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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휴식 불패의 구성원을 만들어라!"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⑨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22호] 승인 2013.12.02  10:42:02


조선시대 관료들에게도 휴일과 같은 역할을 한 휴무과 휴가가 있었다. 왕과 왕비, 왕대비의 생일,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신 날인 국기일(國忌日),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은 휴무일이다. 년 간 20여 일에 달한다. 휴가는 업무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휴가와 부모상 혹은 부모가 위독한 경우에는 거리에 따라 휴가를 얻었다. 관료들의 연간 근무일수를 300일로 계산한 것으로 보아 60일 정도를 휴무와 휴가로 보냈다고 추정한다. 《난중일기》에도 이순신이 국기일 혹은 가족의 제삿날에는 사무를 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휴무일임에도 이순신은 각종 공사적인 일을 했다.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거나, 부하들의 업무를 꼼꼼히 챙기고 확인했다.

현장을 지키며 휴식하라! 지친 부하들을 쉬게 하라!

▲ 나라 제삿날(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김인보와 함께 이야기했다. (1592년 1월 2일) 

▲ 둘째 형님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사복시(임금이 타는 말을 관리하던 관청)에서 받아 와 기르던 말을 올려 보냈다. (1592년 1월 23일)

이순신은 또한 틈틈이 여가활동을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비가 와서 밖에서 일을 할 수 없었던 경우에는 바둑이나 종정도 등을 하거나, 부하들의 놀이를 구경하면서 몸과 머리를 식혔다. 거문고나 가야금, 피리 소리를 듣는 음악 감상도 자주했다.

▲ 식후에 우수사가 임시 머무는 방에서 바둑을 두었다. (1593년 3월 12일) 
▲ 충청 수사와 배첨사가 와서 바둑을 두었다. (1594년 6월 3일) 
▲ 충청 수사, 미조항 첨사, 웅천 현감이 와서 만나고 바로 종정도를 놀게 했다. (1594년 6월 4일)

여가활동 중에도 관찰력을 키워라

이순신이 참여한 놀이 중에 승패에 관해 기록한 경우는 두 번이다. 1593년 3월 18일에 우수사와 장기를 두었는데 자신이 이겼다는 것, 1595년 3월 25일에 권준과 장기를 두었는데 권준이 이겼다는 내용이다. 이순신의 여가 활동은 주로 긴급한 일이 없고, 비가 내려 바깥일을 할 수 없을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기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놀이 자체를 날카롭게 관찰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관심을 갖고 관찰할 때는 대부분 ‘관찰(觀)’이라고 표현했고, 무심하게 구경할 경우는 ‘구경(看)’이란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 충청 수사와 배문길이 장기를 두어 내기하는 것을 구경했다(看). (1594년 6월 2일)
▲ 충청 수사와 순천 부사를 불러 장기를 두게 하고 관찰(觀)하며 하루를 보냈다. (1594년 7월 14일)
▲ 내내 가랑비가 내렸으나 바람은 불지 않았다. 순천 부사와 충청수사가 바둑 두는 것을 관찰(觀)했다. (1594년 7월 29일)

그가 직접 놀이에 참여했을 때는 당연히 몰두하면서 관찰하고 생각하면서 놀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하들의 놀이를 구경하면서도 ‘관찰(觀)’했다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구경꾼의 입장이 아니라, 몰입해서 지켜보고, 놀이조차 전략전술을 갈고 닦는 시간으로 활용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진정한 휴식은 머릿속 까지 식히는 것

그런데 전체적인 여가활동 기록을 살펴보면, 장기나 바둑 같은 게임 형태 보다는 음악을 더 즐긴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 감상 시간은 언제나 깊은 밤 혹은  달빛과 함께 했다. 고독을 달래고, 자연과 하나 된 듯한 감성적 분위기가 많다.

▲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정을 스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달빛 아래 함께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헤어졌다. (1594년 6월 11일) 
▲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해(海)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1594년 8월 13일)
▲ 혼자 대청 가운데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배영수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1595년 5월 13일). 
▲ 오늘은 권언경(권준) 영공의 생일이라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몹시 취했다. 거문고 소리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1595년 6월 26일)
▲ 늦게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위로하는 음식을 먹이고, 겸하여 활도 쏘고 풍악도 울려서 취한 뒤에 자리를 파했다. 웅천 현감이 손인갑이 사용한 옛물건을 가져왔기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 몇 곡조를 들었다. (1596년 2월 5일)

반면 술을 마실 때 여흥으로 듣는 음악을 즐긴 경우는 부하들과의 활쏘기를 한 뒤에 두 어 차례 했던 때 외에는 거의 없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장수들을 위로를 하기 위해 풍악을 울리며 놀았지만 소란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이순신도 가야금을 켤 줄 알았고 노래도 부를 줄 아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장군 이순신은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불렀을까.

그는 휴식을 위해 낮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난중일기》에는 낮잠을 잔 것이 단 한 번 나타난다. 피로와 춘곤증에 못 이겨 낮잠을 잔 뒤, 상쾌함을 언급한 1596년 3월 12일 일기가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순신은 아마도 낮잠을 거의 자지 않은 사람이다. 또 그가 낮잠을 즐겼다는 다른 기록도 전혀 없다.

이순신의 휴식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휴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휴식시간은 부하들의 휴식을 위한 시간이었고, 교류와 소통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바둑도 두고, 장기도 두며, 종정도를 놀기도 했지만, 그가 오히려 구경하고 관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자신의 휴식까지도 부하들을 위해 썼고, 그런 과정을 통해 충성심이 가득한 부하들을 만들어냈다. 이순신에게 배워야 할 것은 휴식을 소통의 장으로 만드는 노력이다. 함께 즐기고, 함께 기뻐하는 휴식은 불패의 구성원을 만들어내는 첫걸음이다.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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