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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의 모용수성(慕容垂城)과 수도인 중산(中山)


대청광여도(일,강호시대)


1925년 도.

후연(後燕)은 모용수(慕容垂,326~396)가 서진(西晉,史馬晉)의 동쪽 변방에서 일으켰는데 그 거점이 정주(定州) 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나라 수도인 신도(信都)이며 후연의 수도였던 중산(中山)은 앞서 기주(冀州)의 치소(治所)로도 기록 되어 있는데, 현재의 청원(淸苑)으로 현대 지도에서 보이는 보정(保定)은 훨씬 더 남쪽에 있다.
 
지도의 신성과 보정 사이 쯤이 후연의 기주와 북쪽으로 유주(幽州),서쪽으로 평주(平州) 자사부 경계가 되지 않나 생각 되는데 용성(容城)은 음이 같은 용성(容城=龍城), 더군다나 "慕容"의 '容'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 연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 진다.

정주는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난공불락 요동성을 피해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눈알이 빠져 도망갈 당시, 공격로상의 마지막 경유지 이기도 한데, '行唐' '唐' '唐河' 남쪽으로 '唐山'(천진 당산이 아님)등 당과 관련된 지명이 아직도 일대에 남아 있다.


--고구려본기 고국양왕(故國壤王)

○二年, 夏六月, 王出兵四萬, 襲<遼東>. 先是, <燕>王<垂>命<帶方>王<佐>, 鎭<龍城>. <佐>聞我軍襲<遼東>, 遣司馬< 景>, 
將兵救之, 我軍擊敗之, 遂陷<遼東>·<玄兎>, 虜男女一萬口而還. 冬十(-一) 月, <燕><慕容農>將兵來侵, 復<遼東>·<玄兎>二郡. 初, <幽>·<冀>流民, 多來投, <農>以<范陽><龐淵>, 爲<遼東>太守, 招撫之. 十二月, 地震.
 
2년 여름 6월, 왕이 군사 4만을 출동하여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 나라 임금 수가 대방 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 학 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남녀 1만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 나라 모용 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토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기주 등지의 유랑민 다수가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 농이 범양의 방연을 요동 태수로 삼아 그들을 무마하였다. (모용 농에게 빼앗긴 지역은 410년에 광개토호태왕이 연을 공격하여 숙군성,요동성,현토성등 50여개 성을 정복함으로서 회복-주)

----도불원인님의 <북사로 보는 환도성및 3경의 위치>에서 발췌.
及<晉><孝武><太元>十年, <句麗>攻<遼東>․<玄兎郡>. <後燕><慕容垂>遣其弟<農>伐<句麗 > 復二郡. <垂>子<寶>以<句麗王><安>爲<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 始置長史․司馬․參軍官 後略有<遼東郡>.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ad 385)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쳐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처음에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

--신도(信都)는 유주자사 진이 고구려로 귀화하기 몇년 전까지 후연의 모용수(慕容垂)가 기주(冀州)의 치소로 사용한 곳--(慕容垂治信都. 宋書).

--북한측 주장, 신도현(信都.지금의 평북 웅전) 출신의 고구려 대신 진은 만리장성 동서에 걸친 유주의 13군 75현의 넓은 땅을 다스리며 13군 태수의 정무보고를 받기도 했다. 

북한다큐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130&article_id=0000011102§ion_id=100&menu_id=100 (삭제되었음)

--후연의 수도 중산.같은 선비족으로 북위를 건국한 탁발규(拓跋珪, 371∼409년)에 의해 397년 수도 함락되고 당시 후연의 제2대 황제인 모용보(慕容寶, ?∼398년)는 선대의 고향인 용성으로 쫓겨--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수도인 중산을 빼앗기고 용성으로 달아 났다면 용성은 중산보다 더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주).

보정부에 첨기된 상곡(上谷)은 보정부와 위쪽의 역주(易州),그 동쪽에 접해 있던 탁주(涿州)를 포함하여 하간(河澗)의 일부까지가 한,수,당대의  상곡군 관내인데,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에 현재의 창려현이 옛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기록이 있고, 현재도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니 후연의 활동영역과,패수와 갈석산의 위치를 유추하는데도 참고가 되리라 생각된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
又水經云「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이 여기서 시작한다.” 또 [수경]에 전하기를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에 있다.” 대개 갈석산은 둘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갈석의 오른쪽을 끼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당연히 북평의 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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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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