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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두달간 공격에도 끄떡없는 난공불락 요새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21>
중부일보 2010.05.31  남도일보  2012.04.26 00:00

인공으로 쌓은 서쪽 성벽과 서문(오목한 곳)


죽어도 굴하지 않는 철옹성

한국의 수많은 저서와 책자가 여·당군 사이의 안시성 싸움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했다. 중국 송의(宋毅)의 저서 수당전사(隋唐戰史) 《그는 영웅이었다(那是英雄)》의 한 장절(章節)인 “안시성에서 발길을 멈추다(止步安市城)”를 읽으면 당 태종의 군사와 양만춘의 고구려군 사이에 벌어진 안시성 싸움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록 한국 서적에 전해지는 안시성 싸움의 정절과 사실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안시성 싸움의 요약적인 상황은 아래와 같다.

당 정관(貞觀) 19년(서기 645년) 7월 5일 당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 부근에 이르러 이세적과 함께 성을 공격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안시성의 성주는 양만춘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지용을 겸비하고 정예한 군사를 갖추고 있는데다 지키고 있는 성곽도 지형이 험요하여 난공이수의 요새였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손에 쥐었을 때 양만춘이 복종하지 않자 군사를 내어 안시성을 쳤지만 실패로 돌아가 결국 양만춘의 안시성 지배권을 묵인했다. 양만춘이란 인물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고 야사에 나오는 인물인데 당시의 고구려 야사에는 전설과 같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당 태종은 양만춘이 성에서 결코 나오지 않으려 하고 산세도 준험해 안시성을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안시성을 버리고 먼저 건안성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장량이 거느리는 수군 4만이 건안성을 둘러싸고 있어 협공한다면 가히 건안성을 취할 수 있고, 그러면 안시성은 손 안에 있는 것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적(이세적)은 먼저 건안성을 친다면 당나라군의 보급기지인 요동성과 멀어지게 되므로 혹시 고구려군이 귀로를 차단할 경우 자칫하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안시성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당 태종은 이적의 제안에 동의하고 안시성을 치기로 한다.

안시성이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들은 연개소문은 북부욕살(褥薩)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에게 15만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원군은 안시성에 이르기도 전에 당나라군의 저격을 받아 대패하여 군사 2만을 잃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결국 잔군 3만6천여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군에 항복했다.

신성에서 출토한 연자석판


8월 10일 당 태종은 군사를 안시성 남쪽에 이동시켜 건안성과의 연락통로를 차단하고 이적에게 명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적은 고연수 등 항복받은 고구려군사들을 성 밑에 이끌고 가 성 안의 군사들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고구려군사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태종의 깃발이 나타나기만 하면 북과 징을 울리며 화살을 날렸다. 태종은 대로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이적은 성을 함락하게 되면 성 안의 남자들을 다 죽이게 해달라고 당 태종에게 청했다. 이 소식이 안시성 안에 전해지자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격분하여 죽기 살기로 싸웠으므로 오랫동안 공격해도 이 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때 항복한 고구려 장수 고연수가 계책을 올리기를, 항복한 고구려 장수들을 석방하여 처자들과 만나게 하여 안시성 안에 군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군사를 이동하여 군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오골성(봉황산 산성)을 공격한다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고 그 여세를 몰아 평양도 쉽게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때 여러 장수들도 장량(張亮)의 수군과 합세해 오골성을 함락하고 압록수를 건너 직접 평양을 취하자고 했다.

태종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할 때 장손무기(長孫無忌)가 극력 만류했다. 만약 군사를 오골성으로 이동시키면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군사들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므로 앞뒤로 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안시성을 치고 후에 건안성을 취한 다음 진격하는 것이 옳은 계책이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태종은 오골성으로 이동하는 것을 단념하고 계속 안시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날 오후 안시성 안에서는 돼지와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종은 고구려군이 야음을 틈타 성 밖으로 공격해 나올 것이라 짐작하고 군사를 미리 배치하였는데 과연 그날 밤중 고구려군사 수백 명이 성 밖으로 뛰어나왔다. 태종의 지휘 하에 당나라군이 반격을 가하자 고구려군은 수십 명의 주검을 내고 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부터 태종은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에 토산을 쌓아 성으로 접근하게 하였다. 이에 성 안의 고구려군사들도 성을 올려쌓으면서 맞섰다. 양측 군사는 매일 6~7회씩 접전을 벌였다. 당군은 포거(抛車)와 충거(衝車)로 성을 공격했고 고구려군은 목책으로 훼손된 성을 보완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안시성 서북쪽 전망대


당군이 60여 일에 걸쳐 50여만 군사를 동원해 쌓은 토산은 꼭대기가 안시성과 수십m 거리밖에 되지 않아 거기서 성 안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고 아래에 밑바닥은 성 밑에 닿았다. 이도종은 과의도위(果毅都尉) 부복애(傅伏愛)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을 지키면서 성 안의 동정을 수시로 엿보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 토산이 무너지면서 안시성의 한쪽 성벽을 짓눌러버렸다. 마침 부복애도 자리에 없어 고구려군이 무너진 성벽 사이로 쏟아져 나와 토산을 점령한 후 그 밖으로 전호를 파고 방어공사를 했다. 당 태종은 분통이 터져 부복애를 참수효시하고 군사들에게 명해 3일 동안 계속 성을 집중 공격하였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당나라군은 두 달 동안 집요하게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때는 9월이라 날씨도 추워지고 양곡과 마초도 떨어져 당 태종은 마침내 회군하기로 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 태종이 떠날 때 안시성 성주는 성문 위에서 공손히 두 손을 합장하여 읍하며 예로써 태종을 배웅했고, 태종은 그런 양만춘에게 비단 100필을 상으로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고증할 길이 없지만 전설은 내려오고 있다.

안시성전투는 여당전쟁 시기 당군과 고구려군 간에 있었던 가장 치열한 싸움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당 태종이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하고 가장 공력을 들였던 싸움이면서도 한편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싸움이기도 하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칠 때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지경에 빠지자 달을 보며 시를 읊었다. “안개가 저 멀리 기슭을 뒤덮고 / 달도 어두운 벼랑중턱에 걸렸구나 / 산발을 따라 놀란 새들이 어지러이 날고 / 산봉우리 넘어 원숭이 울음소리 애간장을 녹이네.(煙生遙岸隱, 月落半崖陰. 連山驚烏亂, 隔岫斷猿吟)” 바로 ‘요동산야 한밤중에 가을이 찾아드네(遼東山夜臨秋)’라는 시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략하지 못하는 침울하고 착잡한 심정을 이 시에서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고 회군할 때 당태종은 “위징(魏徵·당나라의 재능이 있는 현명한 신하)이 살아있었다면 날 보고 원정(遠征)을 못하도록 했을 걸”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후에 당 태종에 이어 당 고종이 고구려 공격을 계속 해 종국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당 태종의 1차 고구려원정은 안시성에서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장광섭/중국문화 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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