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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③ ] 쉴새 없는 업무 연속
홍준철 기자 승인 2015.07.20 10:52 호수 110720면
- 두 번째 일기,나라의 제삿날 좌기하지 않았다
- 공무나 사무 보지 않고 쉬는 휴일 해석은 잘못
<제승당 충무사>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명절 연휴가 있었을까. 1월 1일은 설날이다. 그런데 1월 2일의 일기를 보면, 오늘날과 달리 설날 연휴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1592년 1월 2일. 맑았다. 나라의 제삿날(國忌日)이라 좌기하지 않았다(不坐). 김인보와 이야기했다.
옛사람의 금기
이순신은 2일에는 “나라의 제삿날이라 좌기하지 않았다(不坐)”고 했다. 나라의 제삿날은 왕이나 왕비 또는 대비가 사망한 날을 뜻한다. 1월 2일의 제삿날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기일이다. 《난중일기》에는 나라의 제삿날에는 이순신이 좌기(坐起)하지 않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전투를 위해 출동했을 때는 예외이다. 관료들은 나라의 제삿날에는 자신의 근무처에 출근하지 않았다.
또 이날에는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시거나 풍악을 울려 놀거나, 기생을 가까이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왕이나 왕비 등이 사망했을 때는 사망한 날 이후부터 짧게는 3개월, 길게는 5개월 동안 금지사항이 계속되었다. 오늘날처럼 3일장, 혹은 5일장처럼 장례기간이 짧지 않았기에 관료나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이 시기에 금기사항 위반이 알려지게 되면 관료들은 탄핵당했다.
나라 제삿날을 지키는 모습은 다른 인물들의 기록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남명 조식의 1558년 4월 15일 기록에도 지리산을 유람중임에도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제삿날이락 풍악을 울리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미암 유희춘의 1571년 9월 2일과 9월 8일 일기에도 나라의 제삿날이 흰옷을 입고 목욕재계하면서 기생을 멀리했다고 한다. 9월 8일은 세조의 제삿날로 《난중일기》에 나오기도 한다. 중종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의 죄목의 하나도 “나라의 제삿날에 보통 때처럼 풍악을 울리고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다.
좌기란 무슨 말일까
그러면 1월 2일의 “나라의 제삿날이라 좌기하지 않았다(不坐)”는 것은 무슨 뜻일까. 현재의 대부분의 번역서에서는 “공무를 보지 않았다” 혹은 “사무를 보지 않았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시대의 관료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이날 일기에 나오는 좌기(坐起)와 관련하여 조선 중기의 관료 이유간의 《우곡일기》를 분석한 이선희 박사는 “수령의 좌기는 주재자인 수령을 위시해 관청 내 관할 관원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이를 통해 수령이 의결과 집행을 행하는 것을 이른다”라고 좌기를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관료가 자신의 근무처, 예를 들면 고을 사또의 경우 동헌에서 관련 하급 관리들을 모아놓고 함께 회의를 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TV 역사드라마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즉 수령이나 높은 사람이 중앙에 앉아 있고, 나머지 하급 관리들이 단 아래에서 줄지어 서서 상급 관리의 이야기를 듣거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순신이 좌기하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였던 ‘나라의 제삿날’처럼 관료들은 그 이외에도 가족의 제삿날, 질병, 휴가를 이유로 좌기하지 않았다. 또 예외적으로 이선희 박사에 따르면, 외부에서 업무를 보아야 할 때 비가 내려 외부 활동을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좌기를 해서 업무를 보는 실제 모습은 유희춘의 《미암일기》 1571년 3월 21일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 1571년 3월 21일. 군수 정암 등의 절을 뜰에서 받고 문안 예식을 행한 뒤에 동헌방으로 들어가 옷을 바꿔 입고 나와 북쪽 벽의 의자에 앉아 수령과 찰방, 심약, 검율에게 공식인사를 하는 절을 두 번 받았다. 그 후에 호장, 기관, 의율생, 일수, 서원 등이 차례로 뜰에서 예를 올렸고, 교생은 계단 아래에서 예를 올렸다. 다시 들어와 사적인 의례를 하는 읍(揖)을 행했다. 나는 호장 이하의 사적인 의례는 면제시켰다. 다과를 들고 난 뒤에 태평소를 불게 하고 창 앞으로 나가 앉았더니 각급 수령과 각 포의 향리들이 알현을 요청하는 직명을 적은 문서와 인사장을 들고 와서 바쳤는데, 그 수가 71명이었다. 이때 받은 소송문서와 보고서가 2~3백장이나 되었으나, 해가 저물기 전에 모두 판결했다.
이 일기를 보면, 상급자가 근무처에서 하급자들로부터 공적인 인사와 사적인 인사를 받은 뒤, 하급자들이 줄지어 서서 올린 문서들을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난중일기》에 나오는 ‘좌기’의 진짜 의미이다. 좌기는 정해진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업무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나라의 제삿날이기에 좌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순신이 자신의 공식 근무처인 동헌에 나가지 않고, 하급 관리들을 불러 모아 일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지, 일부 번역문들처럼 공무 혹은 사무를 보지 않고 쉬는 휴일이 아니다. 나라 제삿날에도 관료들은 근무처에만 나가지 않았을 뿐 업무를 계속 했다. 유희춘의 1571년 3월 24일 일기에도 “나라의 제삿날이기에 방에 앉아서 사무를 처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순신의 1월 2일 일기 속의 김인보와 이야기했다고 하는 것도 그의 업무와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1592년 1월 23일. 둘째 형님(이요신)의 제삿날이라 좌기하지 않았다. 사복시에서 받아와 키운 말을 올려 보냈다.
1월 23일의 일기는 이순신의 가족 제삿날에 좌기를 하지 않았지만, 업무를 하는 실제 사례이다.
*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근무처였던 동헌은 관아에서 관찰사, 병마사, 수사, 수령 등이 사무를 보던 공간이다. 전남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 뒤쪽에 있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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