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Tenman/report_last.aspx?CNTN_CD=A0002349666

박정희의 말 한 마디, '강남'을 지옥으로 만들다
[강남공화국의 민낯 7] 지역 차별의 상징이 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17.08.10 21:32 | 글:전상봉 | 편집:최유진


▲ 양재 나들목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구간이 개통될 당시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이후 인근 지역의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7년 9월에 설치되었다. 양재 나들목이 개통한 직후인 1977년 10월 1일 촬영한 사진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이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 아래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에 있어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 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1970년 7월 7일 건설부장관 이한림'

경북 김천 추풍령휴게소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 뒷면에 새겨진 글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1964년 12월 대통령 박정희의 서독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차관 도입을 목적으로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는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에 매료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몰두했다.

그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처음 발언한 것은 1967년 4월 27일이다. 이날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제6대 대선 유세에서 박정희는 4대강 유역개발이 포함된 국토건설계획을 발표하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공약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1967년 11월 14일 정부여당연석회의를 개최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했다. 공사는 네 구간으로 나누어 착공되었다. 1968년 2월 1일 서울-수원-오산 구간을 처음 착공한 다음 4월 3일에는 오산-천안-대전 구간 기공식이 열렸다. 9월 11일에는 대구-경주-부산 구간 공사가 시작되었고, 가장 난공사인 대전-대구 구간은 해가 바뀐 1969년 1월 4일 착공되었다.

공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1968년 12월 21일 서울-수원 구간이 처음 개통된데 이어 12월 30일에는 수원-오산 구간이 개통되었다. 해가 바뀐 1969년 9월 29일에는 오산-천안 구간이, 12월 10일에는 천안-대전 구간이, 12월 29일에는 대구-경주-부산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대전-대구 구간이 1970년 7월 7일 완공되면서 경부고속도로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빛과 그림자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개발독재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토건사업이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다음과 같이 1970년대를 정의한 바 있다.

"1970년대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상징으로 표현하자면,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전화(戰禍)의 잿더미 속에서 들고일어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며, 그해 11월 13일에 일어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그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을 상징한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권, 5쪽

대한민국을 종관하는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으로 전국은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물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국민들의 심리적 거리감은 급속하게 좁혀졌다. 대통령 박정희가 1966년 1월 18일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1970년대 후반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날 무렵에는 '소비는 미덕'이라는 새로운 표어가 등장하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풍요한 사회'"가 국민들의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경부고속도로는 선 개통, 후 보완이라는 원칙하에 군사작전을 펼치듯이 건설되어 보수공사로 몸살을 앓았다. 개통 1년이 지나자 건설비의 10%인 42억3천만 원이 보수공사비로 들어갔고, 개통 10년이 지나자 보수공사비는 건설비(430억 원)를 초과했다. 그리고 완공 20년이 지나자 건설비의 네 배에 가까운 1527억 원이 유지보수비로 들어갔다. 한마디로 경부고속도로는 누더기 고속도로였다.

대륙 침략을 위해 일제가 부설한 경부선과 나란히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는 경기도 서부를 종관하는 1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다가 대전에서 충북을 지나 경북으로 우회한다. 이 같은 공간 구조는 경부고속도로의 교통 혼잡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영남과 호남의 여객과 화물이 서울-대전 구간에 집중되면서, 이 구간은 만성적인 교통 체증에 시달려야 했다.

경부고속도로는 망국적인 영호남 지역 차별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이 마무리될 때까지 호남에는 이렇다 할 공장은 물론 제대로 된 도로 하나 건설되지 않았다. 반면 영남에는 울산공단, 구미공단, 포항제철 등 공업지대가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호남 사람들에게 경부고속도로는 영·호남 지역 차별을 가시적으로 입증하는 증거물로 받아들여졌다.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라 불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을 의미했다. 공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현대건설은 굴지의 재벌로 성장했고, 경부고속도로 부지 확보를 위해 시행된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은 강남 개발과 투기를 촉발시켰다. 특히 1975년 영동아파트지구 지정과 함께 시작된 강남발 아파트 건설붐을 타고 토건국가 대한민국이 등장했다.

경부고속도로는 한미일 3각 동맹체제의 강화라는 정치군사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깊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 27억 원이 건설비로 투입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경부고속도로는 한미일 동맹관계에 기초하여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위한 기반시설로 영남의 산업벨트(포항제철-울산공단-부산항-마창공단)와 수도권을 잇기 위한 목적 하에 건설되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교통지옥의 문이 열리다


▲ 1976년 9월 1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완공되어 구자춘 시장과 운수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장되었다. 4개월 만에 급조된 고속버스터미널은 5만평의 허허벌판에 세 개의 승차장과 300평 규모의 공동정비고가 전부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1969년 4월 12일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고속버스(한진고속)가 운행을 시작했다. 8월 15일에는 동양고속이 운영하는 고속버스가 서울-수원 구간을 달리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고속버스시대가 개막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던 1968년 11월 29일 고속버스 운영사가 선정됐다. 한진관광, 동양고속, 광주여객, 한일여객, 천일여객, 코리아그레이하운드였다. 운영사 선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소는 대통령 박정희와 고속버스 사업주의 친분관계였다. 항공, 해운업을 전문으로 하는 한진고속을 비롯하여 광주·전남은 광주고속이, 대구·경북은 한일여객이, 부산·경남은 천일여객이, 충북·청주는 속리산고속이 선정되었고 서울-인천 구간은 삼화고속에게 돌아갔다. 이들 업체는 일본, 독일, 미국에서 중고 고속버스를 들여와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수입한 중고 버스는 일본제 190대, 독일제 벤츠 160대, 그레이하운드 80대였다.

이즈음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한진고속은 봉래동1가에, 삼화고속은 종로구 관철동에, 동양고속은 남대문로5가에, 광주·한남·한일·천일고속은 종로6가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에, 속리산고속은 을지로3가에, 유신고속(코오롱고속)은 충무로3가에, 그레이하운드는 도동1가에 위치하였다.

"서울시 인구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적인 방안이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박정희는 이렇게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서울시장 구자춘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 3핵 도시 구상에 따라 구도심(기존 동대문터미널과 봉래동2가 터미널), 영등포(당산동3가 구 영등포공작창), 영동지구(반포동)에 고속버스터미널을 조성하는 방안이 제기되었으나 구자춘의 의중은 강남에 종합버스터미널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75년 6월 27일 서울시는 도심 집중의 완화와 강남 개발을 촉진한다는 이유로 서초구 반포동 19번지에 종합버스터미널을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계획에 따르면 반포동 19번지 5만평의 부지에 고속버스터미널(3만평)과 시외버스터미널(1만평)을 짓고, 나머지 1만평의 부지에 택시 승강장과 시내버스 주차장 등을 건설하는 내용이었다.

해가 바뀐 1976년 9월 1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완공되었다. 4개월 만에 급조된 고속버스터미널은 5만평의 허허벌판에 세 개의 승차장과 300평 규모의 공동정비고가 전부였다. 강북에서 강남을 오가는 대중교통편이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강북 터미널에서 출발한 고속버스가 잠시 들렀다가는 중간 정류장에 지나지 않았다.


▲ 1978년 3월 23일 율산건설이 제안한 강남종합터미널 조감도이다. 율산그룹은 서울종합터미널(주)을 설립하고 20층 높이의 호남선·영동선 터미널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자금 압박을 받으면서 지상 3층의 가건물의 터미널을 준공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디지털 아카이브

이 같은 상황 타개를 위해 정부가 동원한 방법은 강북 터미널의 강제 이전 조치였다. 1977년 4월 1일 국토부장관 최경록은 강북의 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전하지 않으면 사업면허를 취소한다는 으름장에 고속버스 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은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강요하였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서울시가 잠수교를 건설(1976. 7. 15)하고, 남산3호 터널을 뚫었지만(1978. 5. 1) 교통난은 해소되지 않았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주변은 만성적인 교통정체로 몸살을 앓았다. 대중교통이라곤 시내버스와 합승 택시가 전부였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말 그대로 교통지옥이었다. 서울시의 주먹구구식 행정의 결과로 1984년 개통된 지하철 2호선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비켜지나갔다. 지옥과도 같은 교통난은 1985년 10월 18일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된 뒤에야 숨통이 트였다.

이런 가운데 1978년 11월 23일 8개의 고속버스회사가 설립한 (주)서울고속이 280억 원을 들여 경부선 고속버스터미널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경부선)이 완공된 것은 1981년 10월 20일이다. 1층, 3층, 5층에 승차장이 있었던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5층이나 3층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갈 때 제법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하게 지어진 승차장 램프는 버스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1988년 5월 5층 승차장이 폐쇄되었고 1992년 10월에는 3층 승차장마저 문을 닫았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공사비 280억 원 가운데 260억 원이 상인들의 임대 보증금으로 충당됐을 정도로 (주)서울고속의 재무상태가 부실했다. (주)서울고속의 부실한 재무구조는 터미널 준공 이후 비리로 이어졌다. 1983년에는 분양한 상가 점포를 전세로 임대한 것처럼 서류를 위조하여 74억 원을 추징당했다. 1988년에는 폐쇄된 5층 승차장과 부대 공간을 판매시설로 불법 전용하여 관련자들이 처벌받기도 했다.

지역차별의 상징에서 물신의 공간으로


▲ 호남선과 영동선이 입주한 센트럴시티 터미널은 2000년 9월 1일 완공되었다. 센트럴시티에는 터미널과 함께 34층 높이의 JW메리어트호텔과 신세계백화점이 입주한 이른바 복합생활문화공간으로 지어졌다. ⓒ 전상봉

서울시는 터미널 주변의 만성적인 교통난 완화를 위해 시외버스터미널을 서초구 서초동으로 이전한다. 그런 다음 1977년 4월 시외버스터미널 부지 1만8781평을 율산그룹에 매각(13억 원)했다. 율산그룹 회장 신선호는 서울종합터미널(주)을 설립하고 이곳에 20층 높이의 호남선·영동선 터미널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1977년 10월 6일 터미널 신축공사가 시작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율산그룹이 자금 압박을 받으면서 공사는 차질을 빚었다. 결국 호남선·영동선 터미널은 1978년 3월 1일 대합실과 사무실, 정비고만 있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가건물로 준공되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자행한 이듬해 경부선 터미널(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완공되었다. 11층으로 지어진 경부선 터미널은 3층 높이의 가건물인 호남선 터미널과 대비되었다. 두 건물의 극적인 대비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진 영호남 지역 차별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율산그룹(서울종합터미널(주))이 제출한 호남선 터미널 신축계획안이 1992년 11월 12일 수도권정비심의위원회를 통과했다. 신축계획안의 골자는 호남선 터미널 자리에 지하3층, 지상16층, 연건평 4만6881평의 백화점·호텔·터미널이 입주하는 복합건물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공사는 1994년 12월 시작되었으나 순탄치 않았다. 서울종합터미널(주)의 후신인 센트럴시티의 자금력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0년 9월 1일 34층 높이의 센트럴시티가 완공되었다. 센트럴시티는 호남선 고속버스터미널과 함께 신세계백화점 강남점과 JW메리어트호텔이 입주한 이른바 복합생활문화공간으로 지어졌다.

김대중 정부 시절 센트럴시티가 준공되면서 호남선 터미널에 투영된 지역 차별의 상징성은 사라졌다. 박해 받던 호남 정치의 상징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초라한 가건물 터미널이 34층의 으리으리한 건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0년 동안 지역 차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호남선 터미널은 화합의 공간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호남선이 입주한 센트럴시티는 터미널 본래의 공공적 기능보다는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물신(物神)의 공간으로 채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센트럴시티는 강남의 탐욕과 특권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이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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