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7459

열여섯 살에 형 시신 수습, '충북 모스크바'의 참상
수리너머 고개에서 큰형의 시신을 수습한 박헌영씨 사연
17.09.08 21:13 l 최종 업데이트 17.09.08 21:13 l 글: 박만순(us2248) 편집: 최유진(youjin0213)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경은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 재소자 등을 불법으로 학살했다. 충북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다. 특히 청주, 청원,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남일면 두산리 지경골, 오창초등학교 곳곳에 민간인 유해들이 묻혀 있다. 당시 희생당한 박헌동씨의 사연을 동생인 박헌영, 아들인 박석배를 인터뷰해 재구성했다. [편집자말]

아버지와 사촌형을 따라 큰형 시신을 수습하러 간 박헌영은 수리너머고개에 들어서자 전신이 마비되는 듯했다. 30여구의 시신이 총을 맞은 채 골창 개울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의 큰형 박헌동의 손과 발은 산내끼(새끼)로 칭칭 묶여져 있었다. 

형을 포함해 부강면 보도연맹원들이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집단 총살된 것이다. 발목은 2~3인씩 묶여 마치 이인삼각(二人三脚) 놀이하는 것처럼 되어 있었는데, 실은 보도연맹원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가져 간 낫으로 산내끼를 잘라 내고 담가(擔架)에 시신을 수습하려는데, 무장한 경찰들이 나타났다. 아버지 박성진은 경찰들을 향해 "이놈들아, 나도 죽여라!"고 고함을 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을 감시하는 경찰들도 아버지의 원한에 찬 목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박헌동의 시신은 인근야산에 가매장되었고, 2년 후에 선산으로 이장되었다.

열여섯 살에 형 시신 수습에 참여한 박헌영씨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형 시신 수습에 참여한 박헌영(83·청주시)씨는 지난 4일 67년 만에 수리너머 고개를 찾았다. 30분 동안 현장을 둘러본 박헌영씨는 내내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반백년이 넘은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개울은 그대로 있네..." 

남청주IC에서 부강 가는 옛길로 가다보면 2km 좌측 편에 무인텔이 두 개 있는데, 그곳이 수리너머고개다. "어릴 때부터 이쪽 길을 많이 다녔지만, 현장에 와 본 것은 처음이여"라며 말하는 박헌영씨의 눈 가장자리에는 눈물이 맺혔다.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된 충북 청원군 부용면은 해방 후 '충북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기도 전인 1909년에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청주·청원 물류 중심지로 성장했고, 일제시대에는 적지 않은 지주의 자식들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사상의 진원지가 되었던 탓이다.

'부강경로당'에서 만난 방두일(91·세종시 부용면)옹은 "일본으로 유학 갔다 온 김학준, 노서호, 김씨 형제(김낙기, 김승기)가 전부 지주 집안 자제들이라, 그 집안의 농토를 지어먹던 소작인들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어"라면서 "동경제대 출신 김학준과 와세다대 출신 노서호는 부강뿐만이 아니라 충북에서도 호가 난 빨갱이였어. 그들이 주장한 사상에 소작인들이 공감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 보도연맹원여.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이의 70%는 아무 이념도 없는 소작인였어"라고 당시의 정황을 설명했다.

자료에 의하면 김학준은 충북민전 부책임자였고, 노서호는 남로당 중앙위원을 역임했으며, 김낙기·김승기 형제는 보도연맹원 학살 당시 1차 학살대상이 되었다. 부용면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36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이념과는 무관한 농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강초등학교에 구금된 보도연맹원 150명은 전부 살았어"

 군경에 의해 집단 총살 당한 박헌동씨의 아들 박석배씨.
▲  군경에 의해 집단 총살 당한 박헌동씨의 아들 박석배씨. ⓒ 박만순

부강초등학교를 나와 보선사무소에 취직해, 6.25 당시 부강역에 근무했던 박헌동씨는 2차에 부강지서로 소집되어 1950년 7월 9일 수리너머 고개에서 학살되었다. 이들보다 일찍 소집된 10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남일면 분터골에서 학살되었다. 박헌동 동생 박헌귀는 3차로 소집되어, 부강초등학교 교실에 감금되었다.

막내동생 헌영은 큰 형이 학살된 사실을 알고, 부강초등학교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둘째 형을 만나 큰 형이 죽은 사실을 이야기하자, "같이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잠시 후에 모두 몸을 피했다"고 한다.

방두일 옹의 증언은 다르다. "내 아버지가 당시 부강의용소방대장이었는데, 부강초등학교에 감금된 보도연맹원들에게 도망가라고 해 전부 살았다"고 한다. 이로써 15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두 가지 증언 모두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부강초등학교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을 감시하는 경찰들이나 의용소방대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방두일 옹의 부친인 방한갑 의용소방대장의 역할이 훨씬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박헌귀를 포함한 부강지역 150여 보도연맹원들은 사지(死地)에서 살아났다.

"장남을 잃은 어머니는 홧병으로 그해 동짓달에 돌아가셨어"

졸지에 장남을 잃은 어머니 심옥순은 홧병으로 1950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해 동짓달에 사망했다. 박헌동 아들 박석배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고난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부강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는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청원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나마 청원중학교가 없어지면서 주성중학교 야간부에 편입되어 졸업하고, 청주공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집안 기둥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정식학교라고는 초등학교 문턱만 넘은 것이다. 청주공고 야간을 나와 행정직 공무원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그는 어느덧 일흔다섯의 노인이 되었다.

얼마 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도연맹 사건'편을 보고,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박석배씨. 한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사건,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 박석배의 마음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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