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0818142508250

[마부작침] 단독공개! 친일파 재산보고서④ 친일파의 상속자, 반성 대신 '재산만 대물림'
권지윤 기자 입력 2017.08.18. 14:25 수정 2017.08.18. 16:05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이를 ‘뒤집힌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문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선 "친일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국가에 헌신하면 3대까지 대접 받는다는 인식을 심겠다"고 공언했다.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호텔'. 사회 유력인사들이 자주 찾고, 국가적 행사가 열리기도 하는 특급호텔이다. 이 호텔의 설립자는 79세 이우영 회장이다.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히 친일파로 규정한 청풍군 이해승(1890~1957?)이 이 회장의 할아버지다.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친일파 재산보고서 ①편, ②편, ③편 기사>에 이어 이우영 회장의 사례를 통해서 "뒤집힌 현실"을 추적했다.

● 왕족에서 친일파가 된 '이해승'

청풍군 '이해승'. 그는 조선 왕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5세손이다. 한마디로 왕족이었다. 왕족이었지만 그는 1910년 10월,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 중 최고 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엔 일제로부터 은사금 168,000원을 받았고, 1912년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 일제강점기 동안 수십 만㎡의 토지도 불하받았다.

이해승은 1941년, 황국신민화 운동을 위해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조선귀족회 회장이 된 이해승은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거액의 국방 헌금을 일제에 냈다. 조선총독을 찬양하는 담화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공히 조선 왕족으로서 조선을 버린 그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 파산 위기 이해승…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돈 빌려 호화 생활

이해승은 여느 친일파와 다른 '특별한 친일파'였다. 왕족이라는 이유로 특별 관리를 받으며 각종 위기를 겪을 때도 일제는 그를 구원해줬다. 그는 일제시대 파산 위기를 겪었다. 파산 위기가 도리어 후손에게 부를 대물림할 기회가 될 줄, 그 역시 당시에는 몰랐을 것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한시적으로 활동한 대통령 직속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해승은 조선 왕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의 보증을 섰다. 윤택영이 1920년 채무를 갚지 않고 중국으로 도피하면서 보증을 선 이해승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38만 원을 상환하지 못하면 파산하게 될 이해승에게 일제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왕족이 파산하면 협력자를 잃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마부작침] 특별관리받은 이해승

이해승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이왕직’(왕가의 사무를 담당하던 일제 기구)이 나섰다. 이왕직 장관 등의 보증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로부터 자금을 빌렸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다 알다시피 일제의 수탈기구였다. 이해승이 보유했던 부동산을 이왕직 명의로 이전하고, 이왕직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보증을 서주는 방식으로 이해승은 38만 원을 빌렸다.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받은 자금을 채무 변제에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에 걸쳐 약정서를 작성한 것으로 친일재산조사위는 파악했다. 1929년 2월 작성된 '명의신탁 약정서'가 대표적이다. “이해승이 동척에 변제기간인 15년 동안 채무를 전부 갚으면, 이왕직 장관 명의로 이전된 이해승의 부동산을, 무조건 또는 무상으로 다시 이해승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해 이해승이 채무변제를 위해 본인 부동산을 이왕직에 신탁한 뒤, 되돌려 받기로 한 것이다.

조사위는 이런 식으로 이해승이 신탁한 부동산을 약 812필지, 339만 4,216평으로 추산했다. 1,122만 548㎡, 여의도의 3.9배 규모로, 그가 실제 보유한 부동산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① 친일파 이완용 재산 전모 최초 확인>기사에서 보도했던 대표적 친일파 이완용과 견줄 만한 부동산 부자였던 셈이다. 이해승이 부동산을 신탁한 이후에도, 일제는 그에게 국유지는 물론 광업권을 제공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줬다. 파산 위기도 손쉽게 극복한 이해승. 하지만, 광복은 그가 피할 수 없는 역사였다.




● 친일파 재기의 기회 '반민특위 해산'…이해승은 위기를 넘겼다

1945년 광복은 해방을 뜻하는 동시에 친일파 청산의 시작을 의미했다. 친일파를 단죄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만들어졌다. 제헌의회에서 3번째로 만든 법이 '반민법'이었다. 정부조직법, 사면법 다음 만들어진 법으로, 당시 친일파 단죄는 시대적 당위였다.

친일파 사형, 무기징역, 재산 몰수 등 강력한 처벌 조항이 포함돼 있었던 그 법으로부터 이해승은 자유롭지 않은 처지였다. 일제 때 작성한 신탁협정서에 재산 목록까지 적혀있어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민특위는 이해승을 체포해 기소했지만, 단죄도 재산 몰수도 무위에 그쳤다. 반민특위가 설치 1년 2개월 만인 1951년 2월 와해되면서 그는 풀려났다. 그런데, 이해승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그의 아들 이완주는 광복 이전인 1941년 숨졌기 때문에 이해승의 직계 후손은 어린 손자 이우영이었다.

소송 기록에 따르면 1957년 8월 20일, 이우영 회장은 이해승의 법정 상속인이 됐다. 할아버지 이해승에 대한 실종 신고로 상속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1957년 법정 상속인이 된 직후부터 이우영 회장은 공격적으로 조부의 재산 찾기에 나섰다. 반민법이 사라져 걸림돌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해승이 일제 때 작성한 신탁협정은 후손의 재산 찾기 과정에서 유용한 자료가 됐고,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헌법은 재산 찾기의 주요한 도구가 됐다. 헌법상 보장된 소송 청구권, 재산권이 그의 무기가 됐다.

● "내가 바로 후작 이해승의 상속자다"

이우영 회장은 1957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국가를 상대로 할아버지 이해승의 땅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친일파 이해승이 일제 기관인 이왕직에 신탁했던 땅들을 하나 하나 되찾아간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소송들은 대부분 별다른 쟁점 없이 끝났다. <마부작침>이 확보한 소송 기록들에 따르면, 당시 사법부는 친일파 청산이나 친일재산 환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우영 회장이 1998년 정부를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소송'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우영 회장은 할아버지 이해승이 일제시대 때 작성된 신탁약정을 근거로 땅을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당시 재판부는 "이해승이 이왕직 장관의 보증 하에 동척으로부터 금원을 차용했고, 이를 모두 변제하면 부동산을 돌려받기로 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어 "1936년 이해승이 변제를 완료했기 때문에 이해승의 권리를 상속받은 이우영에게 땅을 돌려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친일의 대가로 형성된 재산, 일제시대 때 이뤄진 계약이라는 점에 대한 법적인 고민도, 헌법 정신에 대한 고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 달 만에 끝난 1심 재판 이후 정부는 항소조차 하지 않았고, 이우영 회장은 승리했다. 친일파 이해승 소유였던 부동산이 하나 둘 손자 이우영 회장에게 넘어갔다.


● 무관심한 국회, 무기력한 정부, 소극적인 사법부…이우영 회장이 되찾은 땅만 약 269만 평

사법부의 이런 판단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해승만 아니라 이완용 등 다른 친일파 후손의 소송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내려졌다. 이완용의 증손자 이 모 씨가 제기한 토지 반환 소송에서 서울고등법원은 1997년, "친일파의 재산권을 박탈 또는 제한하는 법률이 국회에서 제정된 일이 없다"며 "과거의 일을 정의 관념만 내세워 문제 삼는 건 오히려 사회 질서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그렇게 땅을 돌려줬다. 국회가 친일 재산 관련 법률도 제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법부가 나설 수 없다는 취지였다.



사법부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있었다. 친일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진 못할지언정, 적어도 사법부가 나서 돌려주는 건 국가의 '정통성'과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해승과 마찬가지로 왕족이면서 친일파였던 이재극 후손이 낸 토지 환수 소송에서 당시 1심 재판부는 건국이념을 강조하며 "법원은 헌법정신을 수호하는 기관"이라며 "친일 행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얻은 재산에 대해 법의 보호를 구하는 건 정의에 현저히 어긋난다"고 각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친일 재산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를 권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항소심인 서울고법 민사20부(당시 재판장 민일영 부장판사)은 2003년, "법적인 장치 없이 국민 감정을 내세워 재산권을 박탈하는 건,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1심을 뒤집었다. 친일파 후손들의 친일 재산 찾기는 그렇게 '당연한 권리'라는 외피를 두르게 됐다.



친일재산조사위는 이우영 회장이 1957년부터 1998년까지 소송을 통해 약 269만 평, 890만㎡에 달하는 땅을 되찾은 것으로 파악했다. 여의도 면적의 약 3배 크기로, 친일파 이해승이 신탁한 부동산의 79% 정도를 받아간 셈이다. 1988년, 이 회장은 반환받은 서울 홍은동 땅 위에 호텔을 세웠다. 바로 '스위스 그랜드 호텔(현 그랜드 힐튼 호텔)'이다.



● 해산된 친일재산조사위…끝나지 않은 친일 재산 전쟁

'뒤집힌 현실'을 다시 뒤집기 위해 2006년 친일재산조사위가 출범했지만, 때를 놓친 청산 작업의 한계는 뚜렷했다. 광복 이후 61년이 흘러 친일파는 사라졌고, 친일 재산은 복잡하고 은밀하게 대물림된 뒤였다. 게다가 후손들의 재산 찾기 소송으로 반환된 토지의 상당수도 제3자에게 매각된 상황이었다.

조사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해승을 포함한 친일파 168명으로부터 1,300만㎡, 2,457필지를 환수 결정했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① 친일파 이완용 재산 전모 최초 확인>기사에 보도했듯 이완용 친일파 1명 소유 부동산의 0.05%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다. 친일파 이해승과 관련해 친일 재산 197만여㎡를 환수 결정하고, 그의 손자 이우영 회장이 제3자에게 판 땅 181만여㎡의 매매 대금에 대해선 부당 이득 환수 결정을 내렸다. 이 역시 이우영 회장이 되찾아간 땅의 절반도 안 되는 수치였다.

친일재산환수특별법이 시행한 이후인 2006년까지도 친일파 후손이 직접 보유하고 있거나, 그 즈음 매각한 땅만 귀속할 수 있었기에 국가 귀속은 제한적이었다. 장완익 전 친일재산조사위 사무처장은 이를 두고 "잘못된 역사를 완벽하게 바로잡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흐른 상태였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귀속 결정한 재산을 두고도 전쟁 같은 소송전이 벌어졌다.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 귀속 결정에 반발하며 줄소송을 낸 것이다. 친일재산조사위가 귀속 결정한 재산의 60%가 분쟁에 휘말릴 만큼 친일파 후손들은 격렬하고 집요하게 대응했다. 근거법(친일재산환수특별법)을 두고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조사위 출범 이후 헌법소원 및 민사·행정 소송만 124건(가처분 제외)으로 파악됐다.



대부분 친일파 후손들이 원고로서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들이었다. 환수 대상자가 된 168명 중 62명 친일파의 후손들이 환수 결정에 불복하며 반발했다. 장완익 전 조사위사무처장은 "후손들은 '연좌제다, 재산권 침해다'라고 반발했는데, 반민특위법이 제대로 시행됐다면 광복 직후에 몰수했을 재산들이었다"며 "후손들 입장에서 억울해 할 일이 결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부작침> 분석결과, 124건 중 친일파 재산 관련 민사 행정 소송은 모두 115건으로, 국가(친일재산조사위 포함)는 5건을 제외한 모든 분쟁에서 승소했다. 패소 5건 중 1건이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 회장이 제기한 '국가 귀속 결정 취소 소송'이었다. "귀속 결정된 경기 포천시 등 부동산 192필지, 192만㎡(시가 318억 원 대) 환수를 취소하라"는 것으로, 국가는 최종 패소했다.

● 남은 소송 단 1건…'망각과의 전쟁'

친일재산조사위가 해산한 지도 벌써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소송은 끝나지 않았다. 친일재산조사위와 관련해 남은 소송은 단 1건. 국가가 이우영 회장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소송'이다. 앞서 패소한 192필지 환수를 두고 이번엔 정부가 원고가 돼 다시 소송을 낸 것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대법원의 최종 패소 판결이 있었기에 국가 입장에선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남은 한 건의 소송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여전히 어디선가 대물림 되고 있을 친일 재산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에 언급한 "불의와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단절하기 위해서도 친일 청산은 여전히 필요하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① ② ③편>기사에서 연속 보도했듯 새롭게 발견된 이완용의 친일재산, 환수 가능성이 열린 단종태실지, 숨어있는 적국의 재산, 즉 적산(敵産) 등 친일 잔재는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런 친일 재산이 드러나도 국가 귀속을 주도할 정부 부처 한 곳이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단 한 건의 소송 못지 않게 추가 소송을 통한 지속적인 국가 귀속이 필요하다.

장완익 전 친일재산조사위 사무처장은 "친일재산조사위가 활동을 종료하면서, 정부 관련 부처에서 업무를 나눠 맡아주길 바랐지만 현실은 달랐다"며 "새로운 친일 재산을 확인해도 국가 귀속 업무를 수행할 팀조차 없다"고 말했다. 조사위 종료와 함께 친일재산 환수도 사실상 끝난 셈이다.

이준식 전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은 "선조의 잘못을 대신해 속죄는커녕 재산 되찾기에만 급급한 후손들의 모습을 보면서 친일 청산을 위해서 아직도 갈 길이 너무도 멀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광복 72주년. 우리는 '망각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역사를 '망각'해 '뒤집힌 현실'을 깨닫고 있다.

※ 친일파 재산 관련 영상, 사료, 그래픽 등이 포함된 더욱 상세한 기사는  (http://mabu.newscloud.sbs.co.kr/20170818/) 에 접속하면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