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75MGlz

선덕여왕, 당의 고구려 침략 실패로 정치적 위기 맞아
<78>여왕 폐위
2013. 10. 09   14:36 입력

진골 귀족들 김춘추가 일본에 간 사이 여왕에 반대하는 반란 선덕여왕,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한 채 647년 1월 8일 세상 떠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 선덕여왕의 능. 친당정책을 추진하던 선덕여왕은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실패함에 따라 폐위 위기에 몰린 가운데 647년 1월 8일 세상을 떴다. 필자제공

●여왕의 실패한 친당정책 

645년 9월 당태종이 패배해 고구려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신라조정에 전해졌다. 선덕여왕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동맹국 당의 무력함이 드러났고 적대국 고구려의 막강함이 다시 입증됐다. 

여왕의 친척인 진골 귀족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여왕의 친당정책이 화근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당태종의 요청을 받아들인 여왕은 간곡한 만류에도 3만의 증원병을 고구려 국경 쪽으로 투입했다. 그것은 백제에 대한 방어력을 약화시켰고, 침공을 불렀다. 김유신은 사력을 다해 백제군을 막아내야 했다. 

예정된 당-고구려의 전쟁 직전부터 한반도 남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645년 정월)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또 변경(매리포성 : 거창)을 노략질했다. 왕이 명하여 막게 하므로 유신은 마침내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이를 공격해 깨뜨리고 2000명을 목 베었다. (3월)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았는데, 또 백제가 다시 침입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중략) 유신이 서쪽(백제국경)으로 가는 길에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가게 됐다. 집안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갔다.” 

당시 그는 대장군으로 고속 진급한 상태였다. 젊은 날 진골(眞骨)들로부터 배제된 그는 공을 세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젊은 날 허송세월을 보내고 초췌해진 50의 나이가 되어 전쟁터가 생활공간이 됐다. 과거의 아픔은 그를 지치지 않게 했다. 그래도 김유신 하나로 백제국경 전체를 방어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는 그 결과를 압축적으로 전한다. “당태종이 몸소 고구려를 정벌했으므로 왕이 군사 3만을 내어 그를 도왔다. 백제가 그 빈틈을 타서 나라 서쪽의 7성을 빼앗았다.” 

●비담의 상대등 취임

645년 11월 비담(毗曇)이 귀족회의 화백의 의장 상대등에 임명됐다. 내물왕 후손, 진골 귀족들의 회의체 화백은 막강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정부 조직의 모든 장관직을 독점했던 화백 구성원들은 왕위계승자를 결정하는 데 간여했을 뿐만 아니라 왕을 폐위시키기도 했다. 75년 전 김춘추의 조부인 진지왕도 그들에 의해 폐위된 바 있다. 

한편 신라 입장에서 위기에 처한 현 상황을 일부 타개할 기회가 오기도 했다. 645년 6월 12일 왜국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나카노오에(中大兄皇子)가 소가이루카(蘇阿入鹿)를 죽이고, 소가에미시(蘇阿臣蝦夷)를 자살케 했다. 소가 씨는 70년간 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해왔다. 그동안 천황은 합법적인 지배자의 간판만 가졌을 뿐이었다. 소가 씨의 몰락은 왜국이 새로운 나라가 된 것을 의미했다. 직후인 그해 7월 신라의 사신이 왜국에 도착했고, 그가 귀국하면서 정변 사실이 전해졌다. 

646년 2월 신라의 사신이 왜국에 파견됐다. 신라는 백제와 깊은 관계에 있는 왜국의 군사적 압박을 완화시키려 했다. 왜국의 견제로 백제와 고구려 국경에 배치돼야 할 적지 않은 병력들이 동남해안에 묶여 있었다. 646년 9월 왜국은 사신 묵마려(黑麻呂)를 보내 군사적 압박을 완화시키는 조건으로 신라에게 질(質)을 요구했다. 

김춘추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이 갈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여왕의 친당정책 추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이 패배해 어려워진 상황에 대한 책임이 있던 그가 왜에 대한 외교도 주도해야 했다. 무엇보다 1급 근친 왕족인 그가 직접 가야 왜국이 신라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기록상 당시 왕실 근친 가운데 남자 생존자는 김용춘·김춘추 부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김춘추 왜국행

646년 연말 김춘추는 왜국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해(647) 신라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 김춘추(金春秋) 등을 보냈다. … 춘추를 인질로 삼았다.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였다.” 

김춘추는 기록상 여왕에게 거의 유일한 남자 혈육이다. 아버지 쪽으로는 6촌이고, 자신의 여동생 천명의 아들이었다. 여왕을 받쳐줄 주요한 버팀목이 왜국으로 갔다. 거기다 그녀를 왕으로 책봉한 당태종이 병이 깊어졌다는 말이 들려왔다. 고구려 전쟁 패배는 그를 끝없는 회한에 빠지게 했고, 병마가 그의 몸에 똬리를 틀었다. 

647년 정월 신라의 귀족회의 의장 상대등 비담은 백제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여왕에게 묻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장했다. 여왕이 즉위 후 백제인들이 대야성과 그와 연결된 다른 수많은 성을 함락시켰다. 낙동강 서쪽의 대부분 땅이 백제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런데도 여왕은 국방비로 지출돼야 할 돈을 불사(佛事)에 쏟아부었다. 25곳의 사찰이 건립됐다. 모든 일은 백성을 위한 것은 없었고 자신을 위한 것이며, 내세를 위해 현세를 팽개친 군주로 보였다. 

●여왕의 카리스마 상실

그녀를 믿었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백성들에게 자리 잡아 갔다. 진골 귀족들도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물왕계 전체의 씨족 카리스마에 손상이 가해질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씨족 카리스마란 왕은 내물왕계 씨족 내부에서 배출돼야 한다는 신라 백성들의 믿음이다. 신라사회는 만성적인 전쟁상태에서도 왕족인 진골 귀족의 권위를 기반으로 굴러갔다. 당시 진골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와 그들의 행동 가치를 의심해야 할 지경에 왔다. 여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내물왕 후손인 진골 귀족 가운데 왕이 될 사람을 세워야 했다. 화백은 여왕의 폐위를 결정했다. 

왕궁의 문을 걸어 잠근 여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백의 결정은 합법적인 것이 아닌가. 퇴위를 강요하는 비담의 군대가 왕성을 포위한 가운데 그녀는 자리에 누웠고 일어나지 못했다. 선덕여왕은 647년 1월 8일 세상을 떴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이렇게 전한다. “(647년 1월) 대신 비담과 염종이 말하기를 여주(女主)는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니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하였다.” 여왕은 자신의 폐위 움직임이 명백해지자 가까운 경산에 주둔하고 있는 김유신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 ‘비담의 난’ 진실은 무엇?
진덕여왕 즉위 앞두고 진골 귀족 또 여자 왕이 됐다고 반발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반란 10일 만에 진압된 것으로 해석
 
‘삼국사기’ 기록은 폐위대상을 선덕여왕이라고 하지 않고 ‘여주’라고 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비담의 반란을 기존과 다르게 보는 견해들도 있다.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려 하자 진골 귀족들이 또 여자가 왕이 됐다고 반발했고, 화백의 대표 비담이 그것을 무효화하면서 난이 터졌다는 것이다. 

김유신의 군대를 불러들인 것도 진덕여왕인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반란이 일어난 10일 만에 진압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비담 등이 처형된 날이 1월 17일이다. 여왕사망일에서 정확히 10일째 되는 날이다. 반란의 확대를 예방하기 위해 비담 등 주모자 30인은 현장에서 즉결 처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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