長山國)의 이야기를 다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가야사여행은 이쯤에서 접어야할 것 같습니다.
새 형식의 가야사 개설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저는 1983년에 가야사의 석사학위논문을 냈더랬습니다. 어느 덧 4반세기가 흘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야란 이름의 연구논문은 모두 10여 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사는 '잃어버린, 신비의, 수수께끼'와 같은 수식어로 꾸며지기 십상이었고, 600년의 가야사라 해도 가야금 밖에 별로 아는 것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4반세기 동안 가야사의 연구는 혁신적으로 발전하였고, 그 축적도 적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야사가 아니더라도 한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가야사연구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겁니다. 간단한 연표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의 가야사는 X선사진과 같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연구축적을 통해 이젠 제법 살도 오르고, 옷가지로 치장도 할 줄 아는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일반시민이 흥미를 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그래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전달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한다면, 가야사에 관한 최신의 정보를, 가장 쉽게 전달해 보겠다는 욕심에서 이번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어느 정도 비슷하게 된 것 같기는 합니까?
미래의 가야사를 위하여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글들이 단순한 흥미와 전파만을 위한 여행기는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바로 '이영식이 생각하는 가야사개설'이었습니다.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가야를 하나의 운명공동체와 같은 '가야연맹'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대로 12개국 이상이나 되는 가야 여러 나라는 서로 다른 특징으로 구분되는 역사와 문화를 영위하였고, 그리스 도시국가의 연맹처럼 함께 힘을 합해 삼국과 싸우거나, 함께 망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사 개설은 가야 각국사로 쓰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으로 생각했고, 각국의 역사는 각 지역에 남아있는 가야유적을 따라가며 살펴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것으로 우리의 가야사여행이 끝나지 못하는 것처럼, 참으로 많은 가야사연구의 과제들이 구름처럼 쌓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급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천오백 년을 기다려온 가야사입니다. '제4제국'이라니요? 요즈음 가야가 좀 잘 나간다 해도 제국(帝國)은 아니었고, '4국시대'라는 말도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조선을 이은 천년왕국 부여(夫餘)도 있었고, 옥저 동예 탐라 등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4국이라 하여 부여사를 제외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통일되면 부여사를 넣어 '5국시대'로 해야 할까요? '제4'나 '4국시대'는 지금까지 '3국시대'라는 말 때문에 가야사가 차별받던 것과 똑같은 논리와 역사인식입니다. 역사연구에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추어들의 오버도 문제이고, 지역발전이나 시청률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추기는 정책이나 방송도 문제입니다. 가야사복원의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진정한 가야사는 기록과 유물이라는 사료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합니다. -끝-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 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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