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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5-4) 두만강류역에서 문명의 꽃을 피운 “해동성국” - 중에서
* 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5-4) 두만강류역에서 문명의 꽃을 피운 “해동성국” - 중에서
4. 발해국의 문치주의와 탁월한 문화수준
발해는 중세기 동아시아문명의 중심지인 중원과는 상당히 먼 거리를 사이두고있는 추운 북국의 고대왕국이였다. 비슷한 시공간에 존재했던 남방의 남조국(南诏国)[1], 대리국(大理国)[2]의 백만(白蛮)족이나 중원에 린접한 료(辽)나라 거란족들이나 북서쪽의 서하(西夏)[3] 같은 나라들의 문화수준보다 월등하게 높았을 뿐만아니라 당시의 신라나 일본의 문화수준에 비해도 나으면 나았지 조금도 짝지지 않았다.
김관웅
발해는 중세기 동아시아문명의 중심지인 중원과는 상당히 먼 거리를 사이두고있는 추운 북국의 고대왕국이였다. 비슷한 시공간에 존재했던 남방의 남조국(南诏国)[1], 대리국(大理国)[2]의 백만(白蛮)족이나 중원에 린접한 료(辽)나라 거란족들이나 북서쪽의 서하(西夏)[3] 같은 나라들의 문화수준보다 월등하게 높았을 뿐만아니라 당시의 신라나 일본의 문화수준에 비해도 나으면 나았지 조금도 짝지지 않았다.
무엇때문에 대조영과 그 후세사람들이 북국의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찬란한 문화의 꽃이 만발한 “해동성국”을 이룩해냈는가?
여기에는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사료된다.
첫째, 발해국은 건국 초기부터 발달한 고구려의 문화전통을 적지 않게 이어 받았던것이다. 발해의 귀족층에 고구려의 유민(遗民)들이 적지 않게 섞여있었으며 이들은 발해의 건국시초부터 발해문화의 건설에 적극 참여했던것이다.
둘째, 대조영을 위수로 한 말갈인과 고구려 유민들은 안광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하기에 당시 세계상에서 가장 선진적인 당나라문화를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흡취하여 백방으로 그것이 백산흑수(白山黑水) 사이에 뿌리박고 잎이 자라고 꽃을 피워 열매 맺게 하였던것이다.
발해국은 대조영시기로부터 중원에 류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3대왕 대흠무(大欽茂, 재위 737-793)는 선왕인 대무예의 무모한 무력주의를 지양하고 문치주의(文治主义)의 통치술을 구사하고 아울러 당나라와의 친선관계를 애써 도모하면서 당나라에 류학생들을 더욱 많이 파견하기 시작했던것이다. 발해국 226년 동안에 한해에 둘씩이라도 400명을 웃도는 류학생을 파견하였을것이지만 사서에 기록된 발해국 류학생의 이름은 단지 6명뿐이다. 즉, 대인수(大仁秀, 재위 818―830)시기의 말년에 파견된 리거정(李巨正), 주승조(朱承朝), 고수해(高寿海) 세 사람과 대이진(大彛震, 830-857)시기에 파견된 해초경(解楚卿), 조효명(赵孝明), 류보준(刘宝俊) 세 사람이다. 이런 류학생의 이름은 한인과 많이 다른바 말갈, 고구려에서 기원한 발해인들이라고 사료된다. 이를테면 고(高)씨나 해(解)씨는 고구려계통의 성씨임이 확연하다.
대조영은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따라 배우는데 있어서 첫 물꼬를 튼 임금이였다. 진국이 금방 건립되였을무렵, 당나라조정에서 위문차로 장행급(张行岌)을 파견하자 대조영은 즉시 아들 대문예를 파견하여 당나라에 머무르며 숙위(宿卫)[4]로 있게 하였다. 713년 당나라 사신 최흔이 와서 책봉할 때 대조영은 또다시 아들을 장안에 보내여 “취시무역(就市贸易)”과 “입사예배(入寺礼拜)”를 할수 있게 해달라고 청구하였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초기에 왕은 수차 학생들을 파견하여 경사의 태학 스승들을 찾아뵙고 고금의 문물제도를 배웠고”, “개원 2년에 류학생 6명을 입학시키라고 령을 내렸다.” 이러한것은 모두 발해 건국 초기의 일이였다.
대조영은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따라 배우는데 있어서 첫 물꼬를 튼 임금이였다. 진국이 금방 건립되였을무렵, 당나라조정에서 위문차로 장행급(张行岌)을 파견하자 대조영은 즉시 아들 대문예를 파견하여 당나라에 머무르며 숙위(宿卫)[4]로 있게 하였다. 713년 당나라 사신 최흔이 와서 책봉할 때 대조영은 또다시 아들을 장안에 보내여 “취시무역(就市贸易)”과 “입사예배(入寺礼拜)”를 할수 있게 해달라고 청구하였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초기에 왕은 수차 학생들을 파견하여 경사의 태학 스승들을 찾아뵙고 고금의 문물제도를 배웠고”, “개원 2년에 류학생 6명을 입학시키라고 령을 내렸다.” 이러한것은 모두 발해 건국 초기의 일이였다.
발해국에서 파견하여 당나라에 있은 숙위 아니면 사신, 류학생, 류학승들은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배우는 가운데서 당나라의 문인학사들을 비롯한 민간인들과도 두터운 우정을 맺었다. 그들은 당나라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자로서 발해조정에서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크고 직접적이였을것이라고 사료된다.
시선(诗仙) 리백(李白)이 당나라에 체류한 발해인들과 친교를 맺었음은 그가 쓴 “최흔을 보내며 12일 천축사를 유람하여(送崔十二游天竺寺)”와 “왕효렴을 고국으로 보내며(送王孝谦觐省)” 같은 시에서 보아낼수 있는데, 뒤의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팽려호가 하늘과 합쳐 날이 저무는데
팽려호가 하늘과 합쳐 날이 저무는데
고소성엔 저녁해가 지려고 하네
친구를 보내면서 바다기운 살피는데
효렴을 실은 배는 떠나려 하는구나.
아름다운 강의 경치 맑아지는데
기복을 이룬 산발이 련면하구나.
그리움엔 밤과 낮이 따로 없나니
동쪽을 향해 장강처럼 흐느끼네.
彭蠡將天合,姑蘇在日邊。
宁亲候海色,欲动孝谦船。
窈窕晴江转,参差远岫連。
相思无昼夜,东泣似长川。
혹자는 왕효렴이 발해의 태수이며 일본에 간적 있는 발해의 사신이라고 고증하고있다. 이 시속의 경물은 바로 발해태수가 장강어구에서 배타고 황해를 건너 압록강어구에 이르는 바다길의 자연경관을 묘사하면서 석별의 정을 읊조린것이다.
당나라말기의 저명한 시인이자 사가(词家)인 온정균(温庭筠, 812-866)은 숙위로 장안이 머물고있는 발해왕자 대문악(大文萼)과 두터운 우정을 맺었다. 대문악이 귀국할 때 온정균은 “귀국하는 발해왕자에게 드리노라”는 뜨거운 정이 흐르는 시 한수를 지어서 대문악을 문채가 뛰여난 시인이라고 칭찬하였다.
국계에는 비록 바다가 놓여있어도
문물제도는 원래 한집안이거늘.
빛나는 공훈 세우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만
아름다운 시구를 중화에 남겼노라.
국경에는 가을이라 물이 불었을지니
돛을 올려 저녁노을 맞으리.
구문의 바람과 달이 좋나니
고개를 돌리면 하늘끝에 닿으리.
疆里虽重海,车书本一家。
盛勋归旧国,佳句在中华。
定界分秋涨,开帆到晚霞。
九门风月好,回首是天涯。
발해국에서는 또한 일부의 젊고 재능 있는 인사들을 당조에 보내여 류학시켰다. 이런 발해의 류학생들은 장기간의 수학(修学)과정을 거쳐 혹자는 빈공진사(宾贡进士)가 되고 혹자는 여러 학문분야에서 도통한 학자가 되였다. 귀국한후에는 동량지재(栋梁之才)로 나라의 중임을 떠메였다.
이처럼 발해는 교육을 중시하고 학자를 존중하는 문명한 나라였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발해는 비교적 완비한 교육체계를 정립하였는데 발해에도 역시 산학(算学), 률학(律学), 서학(书学), 의학, 항해학 등을 가르치는 학당이 있었다. 발해국 조정에서 교육을 주관하는 최고기구는 주자감(胄子监)이였는데, 이는 “나라를 다스리고 유학(儒学)으로 훈도하는, 조정의 정령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당나라의 국자감에 해당되였다.
발해의 교육은 역시 고구려의 경당(扃堂)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여 개국초부터 각종 사학(私学)이 널리 보급되였던것이다.
당나라시기 조정에서는 외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이른바 “빈공과(宾贡科)”라는 과거시험를 설치하였었다. 시험표준은 상대적으로 좀 낮추었으나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급제하게 되면 당나라의 선비들과 똑같이 진사방(进士榜)에 올려주었다. 발해출신의 류학생이 빈공진사로 된다는것은 말 그대로 잉어가 룡문(龙门)을 뛰여넘어 룡이 되는격이였다. 동양인들의 가치관을 따른다면 “화촉을 밝힌 결혼 첫날밤(花烛洞房夜)”과 대응되는것은 애오라지 “과거시험에 급제했음을 알리는 방에 자기 이름이 나붙었을 때(金榜题名时)”뿐이 아니였던가.
발해국 사람으로서 빈공과시험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한 사람으로 사서에 오른 사람들로는 오조도(乌炤度), 고원고(高元固), 흔표(欣彪), 사승찬(沙承赞) 등이다. 발해인이 빈공진사로 되면 말 그대로 “가문의 영광”이였을뿐만아니라 귀국한 뒤에는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렸던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장안에 가서 류학을 하려고 하는 발해 선비들의 열망은 대단했다. 《전당시(全唐诗)》중의 아래의 두수의 시만으로도 이 점을 충분히 엿볼수 있다.
첫수는 가능하게 첫패로 장안에 와서 류학하던 발해 선비들이 고국으로 돌아갈무렵의 상황을 소재로 한것 같다. 귀국하는 발해 선비들은 떠날림박에 도처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가져다 쓰려고 했는데 리원(梨园)의 자제들도 그러했을것이다. 이런 모습이 유명한 시인 류우석(刘禹锡)의 감개를 불러일으켰던것이다.
벽옹의 흐르는 물 령대를 감돌고
그속의 시편은 세상에서 빼여났네.
귀국하려는 발해인들 그것들을 모아가려고
리원의 자제들이 사를 써달라고 청을 드누나.
辟雍流水近灵台,中在诗篇绝世才。
渤海归人将集去,梨园子弟请词来。
두번째 시는 발해 귀족출신의 빈공진사 고원고가 복건을 지날 때 시인 서인(徐夤)을 례방하였을 때의 상황를 소재로 하여 쓴 시다. 고원고는 서인에게 발해인들은 그의 “뱀을 자른 검(斩蛇剑)”, “골물을 막다(御沟水)”, “인생이 얼마이뇨(人生几何赋)” 같은 시문을 얻기만 하면 모두 황금으로 글자를 병풍에 아로새긴다고 알려주었다. 서인은 이 말을 듣고는 감개무량하여 즉석에서 시 한수를 지어 고원고에게 주었다.
달속의 계수나무를 언제면 찍어오리
민산이 와서 나한데 잔재주 부리지나 않았는지 묻네.
황금으로 병풍에다 시를 써붙인다고 하니
그 누가 추레한 시를 해솟는 동국(东国)에 보내랴
담자가 옛날 공자님을 만나고
요여가 그 옛날 진나라의 관리를 꼬집었네.
오호, 대국의 이름난 선비들
과연 몇이나 그 소박한 시풍을 다시 일으키랴.
折桂何年下月中,闽山来问我雕虫。
肯销金翠书屏上,誰把刍荛過日東。
郯子昔时遭孔圣,繇余往代讽秦官。
嗟嗟大国金门士,几个人能振素风。
발해사절이 조공하러 장안에 오는데 대하여 당나라의 력대 통치자들은 아주 중시를 돌렸다. 당나라 중종(中宗)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두 매번마다 의례에 따라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고 책봉하고 관직을 주었다. 이런 가운데서 발해국의 사절들과 당나라 관원들은 광범한 접촉과 교류를 진행하였다. 당나라의 지방관원이 리태수(李太守)의 행영으로 가는 발해사신 왕탄(王诞)을 보내면서 지은 전별시 한수가 있는데, 그들의 두터운 우정을 보아낼수 있다.
젊었을 땐 친구 사귀느라 황금을 뿌리고
중년엔 병졸들을 이끌고 록림을 휩쓸었네.
발해의 유명한 왕이 고개를 숙이니
중원의 뭇 장군 모두들 마음이 쏠리네.
나그네 길 떠나서 서주가 가까워오니
말 물 먹이다가 물 깊은 사수를 돌아보네.
밝을 때에 즐겁게 종태위를 바라보니
공명은 마치도 그 옛날 회음후 같아라.
少年接客散黃金, 中岁连兵扫绿林。
渤海名王曾折首, 汉家诸将尽倾心。
行人去指徐州近, 饮马回看泗水深。
喜见明时钟太尉, 功名一似旧淮阴。
조정만이 아니라 당나라 지방의 관청들에서도 여러차례 사신을 발해국에 파견하였었는데, 유주절도사(幽州节度使)는 장건장(张建章)이란 사람을 행군사마(行军司马)로 임명하여 발해를 방문하도록 하였다.
장건장은 그해 28세였는데 다학박식한 문인이였다. 그는 몇년간 정계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장건장은 834년에 발해국 상경룡천부에 이르러 국왕 대이진의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장건장은 발해국에서 1년 남짓하게 체류하였는데 그 시간이 가장 길고 따라서 발해국의 상황을 가장 상세하고도 신빙성 있게 파악한 중원사절의 한 사람이였다.
장건장이 발해국을 떠날무렵 국왕 대이진(大彛震, 재위 830-857)은 그를 위하여 성대한 송별연회를 베풀고 많은 귀중한 선물을 주었다. 귀국하는 그의 배낭속에는 발해국에 관한 대량의 자료가 들어있었다. 후에 그는 이런 자료를 글감으로 삼아 《발해국기행》이란 책을 써냈다. 이 책은 중국 고적가운데서 발해국에 관한 첫번째로 되는 전문저서로서 발해국의 풍속, 궁전, 관리들의 품계, 지리, 물산 등 여러면의 상황들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발해의 력사와 문화를 후세에 전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 내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후에 실전되였다.
중원문화에 이토록 심취되여왔던 발해국에서는 어떤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였는가?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이런 질문을 던져올것이다. 말갈족은 자기의 언어가 있고 발해경내에 살았던 고구려인, 한인, 돌궐인, 거란인, 회흘인 등 여러 민족들 역시 각자가 자기의 언어를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한어가 발해국 상층사회의 주요한 언어이고 높은 위상을 갖고있었던것만은 분명하다. 한어는 이미 발해의 대외관방용어로 되였고 관리들과 학자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글을 썼기에 한자는 발해국의 통용문자였다. 현존하고있는 일본에 보낸 발해의 국서와 기타 유물들은 모두 이 점을 증명해주고있다. 이를테면 발해의 국왕이 일본천황에게 보낸 국서라든가 연변 화룡시 룡수평 룡두산에서 1980년대에 발굴된 “정효공주묘비문” 같은 금석문은 모두 한어로 씌여져있다. 특히 후자는 아주 어려운 병려문(骈俪文)으로 비문을 작성하였는데, 이는 발해국 개국초 발해인들이 이미 높은 한문수양을 갖고있었음을 보여준다.
발해에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공동문어(共同文语)인 한문을 사용한것은 당시 신라나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중세기 문화보편주의시대에 있어서의 공동문어(共同文语)의 사용은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만이 아니라 중, 근동의 아랍문화권이나 서양의 라틴어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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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세기 중엽, 지금의 중국 운남성 경내에 형성되였던 왕국.
[2] 남조국의 후신으로서 지금의 운남성 대리에 수도가 있었던 왕국으로서 937년부터 1253년까지 약 3세기 동안 존속했었다.
[3] 지금 중국의 감숙성과 내몽골 오르도스지방에 1032년부터 1227년까지 존속했던 고대왕국.
[4] 발해의 최고통치자가 자기의 아들을 선택하여 당나라에 볼모로 보내는 의무가 있었는데, 이것을 숙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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