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11.htm
발해국의 주민구성 : 서론 및 결론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69
발해국의 주민구성 : 1. 종족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1
발해국의 주민구성 : 2. 언어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0
발해국의 주민구성 : 3. 문화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 한규철 http://tadream.tistory.com/272
발해국의 주민구성 : 2. 언어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발해인들이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문제 역시 발해국의 주민구성과 관련된다. 발해인들의 언어가 중국인들과 달리 독특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A-1. 渤海靺鞨의 大祚榮은 본래 高句麗의 別種[高麗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祚榮은 家屬을 이끌고 營州로 옮겨가 살았다. (中略) 聖曆(則天武后) 年間에 스스로 振國王에 올라 突厥에 사신을 보내고 통교하였다. 그 땅은 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어 남쪽은 신라와 서로 닿고, 越喜靺鞨에서 동북부로 黑水靺鞨까지 지방이 2천리에 민호가 십여만이며, 勝兵이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典籍[書記]도 상당히 있다({舊唐書}卷199下, [北狄, 渤海靺鞨).
2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일컬어 '가독부', 또는 '성왕', 또는 '기하'라 하고, 命은 '敎'라 하며, 왕의 아버지는 '老王', 어머니는 '太妃', 아내는 '貴妃', 長子는 '副王', 다른 아들들은 '王子'라 한다({新唐書}卷219, [北狄, 渤海]).
3. 振國은 본래 高句麗였던 나라로써 그 땅은 營州의 동쪽 2천리이고, 남쪽으로는 新羅와 접해 있으며, 越喜靺鞨에서 동북으로 黑水靺鞨에 걸쳐 지방 2천리에 編戶 10여만이 있으며, 병사는 수만인이며,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文字 및 典籍[書記]도 상당히 있다({冊府元龜}卷959, 土風).
4. 속말말갈은 동모산에 의지해 있었으니, 후에는 발해가 되었으며, 왕을 칭하였으며 10여대가 이어졌다. 문자와 예악, 관부제도가 있었으며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金史}卷1, 世紀).
발해의 지배층은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 왕족이었던 高氏 귀족들이 대거 참여하여 고구려어를 사용하였던 것처럼 그들의 피지배 주민들도, 비록 그들이 지방의 촌사람으로 차별은 받았을지라도,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어를 사용하였던 고구려계 주민이었다. 이와 같은 두 계층간에 통할 수 있었던 고구려어는 700여년간의 고구려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물론 토착의 방언도 있었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서로가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의 그런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발해가 고구려어와 전혀 달랐다고 상정하고 있는 '靺鞨語'(숙신어 후예)를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더더욱 지배층 일부에서라도 중국어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위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발해는 문자가 있었으며, 그들의 풍속은 고구려와 같았다는 것이다. 또한 문자와 관련이 있지만, 발해는 그들 독자의 언어도 가졌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그들의 왕을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왕(聖王)', '기하(基下)'라 하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 한다. 특히, '가독부(可毒夫)'의 사용은 신라의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니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어 오던 토착어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왕실 언어에서도 唐에서는 命이라 하던 것을 발해에서는 '敎'라 하였고, 왕의 아버지는 '老王', 어머니는 '太妃', 아내는 '貴妃', 長子는 '副王', 다른 아들들은 '王子'라 하여 唐 및 宋과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자와 언어의 자주성이 입증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해의 언어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성과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발해의 문자에 대해서는 출토된 기와 문자를 중심으로 몇 편의 글이 나왔고, 이에 부수적으로 발해어에 대한 언급도 있었으나, 이러한 견해들은 대개 발해의 漢語(中國語)說을 주장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만, 북한의 김영황은 발해어의 잔재가 {고려사}의 발해유민 기록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하면서, 발해어의 특징이 고구려 및 백제, 신라어와 공통점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B-1. (925 高麗 太祖8年)9월 6일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였다. 10일에 발해 예부경 대화균,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이 민 100호를 데리고 내부하였다({高麗史}1, [世家]1).
2. (925 高麗 太祖8年)12월 29일 발해좌수위 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민 1000호를 데리고 내부하였다({高麗史}1, [世家]1).
3. (928 高麗 太祖 11年)3월 2일에 발해인 김신 등 60호가 내투하였다({高麗史}1, [世家]1).
4. (1032 德宗 元年)5월 7일에 발해의 살오덕 등 15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5. (1032 德宗 元年)6월 12일에 발해의 혜음약이 등 12인이 내투하였다. 16일에 발해의 소을사 등 17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6. (1033 德宗 2年)4월 발해의 수을분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23일에 발해의 가수 등 3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7. (1033 德宗 2年)5월 29일에 발해의 감문대 정기질화 등 19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8. (1033 德宗 2年)12월 21일에 발해의 기질화 등 11인이 내투하자 남쪽지역에 살게하였다({高麗史}5, [世家]5).
위의 사료들을 근거로 하여 김영황이 발해어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于音(B-5): 이것은 [오롬]의 이두식 표기로서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乙音]으로 표기하였고 신라에서는 [于老音]으로 표기하였다.
若已(B-5): 이것은 고구려 서천왕의 이름인 [若友]와 마찬가지로 [아기]의 이두식 표기이다.
首乙分(B-6): 이것은 7세기 초 신라사람인 [首乙夫]와 마찬가지로 [수리보]의 이두식 표기이다. 발해의 인명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어미(뒤붙이)인 [-불], [-한], [-도] 등도 역시 삼국시기에 많이 쓰였던 것들이다.
'―불': 발해인명자료에는 [깃불]의 이두식표기인 [奇叱火](B-7,8)가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고구려 인명자료에 나타나는 [然弗], [乙弗]과 마찬가지로 인명에 붙는 어미 [-불]이 붙어서 된 것이다.
'―한': 발해인명자료에는 [모도한]의 이두식표기인 [冒豆干](B-2)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 김알지의 아들인 [새한(勢漢)], 백제의 [웃한(烏干)]과 마찬가지로 인명에 붙는 어미 [-한}이 붙어서 된 것이다.
'―도': 발해인명자료에는 [사로도], [신도]의 이두식표기인 [薩五德](B-4), [申德](B-1)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文德], 신라의 [于德], 가야의 [武德]과 마찬가지로 인명에 붙는 어미 [-도]가 붙어서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孫秀仁 등은 발해어의 漢語說을 주장한다. 즉, 그들은 발해족이 한 공동체가 되어서는 漢語(中國語)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발해족 형성의 한 부족이었던 숙신(퉁구스)계의 말갈인들은 원래 알타이계의 퉁구스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예맥계의 예맥, 부여, 옥저, 고구려족은 고아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들이 발해족이 되어서는 일부 지방변방의 민족집거지 이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漢語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발해인들은 따로 글자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발해가 그들이 사용하는 말이 漢語였기에 글자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은 발해와 그 후손인 한국 및 여진, 만주족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없다. 또한 그들이 그들 고유의 문자를 설령 만들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것이 그들의 漢語 사용 근거가 될 수 없음도 명확하다. 하물며 발해가 한자와 다른 '발해문자'를 사용하였을 강력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의 漢語 사용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발해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400여개의 '문자기와'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150여개의 문자와 부호가 발견된 것으로 조사·보고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찍이 관심을 가졌던 중국의 김육불은 이 중에서 몇 종의 '殊異字'는 발해가 한자를 기초로 하여 만든 글자라 하고, 이것은 그들이 한자로서 사상을 표현하는 이외의 보충수단으로 삼았다고 하여 '渤海文字'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는 김육불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해문자의 존재 가능성은 앞의 사료A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발해가 자못 文字와 書記(또는 禮樂)가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의 李强은 여기서의 문자도 '渤海文字'가 아닌 '漢字를 사용하였다'는 근거라고 하나, '文字'를 漢字로 바꾸어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발해문자의 존재가 인정된다면, 발해는 漢字의 吏讀를 썼던 신라보다 오히려 자주적 문자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발해의 고고학적 문자기와 출토와 {舊唐書} 등의 기록은, 비록 발해문자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여진 것도 아니고 그 생명도 길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발해 언어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즉, 이것은 발해가 결코 漢語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발해가 그들의 독자적 언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발해의 후손들이 살았던 한반도와 만주 주민들의 언어를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아, 발해어의 잔재가 가장 잘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어나 만주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두 언어는 서로간에는 친연성이 있으면서도 중국어와는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어와 발해어의 잔재는 한국어에서 뿐만 아니라, 만주-퉁구스어(특히, 남퉁구스)에도 남아 있어야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발해어가 만주어에 남아 있을 개연성은 발해가 멸망하고 그 지역 주민들의 역사가 대체로 거란과 여진의 역사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발해어의 모습을 찾는 작업은 일정하게 고구려나 백제, 신라어에 못지 않게 만주어와의 관계에서도 행해져야 한다. 이것은 고구려어가 퉁구스어이거나 한국어와 퉁구스어의 중간언어였다는 견해와도 통한다. 또한 이것은 한국어가 알타이계가 아닌 독자적인 한국어계라는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가 만주-퉁구스어와 함께 알타이계로 분류될 수 있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산동 및 요동의 숙신과 예맥 기록을 중심으로 보더라고, 한국의 상고사는 적어도 남만주 전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즉, 종족계통상으로 보더라도, 한국어는 적어도 만주어와 같은 母系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의 祖語를 만주 전역까지를 포함한 넓은 범위에서 찾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동질 집단으로 볼 수 있는 상고사의 언어 문화적 공간은 후대의 이질화되었던 시기보다 훨씬 광대했다. 언어 문화적 동질성이 이질화되었던 것은 삼국의 분립과 남북국의 대립, 그리고 이민족에 의한 발해의 멸망, 나아가 고려 및 조선이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일정하게 계승했던 遼 金 淸과 대립하면서 漢族 중심의 문화를 지향하였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언어의 동질성은 매우 넓은 범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발해어와 관련을 지어 생각할 수 있는 한국어와 만주어는 그 계통이 보다 세분된 시기의 언어였다. 이것은 李基文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언어를 韓系, 夫餘系, 肅愼系의 3대 語群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언어계통에 대한 생각은 한국어가 앝타이어계라는 람스테드의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타어 속에 포함된 현대 한국어는 '韓系語'와 '扶餘系語'가 계승·발전하여 '夫餘韓語群'의 한국어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원시 부여계어는 부여, 고구려, 예, 옥저어 등이고, 이들은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하나의 고구려어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어가 알타이계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를 제외하자면, 고구려어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기문의 생각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해어의 생성 및 발달과정도 설명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고구려어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발해어의 계통분류를 따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 언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김영황의 주장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발해어에 대한 자료는 그들의 이름속에 그 대강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물론 漢化된 이름도 적지 않지만, 발해어의 실상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토착어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어는 그 계통이 알타이계와는 다른 독자적 조선말이라는 것이다. 물론, 고대 조선말은 기록상의 濊貊과 韓族들이 쓰던 말이며, 발해는 예맥어를 계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濊貊'이나 '韓'은 당시의 조선말이 아니었고, 濊의 우리말은 '새것', '동쪽', '쇠'의 뜻을 갖는 '사/사라/사리'였으며, 貊은 '밝은것', '불'의 뜻을 갖는 '바라/버러/보로/부루'였고, 韓은 '큰/클'의 뜻을 갖는 '가나/가라'였으며, 이것을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濊', '貊'과 '韓'이라는 것이다.
발해어가 예맥계의 부여-고구려어를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국호에도 나타나 있다. 류렬은 '渤海'를 원래 삼국시기 이전에도 있던 우리나라의 고장이름이었다고 하면서, 한자로 이것은 '勃海', '滄海'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勃海'는 '바라바다/바라바라'에 대한 소리-뜻 옮김에 의한 이두식 표기로써 '파란바다'라는 뜻이며, '滄海'는 '勃海'를 뜻으로 옮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발해어의 잔재가 위와 같이 濊, 貊, 韓語의 후계인 고구려, 백제, 신라어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 渤海의 국호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즉, '渤海'의 '渤'이 '貊'과 통한다는 것이다. 渤海의 어원에 관한 견해중에 상당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渤海가 漢의 郡名인 '渤海郡'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을 중심으로 쓰여지던 '發朝鮮'의 '發'이 '貊'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渤海'의 '渤(發)' 역시 '貊'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발해어의 祖語로 여기면서 만주지역의 또 다른 언어계통으로 꼽히는 것은 부여-고구려어와 함께 알타이어계로 분류되고 있는 肅愼語이다. 이것은 부여계어와도 구별된다고 하여 퉁구스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읍루는 그 사람모양이 부여와 흡사하고, 언어는 부여 고구려와 같지 않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또한 숙신어의 발해 祖語說은 말갈의 선조로 숙신을 상정하면서, 말갈과 고구려가 전혀 별개의 종족이라는 종래의 말갈에 대한 단일계통설에서 일정하게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읍루가 부여-고구려와 언어가 달랐다는 {三國志}가 辰韓과 馬韓의 언어가 달랐다고 믿기 어려운 기록도 남기고 있는가 하면, 말갈의 종족적 다원성을 인정하는 선에서는 숙신어가 곧 발해어 나아가 만주어의 祖語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숙신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흑룡강 중하류의 흑수인(숙신)이 남만주의 예맥인과 거리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이것의 독자성은 일정하게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숙신어가 전파되어 그 뒤 만주전역의 언어가 되었다고는 생각키 어렵다. 이른바, 만주-퉁구스 祖語가 곧 숙신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송화강지역(속말말갈)과 백두산지역(백산말갈)의 예맥후예들의 부여계 언어가 만주어의 祖語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사실은 만주어가 부여-고구려어를 많이 계승한 한국어와도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아무튼, 숙신어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단순히 만주어를 숙신어의 직계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흑수인(이른바 숙신)의 남만주 남하와 예맥인의 한반도 남하 즉, 민족이동설을 전제로 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예맥인이 살던 남만주 전역이 흑수인들로 메꾸어졌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말갈의 종족계통을 흑수인의 후손으로 보는 단일계통설이 갖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갈로 불리는 지역 주민들의 대부분은 예맥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문화와 종족의 교류 및 소수의 민족이동은 인정된다 할지라도, 전면적 민족이동에 따른 종족 교체설은 그 사실성이 희박하다. 언어가 인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당시의 언어 연구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학적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의 발해어의 계통분류는 오히려 종족계통에 대한 연구에서 그 실체가 밝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사가 갖는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인접한 종족(국가)의 언어에 대하여 비교적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三國志}[魏志 東夷傳]에 濊와 高句麗, 東沃沮, 夫餘의 언어나 풍습이 모두 유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나, 읍루의 언어가 부여와 달랐다고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隋書} 및 {舊唐書}에 나타나는 등 말갈과 고구려, 흑수말갈과 발해 등의 기록에서는 서로간의 언어나 풍속에 대한 비교가 적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말갈과 고구려, 그리고 말갈과 발해의 언어를 비교하여 기록한 곳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국측의 여러 기록에 말갈어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기록자의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거나, 속말 및 백산인의 발해어가 고구려의 풍속과 함께 고구려어와 같았다는 것이 고려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종족적 측면에서 보자면, 다원적 말갈인들의 언어를 일원적으로 따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흑수인(흑수말갈)과 고구려 및 발해와의 언어는 (흑수)숙신의 연장선상에서 달랐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말갈로 불리는 백산 및 속말부의 언어를 고구려 및 발해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辰韓과 馬韓의 언어가 달랐다고 하는 것과 같이, 발해어가 말갈어와 달랐다는 착오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발해어는 말갈로 기록되는 사람들과 동질적이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때문에 발해어와 말갈어를 구별하고, 말갈어의 계통성을 따져 보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발해어의 범주에서 백산인과 속말인 등의 언어가 언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발해어의 계통을 따진다면, 대개 이것은 고구려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알타이계에 속하는가의 여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발해어가 고구려어를 가장 잘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고구려와 발해의 풍속이 같았다는 {舊唐書}, {冊府元龜}등(사료A)에 의한다. 풍속의 범주에는 언어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즉, {三國志}에서도 확인되듯이, 고구려와 부여가 '言語諸事'가 같았다는 사실과 같게 보자는 것이다. 아무튼, {新唐書}[室韋傳]은 (흑수)말갈어와 실위어가 같다는 내용까지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의 언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주목하여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발해와 말갈의 풍속과 언어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말갈의 다원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들 아래에서 고구려 및 발해언어의 계통성이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추론될 수 있다고 믿는다. 숙신 기록이 갖는 이중성과 말갈로 기록된 주민들이 고구려의 예맥계가 중심이었다는 점이 인정된다면, 언어학적 의문도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李基文이 '肅愼族이 女眞族의 先祖라고 하는 通說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로서는 이렇게 못박느니 보다 퉁구스족의 어느 선조라고 해 두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는 지적과 통한다. 만주어의 祖語를 결코 숙신어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만주어에는 고대 숙신어(필자의 흑수숙신)의 잔재보다 부여계 고구려어의 잔재가 더 많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발해어는 부여-고구려어계로 보다 확실히 정리될 수 있다. 그 일례로, 앞에서 김영황의 논급에서도 확인되었다시피, 발해 토착어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발해왕을 가리키는 '可毒夫'(사료A-2)가 부여의 '馬加', '牛加' 등의 '諸加'의 '加'와 통할 개연성이 높다. 단지, 발해어를 숙신계로 보려는 생각은 숙신어의 실체가 모호한 상황에서 언어학적인 결과에 기인한다기 보다, 숙신이 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로 발전해 왔다는 만주주민의 종족적 단일 계통설에 더 의지해 있다. 문제는 고구려나 발해어에 남아 있을 숙신계 언어의 잔재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흑수인들의 문화수준과 고구려-발해의 문명발달사로 볼 때에, 거의가 부여-고구려어로 편입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발해의 주민구성과 관련하여 발해인들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다른 언어를 쓰는 이질적 집단이었는가 하는 점도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200여년간이나 왕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언어 장벽을 극복하여 통치할 수 있는 언어정책이 나왔어야 한다. 이것은 장국종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민족 통치를 위한 특별제도가 있었어야 한다. 아울러 발해의 이원적 종족구성론에 대한 의문은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었다고 보여지는 都督, 刺史가 종족이 다른 사람으로 임명되었을까 하는 문제와, 발해가 수도를 지방으로 네번씩이나 옮길 수 있었던 문제 등에서도 나온다. 이러한 의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풀리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발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전혀 이질적 문화를 계승한 국가였다고 볼 수 없다. 발해의 주민들은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역사적 동질성이 강한 국가였다. 그렇다고 발해는 이들이 중국측이나, 러시아의 주장처럼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인들로 구성된 국가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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