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9208
몽골의 중국 정복, 고려 때문에 가능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무신>, 다섯 번째 이야기
12.05.07 16:55 l 최종 업데이트 12.05.08 11:22 l 김종성(qqqkim2000)
▲ 내몽골 초원의 풍경. ⓒ 김종성
몽골제국 초대 카칸(황제)인 칭기즈칸은 재위 22년간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동 일부를 정복했다. 하지만, 중국 정복이 완성된 것은 칭기즈칸 사망 52년 뒤인 1279년이었다. 제5대 카칸인 쿠빌라이칸 때 가서야 이 일은 이루어졌다.
중국을 정복하기 이전, 몽골은 이미 동유럽까지 정복했다. 그런데도 중국 정복은 유난히 더뎠다. 그렇다면, 결국에 가서 중국이 점령된 이유는 무엇일까?
몽골이 뒤늦게나마 중국을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고려의 역할이 매우 컸다. 고려가 아니었다면 이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10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 패권구도의 변화를 살펴보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중국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중국의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점을 찍고, 그 점을 기준으로 9~12시 방향과 0~3시 방향을 떠올려보자.
중국 정복, 한반도 제압 없이는 불가능했다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9세기까지의 동아시아 패권구도는, 9~12시 방향의 국가들이 중국과 패권대결을 펼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과 대결한 흉노족·티베트족·선비족·유연족·돌궐족·위구르족은 대체로 9~12시 방향에 있었다.
그런데 서기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양상은 달랐다. 0~3시 방향의 국가들이 중국과 패권대결을 펼치는 구도가 존재한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과 대결한 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은 대체로 0~3시 방향에 있었다.
패권대결의 한 축이 9~12시에서 0~3시로 이동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당나라(618~907년)가 9~12시 방향을 약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발해시대(688~926)에 0~3시 지역의 경제력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다.
▲ 중국 내몽골자치구 후어하오터시의 칭기즈칸 대로. 표지판에서 좌우로 펼쳐진 도로가 칭기즈칸 대로. ⓒ 김종성
서기 10세기를 기점으로 0~3시의 전략적 위상이 강해짐에 따라 이 지역에 있는 한반도의 위상도 바뀌게 되었다. 926년 발해의 멸망과 함께 한민족의 강역은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0~3시 방향의 강화와 더불어 한반도의 전략적 위상이 제고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민족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반도에 부여된 전략적 위상이란, 한반도가 0~3시 방향과 중국의 대결을 완충하는 지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0~3시 방향이 한반도를 사전에 제압하지 않고서는 중국 정복을 완성할 수 없게 되는 구도가 나타났다. 한반도가 배후에서 기습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반도를 제압한 다음에야 중국 정복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거란족 요나라나 여진족 금나라가 북중국만 장악하고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한 것은 고려를 제대로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몽골과 청나라가 북중국뿐만 아니라 남중국까지 정복한 것은 사전에 한반도(고려·조선)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확실한 자기편으로 만들어놓은 나라만이 중국 전역을 마음 놓고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이 뒤늦게나마 중국 전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뒤늦게나마 고려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칸과 연합해 무신정권과 대결한 원종
칭기즈칸 사망 4년 뒤인 1231년부터 몽골은 고려 침공을 단행했다. MBC 드라마 <무신>의 최근 방영분에서는 고려-몽골 전쟁(여몽전쟁)의 초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양국의 전쟁은 이런 상태로 무려 4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만약 고려와의 전쟁이 신속히 종결됐다면, 몽골은 중국 전체를 훨씬 더 빨리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유럽으로도 진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섯 번째 카칸이 즉위한 후에도 중국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와의 전쟁이 예상 외로 장기화되면서 몽골의 군사력이 여기저기로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려를 무시한 채 중국과 총력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고려와 중국이 협공을 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의 몽골문화촌. ⓒ 김종성
고려와의 전쟁도 끝나지 않고 그에 따라 중국과의 전쟁도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몽골의 고민은 한없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몽골의 고민을 해결해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고려 제24대 원종이었다.
현재, 드라마 <무신>의 고려 군주는 제23대 고종(이승효 분)이다. 그는 무신정권에 눌려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몽골과의 전쟁을 지휘한 것은 무신정권이었다. 고종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전쟁이 근 30년째 장기화되자, 고종과 태자 왕정(훗날 원종)은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게 고려 왕실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싸웠다가는 나라가 더욱 더 피폐해질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고, 몽골과의 강화조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무신정권을 약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작용했다.
고종 부자가 이런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무신정권이 약해지고 왕실이 다소 강해졌기 때문이다. 4대째 세습되던 최씨 무신정권은 전쟁 중에 붕괴했다. 최충헌의 노비인 김준(김주혁 분)이 주인집을 배신하고 정권을 차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왕실도 일조했기 때문에, 당시의 왕실은 이전보다는 강해진 편이었다.
태자 왕정은 왕이 되기 직전인 1259년에 몽골로 가서 강화의 뜻을 표시했다. 그 직후에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 왕실은 이미 이때부터 몽골과 화친한 셈이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반대했기 때문에 강화조약이 실질적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결국 원종은 쿠빌라이칸과 연합하여 무신정권과 대결했다. 10년간의 대결은 1270년에 원종-쿠빌라이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무신정권은 붕괴했고, 고려 왕실은 몽골의 후원 하에 통치권을 되찾았다.
이렇게 몽골은 원종의 협력 하에 여몽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 북중국만 차지한 몽골은 이를 계기로 남중국 정복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그 후에 나타난 몇 가지의 상징적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난다.
고려가 더 저항했다면, 몽골제국 출현 어려웠을 것
▲ <무신>의 고려 고종(이승효 분). ⓒ MBC
고려 문제를 마무리한 이듬해인 1271년부터 쿠빌라이칸은 '원나라'라는 중국식 국호를 채택했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중국 정통왕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국 지역을 통치하는 왕조의 정통성을 갖추겠다는 의지의 표시인 동시에, 남중국 정복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5년 뒤인 1276년에 몽골은 양자강 유역의 임안(지금의 항저우)을 점령했다. 남중국을 지배하는 남송의 수도를 차지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279년에 몽골은 남송 전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 정복을 비로소 완료했다. 이로써 몽골제국은 초원지대와 농경지대를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 최강이 될 수 있었다.
몽골이 이렇게 중국 정복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막판에 고려가 협조적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고려는 국가를 유지하는 대신에 몽골의 중국 정복에 일조했던 것이다. 만약 고려가 몇 십 년 더 저항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막강한 몽골제국은 결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0~3시 방향이 한반도를 자기편으로 만든 뒤 중국 정복을 완료한 사례는 17세기에도 나타났다. 만주족 청나라가 1644년에 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의 정묘호란·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미리 제압해놓았기 때문이다.
만주와 한반도는 0~3시 방향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기 10세기부터는 한민족도 중국 정복을 시도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한민족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여진족과 만주족이 각각 북중국과 중국 전역을 차지했으니, 한민족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926년 발해의 멸망과 함께 한민족은 10세기부터 만주를 상실했다. 그래서 중국 정복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0~3시 방향의 다른 국가들이 중국을 정복할 때에 이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0~3시 방향이 강해진 요인 중 하나는 발해시대의 경제력 상승이다. 그런데, 그런 발전을 주도한 한민족이 정작 0~3시 방향의 전성시대에는 한반도로 위축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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