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6668
검은옷 입은 승려를 조심하라 "사람이 아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무신>, 네 번째 이야기
12.04.30 11:44 l 최종 업데이트 12.04.30 11:52 l 김종성(qqqkim2000)
▲ 칭기즈칸 형상. 중국 내몽골자치구 후어하오터시의 '멍량 유한회사' 구내에 있다. ⓒ 김종성
칭기즈칸의 나라인 몽골제국은 전 세계를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짓밟힌 지역은 중국부터 시작해 동유럽까지. 유라시아 대부분이 몽골의 말발굽에 밟힌 것이다.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을 짓밟고 동유럽까지 휩쓴 몽골 기병대에도 콤플렉스는 있었다. 당시 몽골 수도인 대도(현재 북경과 북경 약간 위쪽 지역)의 코앞에 있는 고려에 대해서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고려를 부마국(사위 국가)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화조약의 결과였다. 군사적으로는 승부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가 세계 최강 몽골을 방어한 것은 특유의 민족주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고 산악 위주의 지형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엇일까.
몽골이 고려 침공을 개시한 1231년. 몽골군은 초반부터 희한한 경험을 했다. 소수의 고려 특공대가 몽골 대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데도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묘사돼 있다. 고려 장교 김경손이 이끄는 12인의 특공대가 몽골 대군을 두 차례나 퇴각시킨 것이다.
김경손 특공대는 국경 지대인 정주성과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성곽을 포위한 몽골군 진영을 헤집고 다니며 적군을 교란했다. 몽골 대군은 이들 12인에 밀려 두 차례나 퇴각하고 말았다. 이런 기적에 힘입어 김경손은 귀주성 수비를 책임지게 됐다.
퇴각했던 몽골군이 되돌아와 귀주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지만, 김경손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20일 이상 대항한 끝에 결국 몽골군을 막아냈다. 몽골군은 귀주성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 김경손은 포탄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고를 당했다. 측근들이 "자리를 피하시라"고 권유했지만, 김경손은 "내가 움직이면 병사들의 마음도 움직인다"며 사양했다. 김경손은 부상에도 신출귀몰한 전법을 구사했다. 몽골군도 "사람이 아니다"라며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경손과 그의 특공대는 이처럼 고려군 전체에 초인적인 힘을 불어넣었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 보다 더 무서운 것은...
▲ <무신>의 김경손(김철기 분). ⓒ MBC
지난 28, 29일에 방영된 MBC 드라마 <무신>에서도 김경손 특공대의 활약상이 묘사됐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수긍하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속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농민군이었다. 평소에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나면 출동하는 군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 병사들의 전투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장교가 여러 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게 가능했던 것은, 장교는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데 비해 일반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경손 특공대는 일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군대 조직이 아닌 다른 곳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일반 특공대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이 이들을 보고 당황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특공대는 고려 정규군에 편제된 부대가 아니었다. 김경손을 포함한 대원들이 정규군 내에서 직책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런 특공대가 정규군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규군이 몽골군을 방어하지 못하자, 이들이 특공대를 구성해서 전투에 나섰을 뿐이다.
이 특공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김경손이 항상 검정 옷을 입었다는 '김경손 열전'의 기록이다. 검정 옷, 즉 조의(皂衣)를 입거나 검정 허리띠를 착용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고구려 수행자 군단인 조의선인(皂衣仙人)이나 신라 수행자 군단인 화랑의 후계자들이었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절단이 작성한 현지 조사보고서인 <고려도경>에서 이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평상시에는 일반인들처럼 생활하다가 비상시에는 나라를 위해 전투에 자원했다.
<고려도경>에서는 이들을 '재가화상'이라 불렀다. 일반 민가에 사는 승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 표현을 보고 이들을 불교 스님들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수도사가 기독교 승려라고도 불리듯이, 승려란 표현은 불교 스님 이외의 성직자를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이들이 불가의 스님이 아니라는 점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 가정을 꾸려 여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한다"(<고려도경>)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 복장도 입지 않고 불교 계율도 지키지 않고 가정까지 꾸렸다면, 이들을 불가의 스님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김경손 특공대는 조의선인과 화랑의 맥을 잇는 신선교 수행자 집단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선교 수행자 출신으로서 고려 정부군 내에서 활동하는 군인들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군대 안의 종교인들이 모여 별도의 조직을 꾸린 것과 같다.
이들은 일반 농민군과 달리 평상시에도 군사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사명감으로 무장한 조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출현 앞에 몽골군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어린 화랑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백제 정예군을 격파한 사실에서 나타나듯 이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보다도 무서운 것은 신앙심이 강한 군대다. 두 손에 칼을 쥔 군대보다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경전'을 쥔 군대가 더 무서운 법이다. 신선교 수행자 군단은 둘 다 갖춘 부대였다. 몽골군이 "사람이 아니다"라며 감탄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웬만한 나라의 정부군은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교인이 나서 국난을 극복한 전통은 계속된다
▲ 김경손의 특공대. ⓒ MBC
신선교 수행자들은 몽골족뿐만 아니라 거란족과의 전쟁에도 크게 기여했다. <고려도경>에서는 거란족 요나라가 고려 침공에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수행자 군단의 활약 때문에 거란족 군대가 무너진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고려 말의 최영 장군도 동일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그는 "당태종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우리나라가 승군 3만 명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파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 승군은 조의선인 군단을 지칭한다. 당태종의 30만 군대를 격파한 주역이 고구려 정부군이 아니라 3만의 조의선인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만 명의 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했으니, 당나라 군대가 움찔하는 것도 당연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은 정치인의 말은 잘 안 들어도 종교인의 말은 잘 듣는 듯하다. 과거 한국의 종교인들이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으니,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반 서민들도 자연스레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민족이 숱한 외침을 극복한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민족 특유의 민족주의나 한민족 거주지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탁월한 전투력과 종교적 사명감으로 무장한 수행자 군단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수행자 군단이 나라를 지켰기에, 전 세계가 몽골 기병대 앞에 무릎을 꿇는 상황에서도 고려만큼은 끝끝내 국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원나라) 역사서인 <원사>의 '왕약열전'에는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제시돼 있다. 그중 하나는 '고려 백성들이 사납게 돌변하면 우리가 힘만 소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종교인들과 백성들까지 목숨을 걸고 덤비니, 몽골 정부에서도 '고려는 정복할 수 없는 나라'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민족을 지켜온 신선교 수행자 군단의 전통은 조선시대 전기에 크게 약화됐다. <세조실록>이나 <예종실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에는 유학자 관료들에 의해 신선교 서적들이 대대적으로 압수되고 불태워졌다. 또 일종의 유교 원리주의자인 조광조의 집권을 계기로 신선교의 전통이 크게 훼손됐다.
하지만, 종교인들이 나서서 국난 극복을 주도하는 전통은 신선교가 힘을 잃은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불가의 스님들이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한 것이나, 유교 선비들이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의병을 조직한 것이나, 기독교인들이 일제 때 독립운동에 공헌한 것이나 천주교 사제들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사례들이 이를 증명한다.
한민족이 오늘날까지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전투력뿐만 아니라 신앙심까지 동원해서 나라를 지켜온 뿌리 깊은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모시는 심정으로 나라를 지키는 민족이니, 몽골 기마병들도 이런 민족만큼은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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