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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백조선족자치현 영광탑
무덤위에 세워져 천년세월 견뎌낸 발해의 대표적 전탑
법보신문 승인 2013.05.20  14:53:00

일반인 시신 매장한 묘탑 “발해의 독특한 매장형식”
시원은 ‘정효공주탑’ 추정, 묘상건축은 고구려의 영향


▲중국 조선족자치현에 위치한 발해 탑은 원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1908년 5월 청나라 장봉대(張鳳台)에 의해 ‘영광탑’으로 명명됐다.

2013년 5월4일 오전 10시50분 중국 장춘행 항공기에 탑승한 나는 여느 때와 달리 좀 들떠있었다. 중국내 발해유적 여러 곳을 일주일간 조사하는 출장이었지만 무엇보다 발해의 전탑인 영광탑(榮光塔)의 조사가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광탑은 중국내 유일한 조선족자치현인 장백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백두산의 서남쪽으로 남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의 혜산시를 마주하고 있는 아주 변방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교통이 불편하여 크게 맘을 먹지 못하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발해의 탑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재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발해의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이 탑의 원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광탑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1908년 5월 청나라 조정은 장봉대(張鳳台)를 파견하여 장백부(長白府)를 설치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함과 동시에 동북지역의 봉천성과 길림성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장봉대는 장백현에서 이 탑을 발견하고는 “노(魯)나라에 있었던 영광전처럼 전란을 겪으면서도 의연히 서 있다”하며 영광탑이라 명명하였고, 이때부터 ‘영광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면서 이 탑은 여러 차례 수리를 받게 된다. 명나라 때 탑 상부가 훼손된 것을 1936년에 보수한 기록이 있는가하면, 중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1950년대 이후 최근까지 조사와 보수를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특히 1988년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급의 문물보호단위인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는데, 우리나라의 사적이나 국보처럼 국가차원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왕실의 비호아래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불교미술 또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불교가 성행하면서 많은 사원과 탑이 건립되었으리라 짐작되는데 현재 알려진 발해의 절터는 40여곳 정도이고, 탑은 12기 가량 된다. 그 중 9기는 목탑이고, 3기는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이다. 아직 발해에서 석탑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광탑, 정효공주탑, 마적달탑 같은 3기의 전탑은 다른 나라의 탑들과는 달리 무덤위에 세워진 묘탑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묘탑은 승려의 시신을 화장한 후 수습한 사리를 봉안한 부도(浮屠)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발해의 묘탑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우선 승려가 아닌 일반인의 시신을 화장하지 않은 채 지하에 매장하였고, 그 위에 전탑을 건립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매장형식은 다른 국가에선 보기 힘든 독특한 것으로 발해 매장형식의 독자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발해의 전탑이 묘탑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정효공주의 묘를 발굴하면서이다.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네 번째 딸인 정효공주의 묘는 1980년과 1981년 연변조선족자치구박물관이 발굴하였는데, 무덤안길에서 묘비가 하나 발견되었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넷째 딸로, 792년에 사망하였다.

발굴보고에 의하면 묘의 방향은 남북향이고, 벽돌과 판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무덤칸, 무덤안길, 무덤문, 무덤길, 지상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탑은 무너지고 기초만 남아 있으며 보호각을 지어 놓아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무덤칸은 지표면에서 아래쪽으로 4m 깊이에 축조하였고, 무덤 윗부분에는 탑지가 있는데, 장방형의 벽돌을 이용하여 쌓은 탑이라 추정하고 있다.

마적달탑 또한 지상의 탑, 지하의 지궁, 무덤 안길, 무덤길로 구성되었다. 무덤탑은 전부 벽돌로 쌓았다. 정효공주무덤탑이 건립되었을 792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훈춘현지(琿春縣志)’에 따르면 이 탑은 원래 7층이었는데 1921년에 무너졌다고 한다. 지하에서 중년 남성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영광탑도 현재는 5층 전탑만을 볼 수 있으나 발굴조사 당시 지하에서 매장시설이 발견되었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삼령둔 무덤.

탑의 기원이 석가모니의 시신을 화장한 뒤 사리를 안치했던 것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묘탑장 역시 다분히 불교적인 장례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식 장례법으로 알려진 화장은 석가모니에 의한 불교 성립 이전 고대인도 원주민의 장례법으로 이미 존속하고 있었다. 석가모니 재세시의 행적을 전하는 불경에도 죽은 자의 시신을 불에 태워 공양하는 화장은 일반적으로 거행되고 있었던 장례법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식 장례법으로 화장이 성행하게 된 것은 입멸 직전에 제자 아난이 입멸 후 유체 처리방법을 묻자 석가모니가 전륜성왕도 화장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유체도 화장할 것을 설하고 열반에 들면서부터이다. 이후 화장은 불교식 장례법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불교식이라 하여 화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통 장례법인 풍장에 의해 장례를 거행하거나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관에 넣어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에 넣어 매장하고 그 자리에 묘탑을 세웠던 대표적인 인물로 신라 문성왕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慧徹, 785~861)을 들 수 있다. 혜철은 동리산 대안사에 머물며 교화를 펼치다가 경문왕 원년(861) 2월6일 세수 77세로 입적한다. 비문에 의하면 혜철의 제자들은 3일장으로 장례식을 마치고, 목관을 사용하여 유체를 매장한 후 그 자리에 석조부도를 건립한다.

또한 혜철 이외에도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 798~868), 보조국사 체징(普照禪師 體澄, 804~880), 지증대사 도헌(智證大師 道憲, 824~882),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 827~898) 등 신라하대 선승들의 다수는 유체를 화장하지 않고 매장하는 방식으로 장례를 거행한 사실로 보아 9세기 신라의 승려들의 장례법은 불교식 화장과 함께 전통적인 매장식 장례법 또한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장례풍습은 매우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 발해는 유체를 그대로 매장하는 방법과 화장하는 방법을 모두 행하였지만 전자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발해의 묘탑장과 관련하여서는 이미 무덤집 즉 능각(陵閣)을 설치하였던 사실이 보고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무덤으로 흑룡강성 영안현 삼령둔(黑龍江省 寧安縣 三領屯) 무덤을 들 수 있다. 삼령둔 무덤은 최근 정비가 완료되었는데 무덤의 사방에 건물의 주춧돌을 배치해 놓은 형태로 복원해 놓아 무덤위에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무덤주위에는 건물에 사용했던 기와조각이 널려 있다. 이렇게 무덤 위에 능각을 조성한 예는 이미 고구려 동명왕릉의 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발해의 묘상 건축은 고구려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정효공주묘 평면도와 단면도                               ▲ 마적달탑 평면도와 단면도.

발해의 묘탑형식 전탑은 고구려 묘상건축의 영향과 더불어 당나라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다만 탑의 지하에 공간을 둔다는 것이 중국의 경우 불사리를 장엄하기 위한 것이고, 고구려의 경우 무덤위에 탑을 배치한 경우는 없다. 유독 발해에만 지하에 시신을 안치한 묘탑이 존재한다.

왜 발해인들은 무덤위에 탑을 쌓았던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굳이 억측을 해보자면 어쩌면 전륜성왕을 자처했던 문왕(737~793)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과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왕은 70여세가 넘도록 오래 살았다. 그 탓에 장남인 대굉림(大宏臨)은 보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문왕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딸인 정혜공주는 문왕이 왕이 되던 해인 737년에 태어나 777년 40세를 일기로 죽었다.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 고분군 안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무덤 안에서 묘지(墓誌)가 발견되었다. 묘지에 의하면 정혜공주는 남편을 먼저 여의고, 아들마저도 먼저 죽은 슬픈 가족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는 문왕의 네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묘지명에 의하면 그녀는 총명한데다가 미모도 뛰어났다고 한다. 나중에 결혼해서 딸도 낳았으나, 남편과 딸이 일찍 죽은 뒤에는 평생 수절하고 재혼을 하지 않고 살다가 792년에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은 장수하며 50년이 넘게 왕위에 있었으나, 먼저 간 자식들을 앞세워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딸의 무덤위에 탑을 세운 것은 아니었을까 문왕은 정효공주가 죽은 2년 후 세상을 떠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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