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18236


"4.3 70주년에 문 대통령 온다니 춤이라도 추고 싶다"

제주4.3 당시 9살 고완순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 그리고 눈물

18.03.27 16:33 l 최종 업데이트 18.03.27 16:33 l 김동이(east334)


제주4.3사건 당시 9살이었던 고완순 북촌경로당 노인회장 요즘 제주4.3사건 70주년을 앞두고 인터뷰 요청에 정신없이 바쁘다는 고 할머니. 고 할머니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오는 4월 3일 70주년 추모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참석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 제주4.3사건 당시 9살이었던 고완순 북촌경로당 노인회장 요즘 제주4.3사건 70주년을 앞두고 인터뷰 요청에 정신없이 바쁘다는 고 할머니. 고 할머니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오는 4월 3일 70주년 추모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참석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 김동이


"9살에 제주4.3을 겪었다. 여기가 출생지고 북촌초등학교 1회다. 마을 안에 외가 친가가 다 있었다. 1946년 말부터 마을이 뒤숭숭했다. 외삼촌이 제주시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언니를 따라 반찬을 몇 번 가져다 줬다. 제주경찰서가 있었던 관덕정과 가까운 곳이었는데 신탁통치 반대 행진도 봤고, 3.1절 행사에서 어린애가 죽고 사람들이 다쳤다는 얘기도 들었다. 


1947년초에는 군인들이 총 끝에 칼을 꽂고 다녔는데 칼끝으로 문을 열고 남편 어디 갔냐고 매일같이 찾아왔다. 하루는 순경이 오고, 하루는 군인이 왔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경찰이 오면 검은개, 군인이 오면 누렁개가 왔다고 불렀다. 밤에 (무장대가) 산에서 내려와 삐라를 붙여놓고 가면 세수대야 들고 떼어내라고 시켰다."



4.3사건 발생 당시 9살. 북촌국민학교에 다니던 고완순(79) 북촌노인회장은 요즘 인터뷰요청에 정신없이 바쁘다. 하지만 인터뷰 요청을 받을 때마다 1948년을 다시 회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할 일은 아니다. 4.3사건의 증언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북촌마을만 해도 이제 38명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고 할머니는 용기를 내본다. 이번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의 현장연수인 '기억의 복원 70년 제주4‧3' 인터뷰 요청에도 망설였지만 한번이라도 더 육성 증언을 남겨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흔쾌히 허락했다.


고 할머니는 그러나 인터뷰에 앞서 취재진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증언을 하면서 울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에 가서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고. 


증언은 이어졌다.


‘오목하게 쑥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의 옴팡밭  지금은 4.3사건의 참혹상을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옴팡밭은 고완순 할머니가 끌려가 죽을 뻔한 곳이며, 1949년 1월 17일 북촌 대학살현장의 한 곳으로 당시 최대의 인명피해로 기록되고 있다.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이다. 너머에는 애기무덤과 너븐숭이 4.3기념관이 있다.

▲ ‘오목하게 쑥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의 옴팡밭 지금은 4.3사건의 참혹상을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 옴팡밭은 고완순 할머니가 끌려가 죽을 뻔한 곳이며, 1949년 1월 17일 북촌 대학살현장의 한 곳으로 당시 최대의 인명피해로 기록되고 있다.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이다. 너머에는 애기무덤과 너븐숭이 4.3기념관이 있다. ⓒ 김동이


"마을에 연기가 날 때 끌려갔다. 운동장에는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우리가 제일 나중에 끌려왔다. 울타리에는 기관총이 2~3대가 거총돼 있었는데 총구가 운동장을 향해 있었다. 남자들이 줄 앞에 나와 있었는데, 대장이 뭐라하는 말과 동시에 총을 마구 쏘아댔다. 살기 위해 엎드려서 기었다. 기다 보니 뭔가가 걸렸다. 고무신 신은 여자의 발이 보였다. 갓난아이의 엄마가 죽었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의 젖가슴을 찾고 있었다. 


손에 무언가 끈적한 게 만져졌다. 피였다. '어멍! 나 손에 피묻었어. 어멍! 나 무섭다 집에 가자'고 하니 군인이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로 동생의 머리채를 두어번 갈겼다. '간나새끼! 지금 죽으나 이따 죽으나 어차피 죽을거'하면서 머리를 내리쳤다. 아수라장이 됐다. 옴탕밭(움푹 패인 밭)으로 우리 가족이 끌려갔다. 끌려가서 보니 시신이 횡대로 얹혀져 있었다. 운동장에서 끌려나온 시간이 아침 10시경이었다. 햇빛에 운동장에 물들여진 피가 반사돼 빛날 정도였다. 제일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조 서방의 부인이 배가 남산만 해서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총에 맞았나보다. 학교 밖 울타리로 넘기는 모습을 봤다."


너븐숭이 4.3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애기무덤 4.3당시 희생됐던 애기들의 무덤이 있다. 이곳은 효리민박에 방송된 이후 추모를 하려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애기무덤 위에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인형과 꽃이 놓여져 있다.

▲ 너븐숭이 4.3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애기무덤 4.3당시 희생됐던 애기들의 무덤이 있다. 이곳은 효리민박에 방송된 이후 추모를 하려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애기무덤 위에는 추모객들이 놓고 간 인형과 꽃이 놓여져 있다. ⓒ 김동이


교편을 잡고 있다가 미군의 통역을 맡았던 외삼촌도, 빨갱이 가족으로 몰렸던 할머니도 누명을 뒤짚어 쓴 채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배고픔의 전쟁 속에서, 빨갱이의 누명 속에서 살아남은 제주4.3의 증언자 고완순 할머니는 제주의 아픔, 대한민국의 아픔을 마음 속에 묻은 채 그렇게 70년의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우리는 야당이 밉다"는 고완순 할머니, 정부에 바라는 점은?



한편, 고완순 할머니는 인터뷰 전 얘기처럼 담담하게 증언을 해 나가다 손수건을 눈에 댔다. 눈물을 훔쳤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바로 옆에서 아는 사람이 죽어 나가고, 색출돼 끌려나가 총으로 쏴 죽이는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죽음을 목격했던 생생한 증언을 이어갈 때만해도 고 회장은 담담했다. 하지만, 증언 이후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 회장은 말문을 열면서부터 울컥했다.


고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술술 흘러나오던 말문도 잠시 닫았다. 다시 말을 시작하는 그의 목소리가 목이 메었다.


하지만 고 할머니는 다시 씩씩하게 말문을 열었다. 고 할머니는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고, 나는 이념적으로는 레닌도 알고 사회주의 사상도 안다"면서도 "내가 경로당을 이끌 듯이 내가 반역한다면 우두머리인데 죄가 있다면 죄를 묻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하지만 나머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다면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고 할머니는 이어 "예를 들어 빨갱이 이념으로 반동분자라고 해서 경찰이 많은 사람을 잡아 죽였지만 우리 마을 이장은 경찰한테 밥을 줬다고 해서 산으로 끌고 와서 죽였다"면서 "이장은 북촌청년들 괴롭히지 말라고 해서 군인이나 경찰들한테 밥해준 건데 산에서는 반동질했다고해서 죽인 것이다"라며 억울하게 죽은 사연도 증언했다.


고 할머니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인 데 대한 죄는 받아야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인데 노무현 정부 때는 와서 사과하고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은 잘 해결해주리라 믿는다, 여당, 야당 따지지 말고 야당에서도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협조해주고 못한다면 발목을 잡아야 하는데, (4.3사건에 대해) 계속 인정도 안해주고... 우리들은 야당이 밉다"고도 했다.


고 할머니는 "이번 4.3 70주년 행사에 문 대통령 오신다니까 춤추고 싶다. 그런데 만나지 못할까봐, 손이라도 한번 만져야 하는데 못 만질까봐 걱정이다"라며 고 할머니가 문 대통령에게 자필로 써서 보낸 편지 한통을 공개했다.


고완순 할머니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간절한 바람이 담긴 손편지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만난 노무현 전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6년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제주4.3사건 위령제에 참석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생한 육성 추념사를 들을 수 있다.

▲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만난 노무현 전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6년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제주4.3사건 위령제에 참석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는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생한 육성 추념사를 들을 수 있다. ⓒ 김동이


"대통령님! 저는 이날이 올 것을 기다렸습니다"로 시작되는 3장 분량의 고 할머니 손편지에는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과 얽힌 일화와 함께 4.3사건 이후 한맺힌 삶을 살아온 고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바람이 간절하게 담겨 있다.


손편지에서 고 할머니는 "저는 북촌리 4.3 때는 9세의 소녀였습니다. 어린 나이로 지금 북촌 4.3기념관이 있는 옆 옴팡밭에서 죽으러 끌려가 앞에 즐비하게 쓰러진 시신과 피로 물든 밭은 검불게 물들어 햇빛이 반짝이는 흙빛을 잊을 수가 없고 죽음 앞에는 무서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끌어내고 무차별 학살하는 4.3사건. 우리 마을 북촌은 4.3의 한을 풀지 못하고 70년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9세의 소녀가 지금은 80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중략> 대통령님, 제주에는 언제 오시는지 오시면 뵈올 수 있을지? 4.3의 아픔을 해결해 주실지 때론 기대 속에 살맛이 납니다"라는 기대감도 적어 넣었다.


제주시 북촌에 위치한 너븐숭이 4.3기념관  너븐숭이 4.3기념관 우측으로는 4.3당시 희생됐던 애기들의 무덤이 있다. 이곳은 효리민박에 방송된 이후 추모를 하려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제주시 북촌에 위치한 너븐숭이 4.3기념관 너븐숭이 4.3기념관 우측으로는 4.3당시 희생됐던 애기들의 무덤이 있다. 이곳은 효리민박에 방송된 이후 추모를 하려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김동이


한편, 고 할머니는 증언을 마치면서 바람도 전했다. 고 할머니는 "요즘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4.3재단에서 자서전을 쓰라고 해서 자서전을 진행 중인데, 돌아보니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떻게 하면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있을까 걱정한다"고 밝혔다. 이어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나를 생각하다가 작은 딸에게 유언을 했다. 쓰다 남은 돈이 1천만원이 남더라도 모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여질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지금도 자발적으로 후원도 하고 있다. 내가 노인회장으로 있는 북촌경로당의 분위기도 나와 같다"고 말했다.


아직도 고 할머니의 간절한 외침이 귓전에 맴돈다. 


"제주4.3 피해자들의 바람은 단 한가지다. 피해보상보다 진실규명과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면 된다. 그 위로를 문재인 대통령이 해 줄 것으로 믿는다."


북촌 희생자들에 대해 추모하는 학생들 너븐숭이 4.3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추모비에는 단체로 4.3을 배우려는 학생들은 물론 올레길을 트레킹하는 트레킹족들까지 추모를 올리고 있다.

▲ 북촌 희생자들에 대해 추모하는 학생들 너븐숭이 4.3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추모비에는 단체로 4.3을 배우려는 학생들은 물론 올레길을 트레킹하는 트레킹족들까지 추모를 올리고 있다. ⓒ 김동이


다음은 고완순 할머니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손편지글 전문이다. 손편지는 고 할머니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공개한다.


대통령님!

저는 이날이 올 것을 기다렸습니다.

끝까지 잘 하실 것으로 믿어 존경하는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인권변호사 시절부터 좋아했고, 존경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저에게도 아픔과 슬픔을 가슴에 담게 했고, 대통령님이 집필하신 책을 읽으며 문재인님을 알게 되었으며, 책속에 가장 믿는 친구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세월을 보내온 시간들인데, 문 대통령님이 집필한 책을 알게 되어 읽게 된 것이 '운명'이란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문 대통령님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재인님이 후보였던 시절, 행운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2010년 11월 8일. 후보님이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아픔의 고장 북촌리 4.3기념관에 오신 것입니다.

저는 운명이란 책을 들고 막 달려 갔습니다.

4.3 영령들께 참배하시는 모습, 그리고 나오시는 모습을 뵙고 '운명'이란 책을 내밀고 사인을 받은 것입니다. 운명의 책을 몇 번은 들여다 본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긴 시간 현실이 온 것입니다.


대통령님!

저는 지금 79세의 여성이며, 현재 4.3의 아픔을 간직한 북촌리에서 노인회장직을 7년차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남편은 개성 경제리가 고향인 실향민이며, 공군에서 36년을 근무하고 퇴직, 그리던 고향도 가지 못하고 한을 품은 체 저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북촌리 4.3때는 9세의 소녀였습니다.

어린나이로 지금 북촌 4.3기념관이라는 옆 옴팡밭에서 죽으려 끌려가 앞에 즐비하게 쓰러진 시신과 피로 물든 밭은 검붉게 물들어 햇빛에 반짝이는 흙빛을 잊을 수가 없고 죽음 앞에는 무서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찰칵거리는 총의 쇠소리와 더불어 힘주어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생각은 납니다. 

그리고 모기 소리 같은 사격중지라는 소리와 함께 저의 가족과 약 30명 이상의 생명은 살아났습니다.


대통령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끌어내고 무차별 학살하는 4.3사건.

저는 며칠 전 '택시 운전사'를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대통령님!

우리마을 북촌은 4.3의 한을 풀지 못하고 70년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9세의 소녀가 지금은 80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대통령님과 영부인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때론 기쁨의 눈물과 고마움의 감탄을 느끼며 혼자 웃을 때도 있습니다.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웃같으면 달려가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습니다.


대통령님!

제주에는 언제 오시는지, 오시면 뵈올 수 있을지?

4.3의 아픔을 해결해 주실지 때론 기대 속에 살맛이 납니다.

대통령님을 다시한번 뵈올 수 있는지, 나이가 들어 다리도 아프고 몸이 늙어가나 기다리는 마음은 배가 됩니다.

이런 마음이 욕심일까요?

부디 초심을 잊지마시고 통일된 나라, 국민이 살기좋은 대한민국 꼭 만들어 주시고 건강, 또 건강하십시오.

두서없이 올리는 편지가 될지 모르지만 대통령님께 꼭 전달되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제주에 오시면 북촌리 4.3기념관에서 뵙기를 고대합니다.

고완순 올림. 39년 7월 9일생


덧붙이는 글 | 제주4.3사건의 증언자 고완순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지난 22일 제주시 북촌리에 위치한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진행됐습니다. 제주4.3사건 특별법 개정과 진실규명이 하루빨리 실현되길 기대해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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