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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 - 송기호" 중 "Ⅲ.도성 - 2.東京城"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동경성(東京城)
1989년  송기호 
 
발해가 가장 오랫동안 도성으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에 위치한다. 영안현성(寧安縣城)에서는 서남쪽으로 약 35km, 동경성진(東京城鎭)에서는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곳에 해당한다. 동경성터 안에는 발해진(渤海鎭)19)과 토태자(土台子), 백묘자(白廟子), 언가자, 쌍묘자(雙廟子), 후서지(後西地), 전서지(前西地) 등 6개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주위가 수백리나 되는 평탄한 분지의 한가운데이며, 성의 동북 및 남벽 약 1∼3km 밖으로 징보호(경박호,鏡泊湖)에서 흘러내려오는 무단장(목단강,牡丹江)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발해는 제3대 문왕 시기인 천보(天寶) 말년(750년대 전반경)에 구국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30여년 뒤 다시 동경용원부로 일시 옮겼다가 제5대 성왕(成王) 시기인 794∼795년경에 이곳으로 되돌아와 멸망시까지 수도가 되었다. 그런데 구국에서 동경성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서 왕청리(왕승례,王承禮)는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즉 정치적으로 볼 때 발해는 3대 60여년의 통치기간 동안 정치세력이 북쪽과 동쪽으로 상당히 뻗어나갔으므로 정치 중심지를 이 방향으로 옮겨 이에 부응할 필요가 있었고, 경제적으로 볼 때 구국은 목단강 상류에 위치하여 기온이 낮고 토지가 협소한 반면 동경성 일대는 목단강 중류에 위치하여 토질이 비옥하고 기후가 비교적 온난하며 평야가 넓어 농경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며, 군사상으로도 이 일대는 산과 물이 있고 지세가 험하면서 교통이 편리하여 공격과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20)

이 성에 대해서는 일제시대인 1909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926년 토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이 방문하여 일부 유물을 채집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에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이 답사하였다. 또 1931년에는 당시 하얼빈박물관에 있던 소련의 포노소프(B.B.Ponosof)가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33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가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동경성의 성격이 더욱 뚜렷이 밝혀지게 되었다.21) 그 뒤에도 부분적인 조사가 진행되어 1940년, 1942년 토리야마 키이치(鳥山喜一)이 절터들을 조사한 바 있다.2)

2차대전이 끝난 뒤 1961년 제1비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第1批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선정되어 발해진에 전문관리기구인 영안현문물관리소가 설치되었고, 1963년과 1964년에 걸쳐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가 답사와 시굴을 진행하였으며,23) 1979년 영안현문물관리소(寧安縣文物管理所)가 문지(門址)를 발굴하였고, 1981년 이후 흑룡강성문물고고공작대가 문지와 회랑들을 발굴하고 있다.24) 이제 위의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성의 구조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25)

(그림 4) 동경성

성은 외성, 궁성(宮城), 황성(皇城)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4). 외성의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성벽은 속을 돌로 쌓고 겉에 흙을 씌웠는데 잔존높이는 1963년, 1964년 조사 당시 2∼3m 정도였다. 외성의 총둘레는16,296.5m로서 동벽이 358.5m 서벽이 3,406m, 남벽이 4,568m로 모두 직선으로 쌓여 있고, 북벽은 가운데가 북쪽으로 튀어나와 凸자형을 하고 있는데 길이는 4,946m 이다. 외성 밖에는 垓字를 돌렸다. 

외성에는 10개의 성문이 있다. 동벽과 서벽에 각각 2개, 남벽과 북벽에 각각 3개씩 있어 동벽과 서벽의 문, 남벽과 북벽의 문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중 남벽 가운데 문과 북벽 가운데 문은 문길(門道)이 3개씩이고, 나머지 문들은 1개씩이었다. 문의 추정 너비는 표 1과 같다.


표 1. 외성 문지의 문길 너비표

궁성은 자금성(紫禁城)이라고도 하는데 동경성 안에서 북쪽 가운데에 있다. 그 형태는 장방형으로 크기와 형태가 불규칙한 돌로 성벽을 쌓았다. 잔존높이는 약 3m로 부분적으로는 4m가 되는 곳도 있다. 궁성은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심 구역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전체가 2,680m로서,동, 서벽의 길이가 각각 720m이고, 남, 북벽의 길이는 각각 620m이다. 또 4개 구역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총둘레가 3,986m로서 동벽이 90m, 남벽이 1,050m, 서벽이 940m, 북벽이 1,096m 이다.


(그림 5) 동경성의 궁성 및 황성

궁성의 4개 구역중 중심 구역에 주요 궁전들이 들어차 있는데, 이 중심구역은 다시 중구, 동구, 서구로 세분된다. 그 외에 동쪽, 서쪽, 북쪽 구역에는 부속시설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5). 이 궁성지에서 1963년, 1964년 조사시에 37개의 궁전지와 기타 건축지를 발견한 바 있다. 특히 중심 구역의 중구에는 7개의 궁전지가 있는데 이 중 5개는 궁성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寧安縣誌》에서 말하는 오중전(五重殿)을 확인할 수 있었다.26) 제1궁전지는 속침 전란전(金鸞殿)이라고 한다. 이 궁전들은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 제2궁전지 옆에는 《영안현지》에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이라 기록된 발해시대의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궁성의 동쪽 구역에는 속칭 어화원(御花園)이라 불리는 금원지(禁苑址)가 있는데 이 중 남쪽지역에는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정자와 다락을 지었다.

궁성의 문지는 큰 문으로 남문, 북문 두 곳과 작은 문으로 한 곳(3호 문지)이 있고 假門도 한 곳(4호 문지)이 확인되었다. 《영안현지》에서 오봉루(五鳳樓)라 한 것은 궁성 남문을 이르는데 오문지(午門址)라고도 한다. 이것은 궁성 남벽 한가운데에 있어, 황성의 남문과 마주섰고 주작대로를 지나 멀리 외성 남벽 가운데 문과도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문의 축대는 잘 보존되어 있어 그 높이는 약 4∼5m에 이른다. 그러나 북문은 파괴가 심하여 구조를 알 수 없다. 축대 위에는 주춧돌이 열지어 있는데, 남북 7열, 동서 10열이다. 이 문 양쪽에는 곁문(1호, 2호 문지)이 시설되어 있다. 서쪽 곁문의 경우를 보면 문길의 길이는 12m, 너비 5m이고, 바닥에는 두께 30cm 정도의 불규칙한 현무암 석판들을 귀퉁이를 서로 맞추어 깔았다.

한편 남문의 서쪽 곁문에서 서쪽으로 57m 떨어진 곳에서 1982년, 1983년에 3호 문지가 발굴되었는데 문길의 길이는 7.5m, 너비는 4.5m 이다. 이 문길에도 현무암이 깔려 있는데 여기에는 수레바퀴가 지나갈 수 있게 홈이 패여 있다. 그 사이의 너비가 1.05m인 것으로 보아 당시의 수레 폭을 짐작할 수 있다.27) 궁성 남문을 중심으로 3호 문지와 대칭되는 곳에는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던 假門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궁성 남문의 두 곁문은 발해 상층통치자들이 출입하던 문이었고, 3호 문지는 운수(運輸) 및 궁정의 기타 인물들이 사용하던 문으로 추정된다.

황성은 궁성 남쪽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 도로의 너비는 92m이다. 황성의 평면은 장방형으로, 동벽 47m, 남벽 1,045m, 서벽 454m, 북벽 1,050m 이다. 벽은 궁성벽과 같이 돌로 쌓았다. 황성은 동구, 서구, 중구의 3구역으로 나뉘는데 1963년, 1964년 조사 당시 동구와 서구에서 1개의 건축지를 발견하였다. 황성은 중앙 정부 기관이 위치하던 곳으로 이들은 모두 관청지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동문, 남문, 서문의 3개 문지가 발견되었다.

외성 안에는 성문을 연결하는 길과 그밖의 여러 길이 있고, 이러한 길들에 의해 장방형으로 구획된 坊이 있다. 도로는 모두 1개로 추정되는데 9개만이 확인되었다(표 2). 이 중 제1호 도로는 외성 남벽의 가운데 문과 황성 남문을 연결하는 도로로서 성 전체를 두 부분으로 분할하고 있다. 이 도로를 중국 장안성의 도로명을 따서 주작대로(朱雀大路)라고도 부른다.

(표2) 외성 안의 도로표

도로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갈라진 외성의 각 구역 안에는 당시 도시 주민의 집, 절, 시장 등이 있던 방(坊)이 형성되어 있다. 이 방은 4개가 한 단위를 이루어 田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각 방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방의 전체 숫자는 81개 이상으로 짐작된다. 이 중 주작대로 서쪽 구역 즉 서반성(西半城)의 것이 잘 밝혀져 있는데 이곳에는 모두 41개의 방이 있다. 41개 중 에서 동서 길이 465∼530m, 남북 너비 350∼370m의 큰 방이 9개이고, 동서 길이는 같고 남북 너비 235∼265m의 작은 방이 32개이다. 이곳에는 서시(西市)와 5,6,7호 절터가 확인되었다. 동반성은 보존상태가 나쁜데 40개 이상의 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1,2,3,4호 절터가 확인되었다. 절터는 위의 7개 외에 외성 밖에서 8, 9호 절터가 더 확인되었다.28)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동경성 안에서는 궁전지를 비롯한 문지, 관청지, 절터 등의 건축지가 발견되었고, 또한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절터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제2호 절터29)로서 여기에는 현재 청(淸)대의 사찰인 흥륭사(興隆寺)가 자리잡고 있으며, 속칭 남대묘(南大廟)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발해 시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대형 석불이 크게 훼손된 채 보존되어 있고, 발해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석등(石燈)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30) 유물들은 대부분 기와, 벽돌 등의 건축재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 절터에서는 다량의 불교에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31) 1975년에는 동경성 안의 토태자촌(土台子村)에서 사리함(舍利函)이 출토되었다.32)

거란이 발해를 멸하고 이곳에 동단국(동란국)을 세웠으나, 928년 발해 유민들을 남쪽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잊혀져 버렸다. 특히 유적 발굴을 통하여 성 전체가 화재를 당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아마 강제 이주시기에 이곳을 불사르지 않았나 여겨진다.3) 그 뒤 청나라 초기에 와서야 다시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동경성에 대한 청대의 문헌으로 장진언(張縉彥)의 《영고탑산수기(寧古塔山水記)》, 장분(張賁)의 《백운집(白雲集)》, 오진신(吳桭臣)의 《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 양빈(楊賓)의 《유변기략(柳邊紀略)》, 고사기(高士奇)의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 경방창(景方昶)의 《동북여지석략(東北輿地釋略)》등이 있으며34) 여기에서는 동경성이라는 명칭 외에 화집성(火葺城), 불납화성(佛納和城), 사란성(沙闌城) 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35)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금(金)의 상경회령부지(上京會寧府址)로 오인하고 있었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등 극소수의 문헌에서만 발해 상경용천부 자리로 고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36) 청 말기 이후에 이르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인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이 유적을 조사함에 따라 동경성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그러한 조사연구를 통하며 이곳이 바로 발해 상경용천부 자리였음을 확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경성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아직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37)

동경성은 발해가 가장 오랫동안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므로 이곳을 중심으로 한 목단강 중, 하류 지역에는 발해시기의 무덤, 성터들이 많이 발견되었다.38) 우선 고분군으로 대목단둔(大牡丹屯)고분군, 풍수세자(風水歲子)고분군, 삼령둔(三靈屯)고분, 대주둔(大朱屯)고분군, 양초구(洋草溝)고분군, 합달둔(哈達屯)고분군, 대흥(大興)고분군(이상 영안현,寧安縣), 사하자(沙河子)고분군, 두도하자(頭道河子)고분군(이상 임구현,林口縣), 북참(北站)고분군, 산저자(山咀子)고분군(이상 해림현,海林縣) 등이 있고, 성으로 대목단둔성지(大牡丹屯城址), 우장성지(牛場城址), 성장랍자성(城墻磖子城), 승리촌보루(勝利村堡壘)(이상 영안현,寧安縣), 오사혼구촌성지(烏斯渾舊村城址), 오도하자성지(五道河子城址), 세린하촌성지(細鱗河村城址), 흥농촌성지(興農村城址) (이상 임구현,林口縣) 등이 있으며, 건축지로 동경성 가까이의 평안교(平安橋), 칠공교(七孔橋), 오공교(五孔橋)의 다리 유적, 발해포 정자(渤海浦 亭子) 유적, 백화(白花)건축지, 합달도구(哈達渡口)건축지(영안현,寧安縣), 연통랍자(烟筒磖子)건축지(林口縣) 등이 있다. 이 외에 벽돌과 기와를 굽던 가마터들이 영안현 행산향(杏山鄕) 및 발해진 합달둔(哈達屯)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특히 전자는 동경성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39)
 

주석

19) 과거에 東京城鎭이라 하였다가 발해진으로 개칭되었고, 동경성진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신흥 마을인 世環鐵에 붙여졌다. 丹化沙, 龍泉鏡泊訪古行, 《黑龍江文物叢刊》 1982―1 p.91
20) 왕승례 저·송기호 역, 《발해의 역사》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번역총서 1,
1987 참고자료 1, 앞책 p.81
21) 이상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東亞考古學會,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제5책, 1939, p.2
단, 白鳥庫吉이 방문한 연대는 1909년이 옳다.
白鳥庫吉, 〈極東史上に於ける滿洲の歷史地理〉《アジア史論》下, 白鳥庫吉全集 9, 岩波書店, 1971 p.39
22) 鳥山喜一, 〈東京城寺址調查略報告〉《東京城》 보존협회지 제6집, 만주고적고물명승천연기념물보존협회, 1943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p. 127
23)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1963∼1965)》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段鹏琦, 渤海上京龍泉府遺址的調查與發掘 《新中國的考古發現和研究》文物出版社, 1984
24) 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 〈勃海上京宮城第一宮殿東西廊廡遺址發掘清理简報〉 《文物》 1985—1(a)
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 〈渤海上京宮城第2,3,4號門址發掘簡報〉 윗책 (b)
黑龍江省文物考古研究所, 〈渤海上京宮城內房址發掘簡報〉《北方文物》1987—1
25) 이상의 발굴보고서 외 동경성을 소개하는 글들은 다음과 같다.
孫秀仁, 〈唐代渤海上京龍泉府城址〉《黑龍江古代文物》黑龍江人民出版社, 1979
陳顯昌, 〈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文物》1980—9
陳靑柏, 〈唐代渤海國上京龍泉府遺址―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之一―〉《黑龍江文物叢刊》 1981—1
陳靑柏, 鏡泊湖畔小長安―渤海國都城覽古―《文物天地》1985―3
26) 동아고고학회의 보고서에는 6개의 궁전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이 중 제1궁전지는 궁성 남문지로 확인되었다.
東亞考古學會,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제5책, 1939, 
주영헌,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27) 고구려 평양 羅城의 성문과 신라 삼년산성 서문지 중 제2문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전자는 폭이 145cm이고 후자는 16cm이었다.
小泉顯夫, 〈第六 平壤萬壽臺及其附近の建築物址〉《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1938, p. 78
차용걸, 삼년산성 문지유구의 검토《충남사학》1, 충남대학교 사학회 1985 p.29
28) 1963년, 1964년 조사시에 위와 같이 모두 9개의 절터가 발견되었다고 하였는데, 그 뒤 보고에는 성 안에서 10개의 절터가 발견되고 성 밖에서도 절터가발견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모두 12개의 절터가 발견된 듯하다.
陳顯昌, 〈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文物》1980—9, p.87
29) 1939년 동경성 보고서로는 제1호 절터가 이에 해당한다.
30) 丹化沙, 〈關于興隆寺與渤海大石佛〉《北方論叢》1980―6
31) 자세한 것은 위에 제시한 보고서들을 참조 바람.
32) 寧安縣文物管理所·渤海鎭公社土台子大隊, 〈黑龍江省寧安縣出土的舎利函〉《文物資料叢刊》2, 文物出版社, 1978
33) 화재 현상에 대해서는 1939년 동경성 발굴보고서에 많이 지적되어 있고, 1980년대에 들어 흑룡강성박물관이 발굴 조사할 때에도 목격한 바 있다.
東亞考古學會,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제5책, 1939,
흑룡강성문물고고공작대, 앞논문a, p. 51
34) 孫秀仁, 〈對渤海史三個問題的探討〉《學習與探索》1987―5, p.132
35) 丹化沙, 龍泉鏡泊訪古行, 《黑龍江文物叢刊》 1982―1 p.91, p. 90
36) 丹化沙,〈渤海歴史地理研究情況述略〉 《黑龍江文物叢刊》 1983―1, p. 18
37) 동경성에 관한 청대의 기록과 명칭의 유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金毓黻, 《渤海國志長編》1934 권20 餘錄 東京城
東亞考古學會,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제5책, 1939,  pp. 3∼4의 주2,3
丹化沙, 龍泉鏡泊訪古行, 《黑龍江文物叢刊》 1982―1 p.91, pp. 90∼91
孫秀仁, 〈對渤海史三個問題的探討〉《學習與探索》1987―5, 1987 pp. 129∼135 등
38) 東亞考古學會,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제5책, 1939,  pp. 38∼39
黑龍江省博物館, 〈牡丹江中上游考古調查簡報〉《考古》1960―1
呂遵祿, 〈黑龍江省寧安林口發現古墓葬群〉《考古》1962―1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중국 동북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1963∼1965)》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pp. 237∼238
주영헌,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pp. 18∼19
孫秀仁, 〈略論海林山咀子渤海墓葬的形制傳統和文物特徴〉《中國考古學會第1次年會論文集》文物出版社 1980
丹化沙, 龍泉鏡泊訪古行, 《黑龍江文物叢刊》 1982―1 p.91,
흑룡강성문물고고공작대, 〈寧安縣鏡泊湖地區文货普査〉《黑龍江文物叢刊》1983―2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渤海傳瓦窯址發掘報告〉 《北方文物》1986—2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黑龍江海林北站渤海墓試掘〉《北方文物》 1987—1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黑龍江海林二道河子渤海墓葬〉 윗책
39) 丹化沙, 龍泉鏡泊訪古行, 《黑龍江文物叢刊》 1982―1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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