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1228.22015202859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6> 비사벌의 가야-하
5세기 중엽 신라, 고구려 후원 업고 창녕 비사벌국으로 진출
신라왕에 은제 허리띠 받은 가야왕, 왕 아닌 신라 지방장관으로 전락 의미
교동 11호분 유물 신라·가야색 섞여, 이 시기 신라의 가야 지배과정 보여줘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12-27 20:30:41/ 본지 15면
허리띠 받고 매인 몸?
국립김해박물관 전시실의 마지막 코너에 가면 창녕 비사벌국의 마지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창녕에서 출토되었던 은제 허리띠와 관(冠) 장식이 그것입니다. 특히 물고기와 손칼 등이 달려있는 허리띠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물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라의 경주에 가면 물고기와 손칼은 물론, 곡옥에 향통과 숫돌 다는 장식까지 주렁주렁 달려있는 허리띠가 많습니다. 따라서 창녕의 허리띠 역시 신라제로 생각됩니다. 다만 경주는 금(金), 창녕은 은(銀)으로 만들어진 차이가 있습니다. 금제 허리띠를 찬 경주의 신라왕이 창녕의 가야왕에게 은제 허리띠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같은 허리띠라도 소재에 따라 급수가 있습니다. 금(金)→금동(金銅)→은(銀)의 순서입니다. 결국 신라왕에게 은제 허리띠를 하사받은 가야왕은 이미 왕이 아니었습니다. 비사벌국의 가야왕이 신라의 지방장관으로 전락한 셈입니다.
경남 창녕의 교동고분과 교동 11호분에서 출토된 환두대도의 상감명문.
지방장관 전락한 가야왕
물론 이러한 가야왕의 몰락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방장관의 표식인 은제 허리띠는 6세기의 교동12호분에서 출토된 것이었습니다. 12호분의 위에는 11호분이, 11호분의 위에는 7호분이 있어, 비사벌국의 가야왕이 대를 이어가며 묻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녕박물관에 가면 동북쪽 목마산성 아래의 능선을 따라 수많은 봉분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잔디로 정비된 봉분들과 언덕배기의 출렁거림이 참 아름답습니다. 빛 좋은 봄날 아무렇게나 앉아 도시락이라도 펴면 '빛벌=비사벌'의 가야왕국을 실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대열 속에 7호분→11호분→12호분도 있는 겁니다. 7호분 할아버지, 11호분 아버지, 12호분 아들의 관계로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이 왕릉들이 보여주는 문화적 색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신라제 허리띠가 나온 12호분이 신라 일색이라면, 7호분 유물의 대부분은 가야색이고, 중간 11호분의 유물은 가야 반 신라 반입니다. 가야지역에 대한 신라의 진출 과정을 보여주는 변화입니다. 12호분이 6세기라면 11호분은 그 이전이니까, 대개 5세기 중반 경부터 신라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
창녕 비사벌국에 대한 진출이 신라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라의 진출이 본격화되는 11호분 출토의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이 그 증거물입니다. 일제는 교동고분군에서 열차 2량 우마차 10대분이란 엄청난 양의 유물을 파내었고, 그 운반을 위해 밀양까지 임시철도를 개설하려 했었습니다. 다행히도 유물들은 중앙박물관에 남았고, 1983년의 국립진주박물관 개관을 위한 X선 조사에서 금실을 박아 새긴 명문(銘文)이 발견되었습니다. 초기의 X선 사진 판독에서는 문장의 위 아래를 뒤집어 읽는 촌극도 있었지만, 치과의 스켈링 같은 방법으로 녹을 제거하여 금색으로 빛나는 글자 몇 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끝에서 칼자루 쪽으로 쓰인 문장에서 읽혀지는 글자는 하부(下部) 또는 상부(上部), 선인(先人), 그리고 맨 끝의 칼 도(刀) 자 정도입니다만, 한 두 마디 글자가 가야사 복원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하부(下部)나 상부(上部)는 고구려와 백제에 공통되는 5부명의 하나지만, 선인(先人)은 고구려에만 있는 11번째 관등의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창녕 가야국왕의 무덤에 고구려의 칼이 들어가 있던 겁니다. 고구려가 직접 주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같은 시기 문자기록과 함께 나온 신라유물에 비추어 볼 때, 신라를 통해 들어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라왕이 고구려의 큰칼을 창녕의 가야왕에게 전해 주었다는 사실은 고구려를 등에 업고 진출했던 역사를 말해줍니다. 5세기 초에 광개토대왕의 군사 지원을 받았던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5세기 중엽이 조금 지난 때의 일입니다. 5세기 중엽의 창녕에 대한 본격적인 진출은 고구려를 든든한 후원자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칼은 지금 국립김해박물관에 있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금빛 나는 글자를 한번 읽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가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8> 함안의 아라국 - 국제 (0) | 2014.11.01 |
---|---|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7> 창녕 진흥왕순수비 - 국제 (0) | 2014.11.01 |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5> 비사벌의 가야 (중) - 국제 (0) | 2014.11.01 |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4> 비사벌의 가야 (상) - 국제 (0) | 2014.11.01 |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할 때 : 가락국 '수로왕' 편 - 임동주 (0) | 2014.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