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54146

무명의 조용필을 '국민가수'로 만든 일대 사건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어떻게 대히트곡이 되었나
김종성(qqqkim2000) 17.08.29 20:52 최종업데이트 17.08.29 20:52 

노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열풍을 타고 유행했다. '오 필승 코리아'는 2002년 월드컵 광풍을 타고 대중의 뇌리에 각인됐다. 인상적인 사건이나 중대한 변화는 이처럼 대중 사이에 유행가도 탄생시킨다.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처럼 한일관계로 골머리를 앓은 총리가 있었다.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년) 총리다. 그런데 그가 한일관계에 전환점을 제공했고, 이것이 한국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줬다. 무명 가수 조용필이 이로 인해 일약 대스타가 됐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으로 시작하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대히트를 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조용필.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미국과 구 소련의 냉전 구도가 흐물흐물해지던 1970년대 전반, 다나카 총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1972년 9월 9일 중국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하지만 한국과의 관계는 불안했다.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일본의 접근은 반공 이념에 갇혀 있던 박정희 정권을 불안케 했다. 그래서 다나카 총리는 아베 신조만큼이나 한일관계에 바짝 신경을 써야 했다.

이런 상태에서 한일관계에 악재가 많았다. 1973년 8월 8일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김대중 납치사건이 도쿄에서 발생했다. 총을 들고 이웃집에 뛰어 들어가 자기 가족을 끌어내는 행위는 이웃집 주인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일이다. 이후락이 벌인 일도 그랬다. 일본 정부를 분노케 하는 행위였다.  

1974년 8월 15일에는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부인 육영수가 광복절 식장 단상에서 쓰러졌다. 이때 문세광을 수사한 검사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수감돼 있는 김기춘이다. 

문세광은 일본 여권으로 입국했다. 또 일본 경찰한테서 훔친 총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인 공범의 조력을 받았다는 의혹도 있었다. 안 그래도 일본에 감정이 안 좋은 박 정권으로서는 일본을 더욱 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박 정권은 사건 배후로 북한도 의심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었다. 

다나카 내각이 보여준 태도는 박 정권을 한층 더 분노케 했다. 다나카 내각은 '북한이 배후라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공범에 대한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 거기다가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개해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리려고 단독으로 일을 벌였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문세광을 '박정희 독재에 저항한 인물'로 부각시켜준 것이다.

한일관계는 매우 험악했다. 험악한 발언들도 터져 나왔다. 2005년 1월 20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 관련 문서에 따르면, 1974년 8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은 우시로쿠 도라오 일본대사를 불러 "이번과 같은 사건이 겹치면 신념만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국교 중단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위키백과

다나카 내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나카 내각은 남한 정권이 내세우는 '하나의 한국' 원칙을 부정했다. 1974년 9월 6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 해 9월 5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마쓰나가 노부오 외무성 조약국장이 "한국과 한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무라 도시오 외무상도 "나도 그 사람과 같은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화약고가 된 한일관계에 불이 붙으려는 순간이었다. 아베 신조로 인해 벌어진 지금의 한일관계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자칫하면 심지에 불이 붙을 수 있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화약은 폭발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행정부와 한·일 양국의 미국 대사들이 개입해 양쪽 입장을 절충시켰다. 미국이 인상을 쓰고 강제로 화해시킴으로써 위기는 극적으로 봉합됐다. 

미국의 뜻에 따라 다나카 총리는 9월 19일 시나 에쓰사부로 자민당 부총재를 특사로 임명하고 박정희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박정희가 원하는 수준에는 못 미쳤지만, 일본 총리 특사가 직접 찾아와 사과까지 했으니 박정희의 체면은 어느 정도 세워진 셈이었다. 다나카가 져줌으로써 생긴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한일관계는 다시 좋아졌다.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소속의 재일동포들이 모국 방문에 나선 것도 그 덕분이었다. 대부분 남한이 고향이지만 친북 성향을 띠고 있어 대한민국과 사이가 안 좋았던 이들은, 다나카 총리의 사과를 계기로 한일관계가 좋아진 덕분에 1975년 9월 모국 방문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부산항과 김포공항을 통해 들어온 720명 정도의 재일동포들이 가족과 상봉하는 모습은 국내외적으로 강렬한 감동을 일으켰다. 여기에 자극 받은 재일동포들의 모국 방문이 폭주하면서 6개월 새에 7000명 이상이 부산항과 김포공항에 들어왔다. 이런 분위기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회장으로 하는 재일동포모국방문추진위원회의 설립으로도 이어졌다. 

이런 한·일 간의 훈풍 속에서 부산항에 몰려드는 재일동포들의 모습은 무명가수 조용필의 노래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조용필이 1976년 취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따라 부르게 만들 만했던 것이다.

노래의 원곡은 1971년 김해일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이다. 1972년 스물세 살의 조용필은 통기타 반주로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하지만 반응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76년 부산항을 소재로 가사를 바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부르자,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응이 나온 정도가 아니라 대히트였다. 


▲1970년대 부산항.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조용필의 고향은 부산과 멀다. 경기도 화성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자체도 한일관계나 재일동포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라는 가사만 놓고 보면, 이것은 부산항에서 이별한 형제를 그리워하는 노래다. 하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나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같은 대목이 대중의 뇌리에서 재일동포 입국 행렬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인기에 관해 1977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말한다. 아래 인용문 중에서 "인기가 누그러질 줄 모르는 채"라는 대목에서 당시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인기가 누그러질 줄 모르는 채 일반 가요팬들은 물론 대학가 주점 등에서도 계속 불리고 있는가 하면, 조용필 외에도 14명의 가수들이 이 곡을 취입, 가요계에서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넘어서는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동백 아가씨'가 판매 실적 40만 장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돌아와요~'는 50만 장에 육박하고 있다는 얘기."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는 기사다. 조용필의 탁월한 가창력에 더해, 한일관계 훈풍과 재일동포 방문 열풍이 한데 어우러져 대중음악 역사가 새로 쓰였던 것이다.

미국의 압력이 작용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박정희에게 사과하고 한일관계를 바꾼 게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이 음악평론가 신성원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동안 소원했던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수십 년 동안 고국을 등졌던 재일교포들의 고향 방문이 허용되었다. 조용필은 이런 분위기를 담은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했는데, 이 노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트로트는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한일관계를 놓고 아베 신조 이상의 고민을 했다. 결국 다나카는 한국에 고개를 숙이기로 결심했다. 이런 전향적 자세가 양국관계를 개선시켰고, 이것이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히트라는 뜻밖의 결과로 연결됐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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