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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⑥] 장군이 장가간 고향 아산
홍준철 기자승인 2015.08.10 10:47 호수 111019면

- ‘시집을 가는 시대’ 아닌 장가를 간 이순신 시대
- 지방관료 새해 임금께 인사하는 의례의 나라


<소년시절-전쟁놀이, 현충도 십경도中> 

▲ 1592년 1월 7일. 아침에는 맑았다. 늦게부터 비와 눈이 번갈아 내내 내렸다.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갔다. 전문(箋文)을 받들고 갈 남원의 유생(儒生)이 들어왔다.

▲ 1592년 1월 9일. 맑았다. 맑았다. 일찍 식사를 한 뒤, 동헌에 나가 전문을 봉해 올려 보냈다.

1월 7일과 9일의 일기는 조선시대 지방 관료들의 임금에 대한 새해 인사 풍속의 하나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전문(箋文)’ 때문이다. 또한 1월 7일 일기에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갔다’는 내용은 조카 봉이 새해를 맞아 아산의 본가로 갔다는 것을 뜻한다.

아산은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이순신의 고향이다. 물론 태어난 곳을 기준으로 하면 이순신의 고향은 서울 건천동(현재의 충무로)이다. 그러나 그가 청소년기부터 성장하고 그의 부모형제와 가족들이 오랫동안 살았고, 죽은 뒤에도 그의 묘소가 아산에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실제 의미 있는 고향은 아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아산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1597년 4월 5일, 이순신이 백의종군 할 때의 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오늘날의 현충사 인근에서 다양한 곳을 방문 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선조들의 무덤, 외가의 사당, 맏형 이희신의 장남인 조카 뇌의 집 사당, 작은 형 이요신의 사당, 동생 여필(이우신) 부인 사당도 찾아가 절을 했다. 또 일기에서 ‘본가(本家)’로 표현한 자신의 집으로 가서 장인과 장모의 위패에 절했다.

이 1597년 4월 5일 일기는 아산과 이순신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즉 현재의 현충사 인근에 이순신의 외가는 물론 큰 형과 작은 형, 동생의 집이 모두 있었고, 집안의 선산도 있었다. 이순신 자신의 집도 있었다.

'처가살이'한 이순신

아산 현충사 인근 지역은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그의 친인척이 모두 살고 있던 이순신의 홈그라운드, 동족촌이다. 눈에 띄는 사실은 이순신이 자신의 집을 ‘본가(本家)’로 표현했는데, 이 ‘본가’가 오늘날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본가라고 할 때는 주로 남자의 경우는 남자 집안을 중심으로, 여자의 경우는 여자 집안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일기에서는 분명히 본가라고 했지만, 오늘날과 달리 이순신 자신의 부모가 계신 집이 아니다. 이순신이 본가에서 한 행동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그는 본가에 도착해서 장인·장모의 위패에 절을 했다. 이순신은 장인·장모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이 점이 뜻하는 것은 이순신이 처가살이를 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처가살이는 최근까지도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처가살이’가 아니다. 이순신 시대는 오늘날과 달리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를 가는’ 시대였기에 관습적 처가살이였다. 실제로 현재 현충사에 남아 있는 이순신의 옛집도 이순신의 부인 상주 방씨의 본가, 즉 장인 방진의 집이다.

이 시기의 저명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런 이유로 거의 대부분 출생지가 아버지가 어머니의 고향이다. 조식(1501~1572)은 경남 합천 삼가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이이(1536~1584)는 신사임당의 집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의 멘토였던 류성룡(1542~1607)도 외갓집인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시집가는 문화’는 임진왜란과 청나라에 의한 호란이 발생한 이후 유교질서가 급격하게 강화되면서 생겨나 오늘날까지 이어졌지만, 우리 역사 5천년 중 불과 400년도 되지 않은 새로운 제도이다.

의례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조선

다시 1592년 1월 7일과 9일로 돌아가서, 당시 지방관료가 새해를 맞아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는 풍속이었던 ‘전문(箋文)’을 살펴보자. 전문(箋文)은 관리들이 설날과 동지 같은 명절, 임금의 탄신일 등에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거나 혹은 나라에 길한 일, 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임금에게 바치는 글이다. 관리들은 전문과 함께 목면이나 흰 명주, 관할 지역의 특산물을 함께 바쳤다.

1592년 1월 9일 일기에서 이순신은 간략하게 “동헌에 나가 전문을 봉해 올려보냈다”고 했지만, 이것도 단순히 글과 특산물을 봉인해 보낸 것이 아니다. 의례 절차가 있다. 《난중일기》에는 그 의례절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의례절차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 1569년 11월 27일과 1571년 1월 10일, 1576년 5월 9일, 1573년 11월 10일 일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절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관이 전문을 올려 보낼 때는 관료의 공식 의복인 관대를 갖춰 입은 뒤, 동헌 뜰에서 전문을 받들고 올라갈 사람을 동쪽에 서게 하고, 그 전문에 대해 4번 절을 했다.

또 진상품이었던 특산물은 상자에 넣고 초석(草席, 돗자리)으로 감싼 뒤 자신의 성명을 써넣고 봉인했다. 진상품은 표범과 호랑이 가죽, 노루가죽을 비롯해 갑옷, 투구, 활과 화살, 창과 검, 말안장, 옻칠 상자, 가위, 빗, 벼루, 솥, 동백기름 등등 군사관련 물품부터 일상생활 용품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이순신도 유희춘이 했던 그 절차에 따라 뜰에서 남원 유생에게 4번 절하고, 진상품을 봉인해 올려보냈을 것이다. 이로 보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그냥 헛말이 아니라, 모든 일에 다양한 의례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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