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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⑤] 과로에 쌓인 나날들
홍준철 기자승인 2015.08.03 10:23 호수 110920면

- 전라좌수사 이순신 업무 처리 기록 눈길
- 이순신 업무 공간은 동헌, 뒷동헌, 객사


<이순신 장군의 묘> 

▲ 1592년 1월 4일. 맑았다. 동헌에 좌기(坐)해 공무를 처리했다.
▲ 1592년 1월 5일. 맑았다. 그대로 뒷동헌(後東軒)에서 공무를 처리했다.
▲ 1592년 1월 6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 1592년 1월 8일. 맑았다. 객사(客舍) 동헌에서 공무를 처리했다.

1월 4일부터 6일, 8일 일기는 아주 간단하다. 1월 3일의 일기처럼 동헌 혹은 뒷동헌, 객사에서 공식적인 좌기(坐起)를 하고 전라좌수사로서 각종 업무를 처리한 기록들이다. 1월 5일의 경우, 눈에 띄는 것은 공식적인 행정업무 공간인 동헌에 나간 것이 아니라, ‘뒷동헌(後東軒, 후동헌)’에서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이다. 이 뒷동헌은 공식적 사무를 보는 공간인 동헌과 달리 관리가 사적으로 거처하는 곳을 일컫는다.

다른 명칭으로는 ‘내동헌(內東軒)’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순신은 자신의 거처에서 공식 업무를 처리했다.

1월 8일의 업무 장소는 객사(客舍)이다. 이 객사는 지방에서 임금의 초상 대신,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목패(木牌)를 만들어 안치해 놓은 건물이다. 정례적인 임금에 대한 인사를 올리는 망궐례를 하는 장소, 혹은 사신의 숙소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보고서에 파묻힌 임금 선조

이 4일 동안의《난중일기》는 그저 간략하게 공무를 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과 달리 실제로는 엄청나게 바빴다. 이순신보다 한 세대 윗사람이었던 고위 관료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 1568년 4월 13일 기록에는 당시 임금과 관료들의 과로가 언급되고 있다.

“내가 말하길, ‘경상 감사가 보고서를 보내 말하기를 공무(公事)가 지나치게 많아 병이 없던 사람도 병에 걸린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공무는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임금께서 6조(六曹,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와 각종 시(寺, 관청의 하나)의 계목(啓目, 보고서의 일종), 8도(八道)의 감사와 병사(兵使), 수사(水師)의 계본(啓本, 보고서 일종),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차(箚, 보고서의 일종)와 계(啓, 보고서의 일종), 홍문관의 차자(箚子, 보고서의 일종), 양반과 백성들의 상언(上言, 상소·진정서 등), 각 지방의 백성들의 상소(上疏)와 사헌부의 범죄조사보고서(推考) 등을 읽으시는 것이 하루에도 수십 권(卷) 혹은 1백 권에 달합니다. 이로 인해 기력과 정신의 소모가 아주 심합니다. 때문에 그런 일들을 줄이고 제외시켜 임금의 건강을 돌봐드려야 하는데,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은 승지(承旨, 임금의 비서 역할)가 먼저 공무를 살펴보고 그 요점을 요약해 각종 보고서의 끝에 붙여 임금이 한 번에 일목요연하게 보실 수 있게 해 드려 정신이 피로하지 않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일기속의 임금은 1567년에 왕위에 오른 선조가 그 주인공이다. 선조는 당시 17세에 불과했다. 이 일기를 통해 당시 선조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경륜이 넘치는 신하가 임금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서에 시달리는 관료들

관료들의 바쁜 일상도 《미암일기》에 나온다. 앞의 4월 13일의 일기에서도 경상감사가 업무과잉으로 없던 병에 걸릴 지경이라는 말도 있듯이, 유희춘 자신도 각종 문서 처리에 바빴다. 

《미암일기》, 1568년 7월 18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지평과 장령이 벌써 출근을 했다는 말을 듣고 출근했다. … 소지(所志, 각종 소송 혹은 청원 문서 등) 수 십 통을 받았고, 처리했다. 그중에 이무강의 처에게 거친 사내종이 행패를 부린 것은 개성부에 관문(關文, 공문서의 일종)을 보냈고, 광주 족친위의 처가 올려보낸 남편의 조카가 제 작은 아버지의 병을 틈타 속여서 문권(文券)을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그 자를 잡아다가 가두고 추궁하라고 했다. … 풍속과 관계된 일 혹은 다른 사람을 침해하고 손상시킨 사건은 모두 처리했고, 다만 한두 사람의 사건만 처리하지 못했다.”

이 일기는 유희춘이 부하 관료들이 출근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출근해 종일 각종 문서를 보고, 판결하는 모습이다. 특히 지방관, 고을 수령들의 경우는 7가지 주요 업무가 있다. 흔히 이를 ‘칠사(七事)’라고 한다. 관리가 고을 수령으로 부임할 때 임금 앞에서 외워서 말해야 하는 수령의 핵심 업무 7가지를 말한다. 그 각각은 백성들이 농사와 누에치기 잘하게 하는 것,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활성화하는 것, 군사 문제를 잘 관리하는 것, 부역을 공평히 부과하는 것, 재판 건수 감소 노력,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적게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이 공무를 처리했다는 것은 모두 이 수령 칠사와 관련된 것이고, 이순신은 특히 국방책임자였기에 군사업무가 핵심 업무였다. 1월 3일 일기 속의 이순신이 동헌에서 “별방군(別防軍)을 점검하고 검열했다”는 기록이 바로 군사 지휘관 이순신의 업무 모습이다. 이 별방군은 군부대의 한 부류로 별조방군(別助防軍)이라고도 한다.

수령 칠사와 군사업무와 관련된 각종 상급 및 하급 관서의 업무와 관련된 행정문서, 민원인 혹은 소송사건의 소송 문서를 처리하는 일도 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난중일기》에도 상급 혹은 하급 기관과 관련된 행정문서 처리, 각종 소송 관련된 문서를 처리하는 일기 기록도 나온다. 1월 3일의 일기 속의 “각 고을(官)과 포(浦)에 제송공문을 써 보냈다”의 경우는, 이순신이 관할 하급 행정기관에 업무 관련 문서를 처리하는 장면이다.

제송공문은 본래, 하급기관(하급자)이 상급기관(상급자)에게 어떤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제출된 보고서에 상급자 자신의 의견과 지시사항을 기록해 하급자에게 되돌려 보내는 결재 형식의 서류다. 이런 행정시스템은 오늘날의 공조직이나 민간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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