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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세월호 같은 비극,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33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47호] 승인 2014.05.26 14:09:31
세월호의 비극과 같은 초대형 비극이 임진왜란 중인 1597년 7월에도 있었다. 왕인 선조와 대신들, 그리고 이순신이 각각 대처한 내용들은 지금의 상황에도 반면교사가 된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자 기사는 모둔 5개의 사실을 담고 있다. 그 각각은 “<왕세자가 문안하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대신들의 무기력을 질책하고 분발을 촉구하는 비망기를 비변사에 내리다>, <조즙·이순신·권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이다.
천운(天運)탓이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선조
왕세자인 광해군이 선조에 문안을 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4개는 모두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궤멸했다는 것과 관련된 내용이다. 선전관 김식이 보고한 내용은 7월 15일 밤 2경에 일본군 전선 5~6척이 조선 수군을 기습해 전선 4척이 전소·침몰했고, 새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일본군 전선이 조선 수군을 포위해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후퇴했는데, 마침내 조선의 모든 전선이 불에 타 침몰했고, 장수들과 군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통제사 원균(元均)은 간신히 탈출해 섬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에 쫓겼는데 생사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수군으로는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를 중심으로 전선 수백 척을 이끌고 칠천량 바다로 진격했고, 육지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이 조선 수군의 상륙 지점을 장악, 매복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순신과 원균이 예측했던 것처럼 수륙양면작전으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다.
이어진 실록의 내용, <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에서는 김식의 보고에 따른 대책 수립 기록이다. 선조는 영의정 류성룡, 판중추부사 윤두수, 우의정 김응남 등등 당시 최고의 대신들을 모아놓고 김식의 보고를 들려주면서, “수군이 전체가 대패했으니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며 명나라 군대에 패전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말했다. “충청과 전라 두 도에 남아 있는 배가 있는가? 어찌할 수 없다고 핑계만 대고 그대로 둘 수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남은 배로 수습하여 방어할 계책을 세우는 길뿐이다.”
선조는 그렇게 신하들을 닦달하며 대책을 요구했지만, 모두 침묵했다. 다시 선조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이대로 둔 채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으려 하는가? 대답을 않는다고 왜적이 물러가고 군사가 무사하게 될 수 있는가?”
그 때 류성룡이 말했다. “감히 대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고 너무도 민망하고 긴급한 나머지 계책이 생각나지 않아 대답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조가 다시 말했다. “수군 전체가 대패한 것은 천운(天運)이니 어찌하겠는가. 원균이 죽었다고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선조와 신하들은 패배의 원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대책을 고민했다. 그러나 이 실록의 기록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책임을 말하지 않았다. 선조는 천운(天運)이라며 피했고, 또 원균은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도원수 권율이 출전을 원균에게 독촉했기 때문이라고 권율에게 패전 원인을 전가했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은 예견된 일이었다. 선조와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재침을 우려해 이순신에게 부산포 진격 명령을 내렸었다. 이순신은 부산 진격의 문제를 제기하며 반대했다. 그 결과 이순신은 왕명 거역죄로 파직과 사형의 위기에 처했었다. 그 대신 통제사가 된 원균도 이순신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부산포 출전을 지연·회피하다가 선조와 조정의 강권으로 출전했고, 그 결과가 조선 수군의 참혹한 패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눈치보는 신하 만드는 것도 리더
《선조실록》의 네 번째 기사, <대신들의 무기력을 질책하고 분발을 촉구하는 비망기를 비변사에 내리다>는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고, 원균을 사지(死地)로 보냈던 선조의 변명 그 자체이다. 선조는 모든 책임을 신하들 탓으로 돌렸다. “지금의 조정 대신들은 사기를 잃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으니, 아! 슬프도다! 평일에 사리를 논의할 때에는 날카롭고, 나랏일을 계획할 때도 있는 계책을 다하면서, 심지어 모두가 도성을 지키자고 하면서 나를 겁장이라고 기롱했었는데, 지금은 왜 이처럼 사기를 잃었는가.”
그 날의 마지막 기사는 그 날 수습책으로 제안된 원균을 대체할 인물에 관한 기사, <조즙·이순신·권준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이다. “조즙을 사간원 정언으로, 이순신(李舜臣)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 통제사로, 권준(權俊)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한산도에서 호남을 방어하고, 일본군의 서진을 막아 조선을 구해냈던, 그 조선 수군이 전멸 당한 뒤의 대책은 그 한 줄이었다.
선조와 고위 신하들은 조선 수군의 전멸에 대한 책임을 그렇게 면피하고, 이순신의 어께에 모든 부담을 지웠다. 다음 날인 23일, 선조는 이순신에게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내렸다. 원균의 패전 소식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이순신에게 임명장이 도착한 것은 8월 3일이다. 그 후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순신에게 조정에서는 수군을 해산시키고 육지로 올라가 육군과 합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에 남은 12척의 전선을 고려할 때, 조정의 판단은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렇게 답변했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해 볼 만합니다. 전선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
이순신은 비록 12척 밖에 없지만,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일본군과 싸울 수 있고,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일본군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수군의 존속을 요청했다. 선조와 조정은 이순신의 주장에 동의해 수군을 유지하게 했고, 그 결과는 9월의 명량해전으로 나타났다.
7월의 칠천량 패전에서부터 수군 폐지론까지의 과정을 보면, 세월호에 대처하는 지금 우리의 리더들과 똑 같다. 패전의 원인 제공은 임금과 조정의 정실 인사(오늘날의 고위직과 관피아), 경계에 무능해 기습당하고 도망친 리더(원균과 관피아·세월호 선장), 사고 수습과정에서의 우왕좌왕(성만 내는 선조·눈치만 보는 신하들과 오늘날의 리더들), 해법으로 낸 수군 폐지론(해경의 해체), 그리고 전멸당한 군사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선조(사진 찍기 바쁜 고위층들) 등등.
반면, 이순신은 패전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으로 떠났다. 그 과정에서 첫 번째 해야 할 일이 군사를 모으고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군사의 원천이 되고, 나라의 근간이 되는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각 고을 돌며 피난민의 손을 붙잡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때문에 그를 믿고 있었던 백성들은 그를 만나자 환호했다. “다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습니다!” 평상시 백성들의 믿음을 얻었던 이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그의 발걸음에는 백성과 죽은 군사들에 대한 연민과 눈물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세월호의 비극이 계속되던 현장에서는 단 한 번도 있지도, 일어나지 않았던 모습이다.
#이 칼럼은 <그느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9스타북스,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 보완한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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