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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집안에 있는 장수왕릉.
고구려의 전성기를 일군 장수왕
중국 속 우리 역사 기행 12
승인 2014.10.07 17:07:39 글/사진=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광개토대왕릉에서 내려와 상점에 들러 책을 두 권 샀다. ‘중국 집안 고구려고분벽화’, ‘구도풍운록’. 중국이 고구려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버스는 이제 장수왕릉(長壽王陵)으로 간다. 광개토대왕릉에서 1.3킬로미터 동북쪽에 있다. 장수왕릉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능의 돌무지가 밝게 빛난다. 능으로 가는 초입에는 ‘将军坟’(장군분)이라고 새긴 돌을 세워놓았다.
▲ 중국 집안에 있는 장수왕릉.
장수왕릉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집안에 있는 석릉 가운데 형태를 온전히 보존한 것은 이 왕릉 뿐이다. 광개토대왕릉이 꾸미지 않고 수수한 편이라면 장수왕릉은 돌을 세련되게 가공하여 당시의 높은 문화수준을 드러낸다. 능 앞에 잔디를 잘 가꾸어 놓았다. 잠시 묵념을 하고 기념촬영을 한다.
장수왕릉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청나라 말기이다. 한 농민이 황실의 봉금령(封金領)을 위반하여 집안 지역에 들어왔다, 이 능을 발견했다. 당시 이 능을 변방을 지키는 장군의 묘라고 여겨 ‘장군총’으로 와전되었다. 하지만 능이 도굴되어 피장자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래서 이 능의 주인공을 광개토대왕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1905년 일본인 도리이가 처음 현지 조사를 했고, 프랑스 학자 E. 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서’ 등에 발표한 뒤 학계에 알려졌다.
학교에서는 ‘장군총(將軍塚)으로 배웠고, 나중에 ‘장수왕릉’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는데, 중국에서는 ‘장군분(將軍墳)’으로 이름지었다. 고구려는 중화국의 지방정권이니 왕릉을 왕릉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인지. 이 능이 장수왕릉이라면 지하에 계신 장수왕은 얼마나 통탄할까.
▲ 동쪽에서 바라본 장수왕릉.
장수왕릉은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으로 쌓았다. 기단의 한 변 길이는 33미터, 높이는 약 13미터. 묘의 높이는 12.40미터. 중국에서는 장수왕릉을 매우 상찬한다. 즉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가장 보존이 잘된 왕릉으로 외관이 화려하여 ‘동방금자탑(東方金字塔)’으로 소개한다. 고구려 적석총 왕릉의 최고봉이요, 절세(絶世)의 능. 중국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후로 석조릉은 고구려 왕릉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최고의 경지에서 석조릉이 홀연 모습을 감춘다.
고구려 20대 장수왕(長壽王, 394~491, 재위 412~491)은 이름이 거련(巨連)이다. 연(璉)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몸과 얼굴이 크고 잘 생겼으며 뜻과 기운이 호걸을 초월하였다.”고 한다. 생김새부터 영웅호걸이었다. 장수왕은 부왕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대외 정벌을 활발하게 추진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남하정책을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기 한반도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에 의거 그 체제를 안정시키려는 의지가 강했다. 장수왕은 475년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였다. 481년에는 신라 호명성(狐鳴城) 등 7성을 함락시켜 지금의 경상북도 흥해까지 진군하였다. 남으로 진군을 거듭하였지만, 장수왕은 중원 왕조에는 계속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중원왕조와는 충돌을 피하여 북방을 안정시킨 뒤 남방을 평정하는 전략을 폈다.
▲ 중국 집안 장수왕릉 동북쪽에 있는 1호 배총(陪塚).
413년 장수왕 원년에 진(晉)에 조공을 보내고 420년 장수왕 8년, 10년에 송(宋),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는 등 제위 22년에 44회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가 이렇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자 중원 왕조는 장수왕에게 관직을 봉했다. 진(晉) 안제(安帝)는 장수왕에게 고구려왕낙랑공(高句麗王樂浪公)에 봉했다. 이는 중화왕조가 대외 정책으로 하나로 관직을 수여한 것이지, 직접 지배하거나 복속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서는 이렇게 관직을 받은 것을 들어 중화왕조의 관할하에 있는 지방정권의 지위를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장수왕은 중화왕조에 고분고분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정벌을 하기도 했다.
491년 장수왕이 세상을 떠났다. 재위 79년 나이 98세였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 나이가 98세라 이름을 장수왕이라 하였다. 위(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이를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거기대장군 태부요동군 개국공고구려왕을 책립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 하였다."
중국 자료에는 시호 ‘강(康)’을 ‘사직안강(社稷安康)’이라고 설명한다. 사직, 즉 왕조를 평안하게 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을 들어 장수왕이 시종 중원왕조에 신복(臣服)하여 중원왕조의 지방정권임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견강부회가 심하다. 이후로 고구려왕이 새로 즉위하거나 흉거하면 매번 중국으로부터 책봉(冊封)과 시호(詩號)를 받았다고 하고 하는데 근거가 없다. ‘삼국사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은 기록이 이것이 유일하다.
장수왕릉 앞에 있으니 우리나라 중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몰려온다. 울산에서 온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자매학교를 방문하고 관광을 하는 중이라 한다. 이 학생들에게 불현듯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김산태 서울국학운동시민연합대표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 모양이다.
“이 학생들에게 역사 교육하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어서 학생들이 장수왕릉을 관람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중학교 때 장수왕릉을 보고 간 학생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리라. 석양 빛이 장수왕릉의 긴 그림자를 남겼다. 한 바퀴 돌아 동쪽에서 햇빛 속에서 바라보는 장수왕릉은 눈이 부셨다. 왕릉 동북쪽에는 배총(陪塚) 1기만 외롭게 남아 있다. 원래는 5개 있었다고 한다. 배총은 '딸림 무덤'이라 하여 왕릉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까지 왕과 함께하려는 마음이 느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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