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04757.html?_fr=mt2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4·19 선율’이 됐다
등록 :2017-07-28 20:00 수정 :2017-07-28 20:43

[토요판] 이영미의 광화문시대
(3) ‘해방가’(독립행진곡)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끝낸 4·19 혁명 당시 시위 현장에서는 ‘애국가’와 ‘삼일절 노래’, ‘광복절 노래’ 등 다양한 노래가 불렸다. 1946년에 만들어진 ‘해방가’(독립행진곡)도 그중 하나였다. 사진은 4·19 당시의 시위대 모습.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2010년 국가기록원에 요청해 공개한 사진이다. 연합뉴스

해방 후에 대중가요에서 잠깐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보여주었던 세종로와 삼각산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다시 작품에서 사라졌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미군정청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의 위풍당당한 중앙청이 되었지만, 바로 그 위풍당당함이야말로 대중들을 주눅들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세종로 앞길에서 감격과 착잡함을 한껏 드러냈던 ‘울어라 은방울’ 같은 노래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6·25전쟁으로 중앙청 건물에 붉은기와 김일성·스탈린의 얼굴이 걸렸고, 몇 달 후 그것이 내려지고 또 몇 달 후에 올라가고 내려왔다. 이곳에서 불렸던 노래도 몇 달 간격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가 불렸다가 얼마 후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자국…’(‘김일성 장군의 노래’)이 불렸을 테고, 또 세상이 뒤집혀 애국가가 불렸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바라본 세종로가 해방 때만큼 감격스러웠을지는 의문이다. 말은 ‘서울 수복’이지만 상처투성이였고 폭격 맞은 서울은 폐허 더미였다.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이 생명 다하도록>(한운사 작의 동명의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 신상옥 감독, 1960)에는 잔해만 남은 집터에서 주인공 여자가 막막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1960년인데도 아직 이런 장면을 생생하게 찍을 장소가 있었다는 것은 10년이 다 가도록 다 복구되지 못할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는 의미이다. 외양으로는 여전히 위풍당당한 중앙청은 그저 ‘대한늬우스’에서나 비춰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십년 후 그곳은 대중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로 역사가 뒤집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다름 아닌 1960년 4월혁명이다. 학생들은 어떤 노래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행진했을까?

박목월의 ‘이승만 대통령 찬가’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로부터 5년 전 권력의 중심지인 경무대(현재 청와대)에서 불렸을 노래 한 곡을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이 노래는 동영상을 곁들여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다. 유튜브에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찬가’라고 검색하면 흑백필름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오늘은 이 대통령 탄생하신 날/ 꽃 피고 새 노래하는 좋은 시절/ 우리들의 이 대통령 만수무강을/ 온 겨레가 다 같이 비옵나이다
우리들은 이 대통령 뜻을 받들어/ 자유 평화 올 때까지 멸공전선에/ 몸과 마음 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 번 굳세게 맹세합시다
‘우리 대통령’(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 1955)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불린 이 노래는 에스피(SP) 음반 시대였던 1950년대에 아주 드물게 엘피(LP) 음반으로까지 제작되었다. 강의 때 이 노래를 그저 가사만 소개해도 “북한 같아요”라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영상까지 보여주면 경악과 실소가 함께 터져 나온다. 흥미롭게도 이 노래의 작사자와 작곡자는 8년 뒤인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에 맞춰 또 ‘대통령 찬가’를 짓는데, 이 노래는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국가 행사의 대통령 입장 때 늘 연주되었다.

1955년 3월26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운동장(이후 동대문운동장)에서 ‘80세 탄신’ 경축식이 벌어졌다. 1천명 합창단이 이 노래를 불렀다. 숙명여고 학생들은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부채춤을 추고, 이승만의 모교인 배재고교 학생들이 집단체조를 했다. 앞서 언급한 동영상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서울시내에는 꽃버스와 꽃전차가 달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대통령이 오후 3시30분에 방송어린이합창단을 접견했으니, 아마 이 합창단이 경무대에서 ‘우리 대통령’을 불렀을 것이다. 학생의 축시(祝詩)는 아예 공모를 통해 선발되었는데, <경향신문>에 게재된 광주 계림국민학교 2학년 학생의 축시는 ‘머리털 하야신 우리 대통령/ 교실에만 가며는 매일 뵙지요/ 걱정하고 계시는 우리 대통령/ 남북통일 되며는 웃으시겠지’라고 노래하고 있다.

생일이라는 사적인 기념일을 공공의 기념일로 경축하는 이런 황당한 일이 그땐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축구대회에 그냥 ‘대통령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름까지 ‘대통령각하 사배 쟁탈 축구대회’(大統領閣下賜盃爭奪蹴球大會)라 붙여 ‘각하’와 ‘사’(賜)를 넣은 대회가 개최되는 시대, 이 대통령이 양녕대군 17대손임이 강조되면서 이 바람을 타고 양녕대군의 호방한 인물 됨됨이를 그린 소설 <주유천하>(조흔파 작, 1957)가 일간지에 연재되고 라디오 연속극과 영화로까지 리메이크되던 시대였다. 이를 단지 정권의 강압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다. 국민 상당수가 대통령과 왕의 차이를 머리로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심정적으로는 꽤나 헷갈리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1946년 나온 ‘독립행진곡’ 14년뒤 4·19혁명 때 인기
광화문 광장 등 현장서 불려, 월북 소설가 박태원이 작사
당시 운동권 노래 따로 없어 ‘애국가’·‘삼일절 노래’로 대체
죽음과 싸움의 비장함 담은 ‘전우야 잘 자라’ 가요도 인기


‘해방가’로 알려진 ‘독립행진곡’은 소설가 박태원이 가사를 짓고 김성태가 곡을 만들었다. 1946년 나온 이 노래는 1960년 4·19 혁명 때 시위 현장에서 널리 불렸다. 김광우 <실버라디오> 대표 제공

60년대까지 ‘광복절 노래’에 울컥

4·19 혁명은 대통령이 왕이나 아버지(‘국부 이승만’이라 불렸음을 기억하자)가 아니라 국민이 시위를 하면 해고시킬 수도 있는 공무원임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경험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군중이 많이 모인 시위라면 으레 노래가 따르는 법이다. 김필호(오하이오주립대 교수)가 몇 년 전 한국대중음악학회 학술대회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960년 3월6일부터 4월30일까지 일간지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1960.4.27 복간)에서 확인된 4·19 시위대의 노래는 ‘학도호국단가’, ‘애국가’, ‘전우야 잘 자라’, ‘통일행진곡’, ‘해방의 노래’(‘해방가’라 추정되며, 김순남 작곡의 ‘해방의 노래’와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삼일절 노래’, ‘광복절 노래’, 기타 교가나 동요, ‘6·25 노래’ 등이다. 지금의 감각으로 보자면 꽤나 놀랍다.

이 중 1970년대 이후까지 시위 현장에서 불린 노래는 ‘애국가’, ‘해방가’, ‘통일행진곡’ 정도이다.(‘통일행진곡’은 1970년대 이후 잘 불리지 않다가 1987년 이후 가사와 곡이 대폭 바뀌어 ‘민족해방가 2’라는 제목으로 불렸다.) ‘애국가’는 대한민국의 국가 운명이 걸렸다고 판단되는 큰 시위, 특히 조직대중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많아지는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에는 늘 불렸다. 1980년 민주화의 봄에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불렸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과 지난겨울 촛불혁명 때에도 불렸으며, 아마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는 광장에서는 늘 불릴 것이다. ‘해방가’는 원제목이 ‘독립행진곡’이다. 1946년 2월에 발간된 <해방 기념 애국가집>(조선국민음악연구회 편집·발행)에 수록된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한숨아 너 가거라 현해탄 건너/ 설움아 눈물아 너와도 하직/ 동무야 두 손 들어 만세 부르자 아득한 시베리아 넓은 벌판에/ 아 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린다
유구한 오천년 조국의 역사/ 앞으로도 억만년 더욱 빛나리/ 동무야 발맞추어 함께 나가자 우리의 앞길이 양양하고나/ 아 아 청춘의 청춘의 피가 끓는다
‘독립행진곡’(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1946)

1970년대 이후에 불렸던 가사와 비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동무’가 분단을 거치면서 ‘동포’가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감각이 반영된 ‘한숨아 너 가거라’는 일반적인 저항운동에 두루 통용될 만한 ‘어둠아 물러가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자도 주목할 만하다. 박태원 작사에 김성태 작곡이니 좌우합작이다. 소설가 박태원은 월북했고, 김성태는 이후 대한민국 음악계의 권력자가 되어 앞서 소개한 ‘우리 대통령’, ‘대통령 찬가’ 같은 노래를 계속 지으며 장수했다. 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우파의 집회에서도 널리 불렸다.

4·19 때 ‘삼일절 노래’(정인보 작사, 박태준 작곡), ‘광복절 노래’(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를 불렀다는 것은 지금 감각으로는 의아할 수 있지만, 사실 이들 노래는 1960년대 중반 한일수교 반대운동까지도 많이 불렸다. 196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시위 중에 ‘삼일절 노래’를 부르면 절정부인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대목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느껴졌다고 한다.

1955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80살 생일을 맞아 그를 찬양하는 노래인 ‘우리 대통령’(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이 만들어졌다.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는 내용의 이 노래는 유튜브(youtube.com/watch?v=II_rh4jgDoU)에 올라 있다. 81살 생일날(1956.3.26) 선물로 보내온 서예 작품을 이승만 대통령(가운데)과 부인 프란체스카(왼쪽 둘째)씨가 살펴보고 있다.  e영상역사관


1955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80살 생일을 맞아 그를 찬양하는 노래인 ‘우리 대통령’(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이 만들어졌다.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는 내용의 이 노래는 유튜브(youtube.com/watch?v=II_rh4jgDoU)에 올라 있다. 81살 생일날(1956.3.26) 선물로 보내온 서예 작품을 이승만 대통령(가운데)과 부인 프란체스카(왼쪽 둘째)씨가 살펴보고 있다. e영상역사관

‘6·25 노래’도 4·19 시위대에 인기

‘전우야 잘 자라’, ‘6·25 노래’가 불린 것도 꽤나 흥미롭다. 전쟁을 거치며 반공주의는 대학생들에게도 의심하기 힘든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많은 반공적인 노래 중 하필 이 노래가 선택된 것은 두 곡 모두 ‘피 흘리는 싸움의 비장함’을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9·28 수복 직후 당대 최고 대중가요 창작자 둘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전우야 잘 자라’는 낙동강 전선에서 추풍령, 한강 백사장, 삼팔선으로 이어지는 전선의 이동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이 땅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가슴 저리게 노래한다. 지금 들어도 가슴을 저리게 하는 2절과 4절을 소개한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모습이 꽃같이 별같이
‘전우야 잘 자라’ 2, 4절(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1950)

이 노래 속 죽음의 형상화는 이데올로기를 압도한다. 슬픔의 표현이 얼마나 절절한지 퇴각하는 시기에는 군인들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노래를 금지했을 정도이다. 그러니 총구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어깨를 결었던 4·19 시위대에게도 이 노래는 가슴을 울렸을 것이다.

‘6·25 노래’(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에서도 “맨주먹 붉은 피로 적들을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대목이, 맨주먹으로 경찰과 맞서 있던 4·19의 시위 현장에서 충분히 전율을 느끼게 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악곡은 박시춘의 ‘전우야 잘 자라’와 비교할 수 없이 격한데, 느낌이 풍부한 선율을 큰 스케일로 기막히게 뽑아내는 작곡가 김동진의 능력이 이 노래에서도 확인된다.

‘삼일절 노래’부터 ‘통일행진곡’, ‘6·25 노래’에 이르는 4·19 시위대의 레퍼토리를 보노라면, 혁명의 주체가 학생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삼일절 노래’는 1950년에 삼일절의 공식노래로 제정되었고 나머지 노래들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정책적으로 보급한 이들 노래는 학교 음악시간을 통해 가르쳐지고 불렸다. 예나 지금이나 서른이 넘으면 새 노래를 외어 부르기 힘들다. 그러니 1960년에 이 노래를 악보 없이 ‘떼창’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1950년대에 초·중등학교를 다닌 학생들뿐이었다. 광화문의 시위대는 ‘삼일절 노래’ 등을 함께 부르며 자신들이 기성세대와 다른 새로운 세대임을 가슴과 몸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성공회대 대우교수. 대중예술이란 창을 통해 당대 사람들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다시 광화문에서>를 냈다.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 <요즘 왜 이런 드라마가 뜨는 것인가> 등 20여권의 대중예술 관련 책을 썼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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