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51265
콧대 높아진 맥아더, 대통령 요청도 무시하다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0] 인천상륙작전, 전세를 뒤집은 맥아더
17.08.19 10:43 l 최종 업데이트 17.08.19 10:43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950. 9. 14. 미 군함 Mountain Mckinley 호 함상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상륙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 맥아더기념관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전세를 단박에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허를 찌르는 작전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 박태균 <한국전쟁> 207쪽 중
북한 인민군은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남짓만에 38선에서부터 낙동강까지 해일처럼 밀고 내려왔다. 유엔군 측은 속수무책으로(또는 작전상 후퇴라는 이름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다. 하지만 최후의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배수진으로 친 이후, 양측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지루한 전투(다부동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선은 계속 교착상태로 한 달이 넘도록 쌍방의 군사들은 지루한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쿄의 맥아더는 반격의 극적인 돌파구를 계속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사실 애초 이 작전의 기획단은 인천, 군산, 동해안의 주문진 등 세 곳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1950. 9. 부산. 미군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고자 거물 망을 타고 군함에 승선하고 있다. ⓒ 맥아더기념관
미 합동참모부는 후보지 중 군산을 상륙지점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미 해군 고위층은 인천만의 조수간만 차와 협소한 지형을 문제 삼아 인천은 상륙으로 적합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맥아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맥아더는 인천으로 상륙해야만 북한 인민군의 병참선을 차단할 수 있고, 수도 서울을 쉽게 수복할 수 있다는 등의 근거를 들었다. 마침내 맥아더는 미 합참으로부터 인천 상륙을 승인받았고, 작전일(D- Day)을 1950년 9월 15일로 잡았다.
인천상륙작전은 먼저 서해안 군산과 동해안 삼척에 대한 수일간의 폭격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는 상륙작전의 은폐를 위해 교란 작전이었다. 그러다가 9월 13일부터 갑자기 폭격 목표지점을 인천으로 바꾸었다.
1950. 9. 15. 맥아더 장군이 작전 지휘선 Mountain Mckinley 호 함상에서 “Go!"라고 인천상륙작전 공격명령을 내리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
한국전쟁 당시 15세의 소년으로, 고향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마을 '필경사(筆耕舍)' 에서 피란 중이었던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3남 심재호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형들이 의용군으로 나간) 그 얼마 뒤, 미 군함은 고향 앞바다에 빼곡히 진을 쳤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언덕에 올라가 (경기만 일대에서) 밤새 함포사격 하는 군함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군함들의 함포사격은 마치 밤하늘에 불꽃놀이를 하듯이 고향마을 일대 밤하늘을 환하게 수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의 함포사격은 1950년 9월 중순으로 인천상륙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9월 13, 14일 양일간에 걸친 미 전투기의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인천이 폐허화된 상황에서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작전 전 이틀간 인천 연안에 대한 포격과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능가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이 작전을 위해 제10군단을 창설, 군단장에 알몬드(Almond) 소장을 임명한 후, 한국군 제1해병연대, 한국군 제17연대,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미 제2특수공병여단 등 총 병력 7만5000명, 상륙 함정 261척을 동원했다. 이에 반해 북한군은 정규 병력 일부와 학생, 민간인으로 구성된 2만여 명 정도가 인천 연안을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 기관총과 소총 정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군사적인 화력으로 볼 때 '어린아이 팔 비틀기'와 같은, 소위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로, 상륙작전의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유엔군은 9월 15일 새벽 2시께 작전을 개시해 그날 밤 10시께 별다른 저항 없이 상륙했다. 유엔군은 이 작전의 성공으로 그동안 방어에만 급급한 모양새에서 공격 태세로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일대 반격작전으로 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낼 경우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인명 피해를 예상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성공으로 예상 피해도 줄였다. 동시에 전쟁의 주도권을 인민군으로부터 완전히 빼앗을 수 있었다.
1950. 9. 15. 인천항으로 상륙하고자 돌진하는 함정들.ⓒ 맥아더기념관
허리가 끊어진 인민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해상에 대기 중이던 미 제7사단은 9월 17일부터 상륙을 시작해 수원-오산 방면으로 진격해나갔다. 이로써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전선에서 반격작전을 기다리던 미 제8군과 연계해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낙동강 전선의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개시한 지 일주일 만인 9월 23일 마침내 낙동강전선을 돌파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은 보급품도, 병력도, 지원받을 수 없는, 허리가 끊어지는 타격을 입었다. 전투는커녕 패주하기 바빴다.
1950. 9. 16. 포격으로 불타고 있는 인천시가지에서 미군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낙동강전선의 유엔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맹추격해 9월 27일 오산 북방에서 인천 상륙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남한 지역에 남아 있던 인민군들을 제대로 소탕하지 않은 채 북진에만 급급했다.
그리하여 남한 지역에 남아 있던 인민군들은 대부분 백두대간을 통해 북상했고, 미처 패주치 못한 인민군은 백두대간과 지리산에 잠입해 '남부군'이라는 빨치산 특수부대로 재편됐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들이 성급히 남진했던 우(愚)을 유엔군도 똑같이 범한 것이다.
1950. 9. 16. 유엔군들이 인천상륙 후 시가전에서 인민군을 생포하고 있다.ⓒ NARA
군사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 성공확률을 다소 과장해 '1/5000'로 보았다. 아무튼 이 작전이 성공하자 맥아더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았다. 그는 그때부터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조차도 우습게 여겼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치하하고 이후 작전을 상의하고자 본국 방문을 요청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한국전쟁 지휘 때문에 장시간 전장을 떠날 수 없다'는 핑계로 트루먼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체면도 구겨가며 맥아더가 머물고 있는 태평양상의 섬 웨이크로 날아왔다.
그 무렵 맥아더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성경 구절을 몰랐던 것 같다. 이는 인문 지식과 교양 그리고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사지식이 부족했던, 평생 전쟁에만 골몰한 맥아더의 한계였을 것이다.
(* 다음 회는 '서울 수복' 편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린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950. 9. 16. 인천. 유엔군의 함포사격으로 해안에 전사한 인민군 시신들. ⓒ 맥아더기념관
1950. 9. 16. 함포사격 및 전투기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인천 시가지.ⓒ 맥아더기념관
1950. 9. 16. 미 군함의 함포사격으로 불바다가 된 인천항 일대.ⓒ 맥아더기념관
1950. 9. 16. 인천. 한 미 해병대 병사가 인민군 참호를 향하여 화염방사기로 불을 뿜고 있다.ⓒ 맥아더기념관
1950. 9. 16. 인천상륙작전 직후의 인천항 모습.ⓒ 맥아더기념관
1950. 9. 16. 인천. 맥아더 장군(선글라스)이 상륙작전 후 인천부두로 상륙하고 있다.ⓒ NARA
1950. 9. 유엔군이 인천시가지 전투 중 인민군 부역혐의자를 잡아들이고 있다.ⓒ NARA
1950. 9. 17. 인천. 인천상륙작전 후 생포한 인민군들.ⓒ 맥아더기념관
1950. 9. 19. 상륙한 유엔군을 환영하고자 몰려든 인천시민들.ⓒ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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