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7Zp1Us

당태종, 죽음 앞두고 “고구려 공격 중지” 유언
(85) 당태종의 운명
2013. 11. 27   16:11 입력 | 2013. 11. 27   16:17 수정

갑작스러운 당태종 사망으로 국제정세 격동…서돌궐 재결집
나당동맹 맺은 신라는 위기 봉착·고구려는 숨돌릴 여유 확보


당태종 이세민의 입상. 중국 섬서성 리츄엔시엔 북동쪽 22㎞ 지점에 있는 당태종 이세민의 무덤 소릉 입구 모습이다. 필자제공
 
649년 김춘추가 신라에 도착한 직후 당나라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당태종이 5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당동맹 실현은 위기에 봉착했다. 태종은 임종의 침상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중지하라는 유조를 남겼다. 유약한 자신의 아들이 고구려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조서를 남겨 요동전쟁을 그만두게 하였다.”

김춘추는 낙담했다.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의 문제가 우려됐다. 태종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의 카리스마에 숨죽여 왔던 변방 여러 나라 지도자들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당이 서북방 문제에 매달리게 되면 고구려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재차 지속적으로 압박해올 것이다. 그러면 신라는 고사할 수도 있다. 

단약 복용의 부작용

‘자치통감’을 보면 649년 5월 중순께부터 당태종이 이질(痢疾)이 악화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설사병은 배가 아프고 대변을 자주 보되 양이 적고, 속이 땅기며 뒤가 무겁고, 끈적끈적하거나 심지어 피고름 같은 대변을 보는 것이 특징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당태종의 경우 중금속 중독으로 인한 장 기능 장애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직후부터 자주 병으로 누웠다. 건강악화는 그를 장생(長生)의 비법(秘法)에 빠지게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648년 5월) 왕현책이 천축(인도 갠지스 강 중류)을 격파하면서 방사(方士) 나라이파사메를 얻어서 돌아왔는데 스스로 장생하는 술법이 있다고 말하자, 태종이 이를 믿고서 예로 대하고 공경하면서 장생약을 합성케 했다. 사자를 보내 사방으로 기이한 약과 이상한 돌을 찾게 했으며, 또한 파라문(인도)의 여러 나라에 보내 약을 채취하게 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그였지만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도사의 말에 혹했다. 사신을 중국의 전국과 인도에까지 보내 약을 구했다. 그렇게 제조된 많은 양의 단약(丹藥)을 복용하게 됐다. 춘약(春藥) 성분이 포함돼 있어 반짝 효과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납과 수은 유황성분이 많은 그 약은 상태가 좋지 않은 그의 장기와 혈관질환을 더욱 악화시켰다. 살아서 고구려를 직접 굴복시키겠다는 그의 일념이 죽음을 앞당겼다.

당태종이 없는 세상 

649년 5월 24일 태종은 유약한 어린 아들을 걱정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는 동돌궐을 격파하고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를 지배했으며, 토욕혼을 정복했으며, 서돌궐을 복속시켰다. 주변의 국가들은 경악하며 그의 미증유의 성취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가 사라지자 주변 국가와 민족들은 안도했다. 서돌궐의 유력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는 기회가 왔음을 알았고, 티벳고원의 강국 토번의 국왕 송첸캄포(松贊干布)는 그가 없는 당 제국을 깔보기까지 했다.

649년 10월 토번의 사절이 외교문서를 들고 왔다. ‘구당서’ 토번전을 보면 토번왕 송첸캄포가 당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던 태위(太尉)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에게 협박을 하고 있다. “천자가 새로 즉위하였는데, 만약 신하가 불충한 마음을 가진다면 마땅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겠다.” 토번이 당 영내로 군대를 보내겠다는 말까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협적이다. 

송나라대 대학자 호삼성(胡三省)은 여기에 주석을 달아 “토번이 태종의 죽음을 맞아 진실로 중국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라고 했다. 645년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한 것도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대신 연개소문을 징벌하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하지만 막 즉위한 당고종은 토번의 송첸캄포를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고 서해군왕(西海郡王)에 봉하며 직물 3000단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토번이 양잠 종자 및 술·맷돌·종이·먹을 만드는 장인을 청하자 이를 모두 허락했다. 고종은 토번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모욕을 감수했다.

다음 해인 650년 5월에 토번 정치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토번의 영주(英主) 송첸캄포가 죽었다. 적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어린 손자인 만손만첸(芒松芒贊)이 뒤를 이었다. 군부를 통솔하고 있던 가르통첸(祿東贊)이 그의 섭정이 됐고, 실권을 장악했다. 토번에 유능한 장군이 통솔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의 능력은 당 조정에서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번은 사방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향후 이는 당제국의 날개를 끊임없이 조여 오는 무서운 올무가 될 터였다. 

세상을 누르고 있던 중원의 하늘 가한(天可汗)이 사라지자 아사나하로는 쾌재를 불렀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서돌궐 제부족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신강성 투르판의 동쪽 지역인 서주(西州)와 신강성 길목살이현의 정주(庭州)를 습격해 점령하고자 했다. 2년이 되지 않아 그는 서쪽으로 이동해 서돌궐의 전체 부족을 통합했고,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대부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아사나하로가) 무리를 데리고 서쪽으로 달아나서 을비사궤 가한을 깨뜨리고 그 무리를 합하였으며, 쌍하와 천천(중앙아시아 고이고사산의 북쪽)에 아기(牙旗)를 세우고 사발라(沙鉢羅) 가한이라 칭하니 돌륙과 노실필이 모두 그에게 귀부하였고, 정예군사가 수십만이어서 비을돌육 가한과 군사를 연합하니 처월과 처밀 그리고 서역(신강성과 중앙아시아)의 나라들 대부분이 그에게 붙었다.” 651년 7월 이후 당고종은 아사나하로의 서돌궐과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을 치러야 했다. 서돌궐 전란은 7년이나 끌었다. 

신라와 고구려의 엇갈린 국운 

지금은 결판이 난 사실이지만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당이 서돌궐 문제를 언제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었고, 당이 고구려를 치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백제를 공격하는 것조차 요원해졌다. 650년 당나라에 들어간 김춘추의 장남 김법민(문무왕)이 당고종에게 아뢴 신라의 위기를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 같이 서로 의지하여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니 큰 성(城)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힘도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외압에 의한 내부 반란을 염려한 김춘추는 신라조정에 권력 장치를 만들어냈다. 651년(진덕여왕 5)에 본래 재정조직인 품주(稟主)를 개편해 왕정(王政)의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執事府)를 설치했다. 여기서 왕명을 아래로 전하면서 여러 행정관부를 거느렸다. 김춘추는 집사부 장관인 중시(中侍)에 자신의 사람을 임명해 신라조정을 지배하려 했다. 

고구려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태종의 죽음은 구원이었다. 당과의 1차 전면전과 이후 이어진 소모전에 피폐한 고구려였다. 연개소문은 유약한 당의 어린 황제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돌렸다. 

고종은 그 아버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재능도 없었고 아비처럼 치국의 야심이나 이상도 없었다. 고구려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서돌궐이 당과 장기전에 들어간 651년에는 그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 교수>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