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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이순신, 선순환의 경제생태계 창조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36호] 승인 2014.03.10  14:17:08

일자리가 복지, 복지가 일자리
생산과 복지, 국방을 하나로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호남을 제외한 전국토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전염병과 대기근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전쟁을 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군인과 의병으로 참전했고, 노인들조차 조선의 군대와 명나라 군대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또한 백성들은 이리저리 적군을 피해 옮겨 다녀 농사를 돌볼 사람도, 수확할 사람도 없었다. 사람은 있지만 땅이 없고, 땅은 있으나 사람이 없는 상황이 생겼다. 게다가 곡창 호남은 이런 저런 부역과 징발 등으로 농사를 져도 농사를 짓는 사람조차 먹을 것이 없는 형편이었다. 

모두 고통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도 조정에 올려 보내야 하는 곡식과 각종 진상품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이순신은 남해바다의 곳곳을 돌며 전투를 해야 했다. 날씨까지도 도와주지 않았다. 전쟁은 가뭄과 한발까지 몰고 왔다. 이순신은 1593년부터 매년 가뭄으로 농사를 걱정하고, 백성들과 수군의 굶주림을 걱정하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먹여 살릴까 깊은 시름에 빠졌다. 오랜 가뭄 끝에 비라도 내리면 언제나 “농민들이 바란 것이니 다행이다”, “하늘이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고마워했다.

▲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리니 이 어찌 하늘이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1594년 6월 15일).

장계에 따르면 1593년의 이순신 수군은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10% 가까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수군들조차 하루에 불과 2ㆍ3홉 밖에 먹지 못해 병사들은 굶주려 활을 당기고 노를 저을 힘조차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한 끼니에 보통 5홉(한 줌), 많게는 7홉을 먹었다. 이순신의 앞 세대였던 미암 유희춘은 평균 한 끼니에 5홉밥을 먹었다. 아침과 저녁 두끼를 먹는 조선시대의 관습을 기준으로 보면, 하루에 10홉의 곡식을 먹어야 했는데 수군들은 그저 죽지 않을 정도인 2ㆍ3홉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이순신은 피난민 구제 양식만큼은 남겨 빈민을 구제했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는 직접적으로 일본군의 침략을 당한 지역이기 때문에 군량을 확보가 더욱 어려웠다. 그 때문에 원균은 매년 이순신에게 군량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가 그 대장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군량 20섬을 빌려갔다(1595년 7월 8일).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들을 확보하고 식량을 비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순신이 식량 확보와 백성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해결책은 해안의 섬에 피난민을 거주케 하고 농사를 짓게 하는 방법과 군사들을 이용해 둔전(屯田)을 실시하는 방안이었다.

혁신은 끝이 없다!

1593년 1월 26일 이순신은 흥양의 돌산도 목장에서 피난민들이 농사를 짓도록 해 주기를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영남의 피난민들을 구호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전라도 해안의 여러 섬에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요청한 것이다. 이순신은 병조가 반대하는 주장, 조정의 말 기르는 곳이라는 것에 대해 “백성들을 구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백성과 말을 함께 살리자”고 건의했다. 그 후 조정은 이순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농사를 짓게 했다.

그 해 9월 이순신은 피난민의 농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청 또는 군사를 활용해 농사를 짓는 둔전을 제안했다. 비어있는 목장이나 섬을 관청이 주도해서 농사를 짓거나, 백성들에 주어 병작케 하거나, 입대할 군사들을 시켜 농사를 짓게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자신의 제안을 다른 지역에서도 실시케 하자고 제안했다.

▲ 신의 생각에는 본도의 순천과 흥양 등지에 넓고 비어 있는 목장과 농사 지을만한 여러 섬이 많이 있으므로 혹은 관청 경영으로 경작케 하든지, 혹은 민간에 주어서 병작을 시키든지, 혹은 순천과 흥양의 입대할 군사들로 하여금 전력하여 농사짓게 하다가 싸움이 있을 적에 출전하면 싸움에나 지킴에나 방해됨이 없이 군량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이것은 조나라의 이목(李牧)과 한나라의 조충국(趙充國)이 일찍이 경험한 방책입니다. 다른 도에도 이와 같이 명년 봄부터 시작하여 농사짓게 함이 좋을까 합니다. <해전과 육전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는 계본, 1593년 9월>

이순신 자신의 둔전 계획도 거듭 확장했다. 11월에는 농사를 짓을 사람이 부족한 상황을 고려해 상비군까지 농사를 짓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다. 또한 농사를 위해 통제영의 20석 규모의 둔전을 진에 잔류한 늙은 군사를 시켜 경작케 해 농사가 가능한지 지질을 시험하기도 했다. 그 결과 수확한 중정조가 500석이나 되었다.

이순신은 농사를 짓도록 장수와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기도 했다. 휴가를 보내면서 “농사를 권장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들에 정성을 다해 보살피되, 다시 전령이 있으면 곧 달려오라”라고 지시했다. 이순신이 남해에서 추진했던 빈 섬과 목장을 활용한 농사정책이 결실을 이루어 피난민 구호, 백성의 생활 안정, 군사의 식량 확보에 성공했다. 《난중일기》에는 둔전을 관리·감독하는 이순신의 일상적 활동이 잘 나타난다.

▲ 이원과 토병 23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수확하라고 일러 보냈다(1594년 5월 26일).
▲ 도양장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흥양 현감이 심력을 다했기에 추수가 잘 될 것이라고 했다(1595년 6월 6일).

또한 이순신은 수확 결과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록하고, 심지어 보고된 수량이 실제와 일치하는지 다시 되질하기도 했다.

▲저녁에 군량에 대한 장부를 만들고 흥양 둔전에서 추수한 벼 352섬을 받아들였다(1596년 2월 8일).
▲둔전의 벼를 다시 되질하였다. 새 곳간에 쌓은 것이 167섬이고 다시 담아 줄어든 것이 48섬이었다(1596년 2월 23일).

이순신은 둔전을 경영할 때, 당시에는 농사의 생산성을 높이는 혁신적인 도구와도 같은 소를 임달영을 보내 제주도에서 사서 직접 공급하기도 했다.

▲김양간이 농사짓는 소를 싣고 떠났다(1596년 6월 3일).
▲임달영도 들어왔는데, 소를 거래한 견적서와 제주 목사의 편지를 가져왔다(1596년 6월 20일).

이순신은 단순한 군사기지가 아니라 백성과 군사가 일체가 되고, 생산과 복지와 국방을 하나로 만들었다. 일자리가 복지였고, 복지가 일자리를 만드는 선순환의 이순신 경제생태계를 창조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노력이 복지와 생산을 하나가 될 수 있게 했기에 일본군의 침략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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