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097
고구려 초기 왕계에 대한 여러 주장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08.20 10:55:00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다보면 웬지 뜬 구름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사료의 빈약과 사료 내용의 정합성 비판 등을 하다 보면 어느 사실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상을 통한 추리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였는 가에 따라 논문의 우수성이 평가되기도 한다. 이번에 다뤄 볼 내용은 고구려 성립 시기 왕계의 전승에 대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세습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는 수험생도 있을 수 있겠다.
고구려 초기의 왕실 세계에 관해서도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 중 어느 것을 더욱 중시하였는가에 따라 견해가 판이하다. 이 문제의 핵심은 삼국지 고구려전에 기록된 내용인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내용과 1세기 말~2세기 초에 태조왕 이후에 왕계가 변화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태조왕대 왕계 변화설에 대한 재비판이 존재한다. 첫번째의 주장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뤄진 내용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최근의 연구 성과이다.
2. 왕계의 교체 시점에 대한 여러 견해
① 이병도 교수 - 삼국사기 기록에 의존
송양과 소노부를 동일한 존재로 파악하여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가 동명성왕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후 제6대 태조왕(53~146)대에 왕계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태조왕부터 시작되는 왕계와 그 이전의 왕계가 서로 다르다고 본다.
② 조인성 교수 - 시조 인식의 변화
태조왕 이전의 왕실 세계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태조왕의 즉위는 부자연스런 즉위였기 때문에 태조왕 이전 왕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하였다가 왕권이 안정된 장수왕대에 이르러 그 이전의 왕들도 왕실 계보에 포함시킨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왕실 교체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왕실이, 시조 주몽으로부터 자신들까지의 계보를 정리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과시하고자 하였다고 했다.
이 결과 교체의 계기가 되었던 태조왕보다 앞선 태조왕의 아버지인 민중왕의 형, 제3대 국왕 대무신왕(18~44)을 혈연적으로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장수왕대 왕실 세계 인식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비문의 첫 부문인,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주목하고 있다.
이 견해는 시조로부터 당대에 이르는 왕실 계보의 정리는 시조인 주몽의 직접적인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성성을 확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③ 태조왕대 왕계 변화설 비판
위의 주장과는 다르게 태조왕대 왕실 교체설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이 주장은 광개토왕비에 전하는 왕계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왕계를 비교하여 형제상속을 부자상속으로 바꾸거나 끊겨버린 왕실의 후예들을 새롭게 삽입하는 형태로 왕계 복원을 시도하였다.
‘태조’는 고려나 조선과는 달리 창업주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으며, 그 시호는 후대에 소급, 추존되었거나 존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한편, 노태돈 교수는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을 동모형제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인정할 수 없으며 태조왕과 차대왕은 형제로, 일종의 정변을 통해 집권한 신대왕은 그들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모본왕과 태조왕은 계보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두 왕을 연결시킨 것은 현전하는 형태의 초기 왕계가 정립되었을 당시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주몽왕에서 모본왕까지의 기사는 그 내용과 구성이 4세기 후반 고구려 자체 전승에 의해 소수림왕대에 정리된 것으로 보았다.
박경철 교수는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문에서 왕계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이러한 중요한 자료의 정합성을 태조왕의 존재로 말미암아 역사성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태조왕은 고구려 초기의 국가를 다시 한번 중흥시킨 왕이며 그 이후의 왕들은 모두 태조왕과 혈연적인 관계를 갖으며, 동천왕대 이래 제2의 국조왕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초기 왕계에 대한 여러 주장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08.20 10:55:00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다보면 웬지 뜬 구름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사료의 빈약과 사료 내용의 정합성 비판 등을 하다 보면 어느 사실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상을 통한 추리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였는 가에 따라 논문의 우수성이 평가되기도 한다. 이번에 다뤄 볼 내용은 고구려 성립 시기 왕계의 전승에 대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세습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는 수험생도 있을 수 있겠다.
고구려 초기의 왕실 세계에 관해서도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 중 어느 것을 더욱 중시하였는가에 따라 견해가 판이하다. 이 문제의 핵심은 삼국지 고구려전에 기록된 내용인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내용과 1세기 말~2세기 초에 태조왕 이후에 왕계가 변화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태조왕대 왕계 변화설에 대한 재비판이 존재한다. 첫번째의 주장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뤄진 내용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최근의 연구 성과이다.
2. 왕계의 교체 시점에 대한 여러 견해
① 이병도 교수 - 삼국사기 기록에 의존
송양과 소노부를 동일한 존재로 파악하여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가 동명성왕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후 제6대 태조왕(53~146)대에 왕계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태조왕부터 시작되는 왕계와 그 이전의 왕계가 서로 다르다고 본다.
② 조인성 교수 - 시조 인식의 변화
태조왕 이전의 왕실 세계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태조왕의 즉위는 부자연스런 즉위였기 때문에 태조왕 이전 왕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하였다가 왕권이 안정된 장수왕대에 이르러 그 이전의 왕들도 왕실 계보에 포함시킨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왕실 교체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왕실이, 시조 주몽으로부터 자신들까지의 계보를 정리함으로써 왕실의 정통성을 과시하고자 하였다고 했다.
이 결과 교체의 계기가 되었던 태조왕보다 앞선 태조왕의 아버지인 민중왕의 형, 제3대 국왕 대무신왕(18~44)을 혈연적으로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장수왕대 왕실 세계 인식에 대해서는 광개토왕비문의 첫 부문인,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주목하고 있다.
이 견해는 시조로부터 당대에 이르는 왕실 계보의 정리는 시조인 주몽의 직접적인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성성을 확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③ 태조왕대 왕계 변화설 비판
위의 주장과는 다르게 태조왕대 왕실 교체설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이 주장은 광개토왕비에 전하는 왕계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왕계를 비교하여 형제상속을 부자상속으로 바꾸거나 끊겨버린 왕실의 후예들을 새롭게 삽입하는 형태로 왕계 복원을 시도하였다.
‘태조’는 고려나 조선과는 달리 창업주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으며, 그 시호는 후대에 소급, 추존되었거나 존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한편, 노태돈 교수는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을 동모형제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인정할 수 없으며 태조왕과 차대왕은 형제로, 일종의 정변을 통해 집권한 신대왕은 그들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모본왕과 태조왕은 계보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두 왕을 연결시킨 것은 현전하는 형태의 초기 왕계가 정립되었을 당시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주몽왕에서 모본왕까지의 기사는 그 내용과 구성이 4세기 후반 고구려 자체 전승에 의해 소수림왕대에 정리된 것으로 보았다.
박경철 교수는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문에서 왕계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이러한 중요한 자료의 정합성을 태조왕의 존재로 말미암아 역사성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태조왕은 고구려 초기의 국가를 다시 한번 중흥시킨 왕이며 그 이후의 왕들은 모두 태조왕과 혈연적인 관계를 갖으며, 동천왕대 이래 제2의 국조왕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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