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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망양(五胡望洋) 24 - 요동 전쟁
야스페르츠  2009.11.25. 00:46

398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후연 정권의 최고 통치자가 된 장락왕 모용성. 그의 치세를 살펴보자면, 1000여 년 뒤 조선에서 군림하였던 광해군의 치세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잔혹한 숙청과 친국, 처형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광해군을 연상케하는 것이 모용성의 짧은 치세였다.

모용성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사주로 모반을 일으켰던 모용기를 처형하는 것으로 치세를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자면, "열흘에 한 번 씩 직접 옥사를 판결하였는데, 고문을 하지 않고도 대부분 그 실정을 알아냈다"고 한다. 고문을 하지 않고도 범죄 사실을 밝혀냈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만큼 총명했다는 의미일지, 아니면 고문이나 복잡한 심문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판결해 버렸다는 의미일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여하튼 모용성은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니, 종친이나 공이 높은 신하들도 칼날을 빗겨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공포 분위기에 질려서 모반 사건도 자주 벌어졌지만, 모용성은 그 철저한 음모가답게 철저한 기만으로 농락해 가면서 모반자들 스스로가 무너지게 만들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재능은 그야말로 천부적이라고 할 정도다.

차가운 칼부림이 난무했지만 그 대가로 후연 정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이어진던 위 정권과의 국경 충돌에서도 우위에 섰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을 기반으로 모용성은 동방 원정을 감행한다.

400년 2월, 모용성은 3만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친정한다. 사료 상으로도 襲이라 적고 있을 정도이며, 고구려 측의 기록에 따르면 그로부터 한 달 전에 고구려의 조공 사절까지 멀쩡하게 받을 만큼 기만적이었으니, 완벽하다 할 만한 "습격"이었을 것이다. 과연 모용성답다는 생각도 든다. 고구려는 당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다. 정월에 굳이 후연에 조공 사절을 보낸 점도 신라로 구원군을 파견하기 위해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다.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점령하고 700여 리를 개척했다고 하니 고구려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을 것이다. 모용성은 점령한 땅에 5천여 호를 이주시키고 귀환하였다. 고구려는 이때의 타격으로 상당기간 대외 원정에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백제 방면은 최소 407년까지 수세에 몰렸던 것 같다. 404년에 대방으로 왜군이 쳐들어온 사건도 그렇고, 광개토왕릉비의 407년 원정 기록이 만약 후연을 향한 것이었다면 장수왕 즉위 때까지 남정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 된다.

고구려 원정 이후에도 모용성은 후연 정국에 끊임없는 피보라를 일으켜댔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 401년 8월, 마침내 용성 내부에서 모반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처음 일어난 모반 사건은 금방 들통나서 500여 명이 연루되어 죽었는데, 주도자들이 처형되자 그들의 일족이 연좌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모반을 일으켰다. 궁성에까지 잠입한 반군은 모용성이 직접 측근들을 이끌고 격파해 버렸다. 역시 모용성은 비범한 인재였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한 음모가라도 음모가 아닌 무계획한 공격은 예상할 수 없는 법이다. 모용성이 격파한 반군은 궁성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일개 졸병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와 모용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큰 부상을 입은 모용성은 급히 궁 안으로 모셔졌지만, 난이 평정되고 나자 곧 죽고 만다. 음험한 음모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최후였다.

모용성이 죽고 나자 대권의 행방은 태후 정씨(丁氏)의 손에 쥐어졌다. 태후는 평소 모용희를 총애했기 때문에 태자였던 모용정을 폐하고 모용희(慕容熙)를 왕으로 세운다. 모용희는 모용수의 서자 가운데 하나로,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였다. 모용성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항렬 상으로는 숙부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모용희를 등극시킨 정씨의 선택은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용희가 즉위했을 무렵, 그 동안 절치부심하였던 고구려의 역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온 국력을 기울여서 고구려에 맞서도 부족했을 테지만, 모용희는 사치와 방종을 일삼으며 국력을 갉아먹었을 뿐이다. 기록을 따르자면 402년에 시작된 고구려의 반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워낙에 기록이 단촐하게 남아있을 뿐이라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짐작 밖에 할 수 없다. 402년 5월에 최초로 등장하는 고구려의 반격은 모용성에게 빼앗겼던 신성과 남소성을 수복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서쪽으로 수백km나 떨어진, 그리고 자연국경이라 할 수 있는 요하마저 건넌 곳에 위치한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이다. 얼핏 이해하기에 참 난감한 기록이다. 404년에도 고구려의 후연 공격이 있었다. 어디를 공격했는지, 전황이 어떠했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진서> 재기에는 연군(燕郡)까지 약탈했다고 하니 대고구려 전선에서 보자면 후방에 해당하는 지역이 털린 셈이다. 연군은 이 무렵에 대릉하 인근으로 이치된 것으로 본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방이 털렸다는 이 내용은 틀렸음.

이를 정리해 보자면, 이 두 차례의 공격으로 후연은 최소한 요하 이동을 모두 상실하였으며, 수도 바로 근처의 숙군성이나 후방의 연군까지 공격당할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으며 국력을 차근차근히 소모시켜 나갔다. 405년에는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으나 허영심에 빠져 공격을 늦추다가 함락에 실패하기까지 한다. 성을 점령하는 영광을 직접 차지하겠다는 치졸한 행위였다. 게다가 왕후까지 함께 가마를 타고 입성하겠다고 할 정도이니 이 얼마나 무모한 허영심인가. 이런 된장남.

405년 말에는 더 웃기는 삽질을 한다. 12월에 거란 정벌을 목표로 출정하였는데, 이듬해 정월에 이르러 거란군과 마주치자 이를 두려워하여 회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왕후 부씨(苻氏)가 이를 허락해주지 않자 치중까지 버려두고 고구려로 진로를 돌린다. 용성에서 요동으로 직진했다면 약 300km, 1000리 남짓 행군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모용희는 거란의 영역까지 먼 길을 돌아 요동성마저 우회하여 3000여 리를 행군한 끝에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는 희대의 삽질을 벌인다.

자료를 검색하는 와중에 보니 이 모용희의 목저성 공격을 두고 "거란 정벌이 실패하자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목저성을 공격한 것"이라 설명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 루트를 직접 보면, 저런 말은 도저히 성립이 안된다. 그야말로 그냥 삽질인 것이다. 그나마 치중을 버리고 경무장을 하여 요동성을 무사히(?) 우회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하게 평가해줄 대목이라고 할까? 물론 목저성까지 가는 길에 지쳐서 죽고 얼어죽은 인원은 제외하고 말이다.

※ 대충 발로 그린 요동 전쟁 상황도 (400~406)

406년에 벌인 희대의 삽질을 끝으로 모용희의 고구려 공격은 일단락된다. 이로써 요동이라는 금싸라기 땅을 완전히 상실한 셈. 상황이 이러한데도 모용희의 사치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부왕후였다. 전쟁터에까지 따라올 정도로 적극적(?)인 부왕후의 입김은 모용희를 그야말로 쥐고 흔들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자면 목저성을 공격한 삽질도 부왕후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왕후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화려한 전각을 짓는 것은 기본, 여름에 언 생선을 먹고 싶다 하고 한겨울에 생 지황을 내놓으라 하는 괴짜였다. 계절에도 맞지 않는 음식을 내놓으라니 애꿎은 조달 담당자만 목이 달아난다.

이런 부왕후가 407년 4월, 세상을 떠난다. 모용희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잃어버린 양 통곡을 하다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이 죽었으니 그 예우가 얼마나 극진했을까. 심지어 신료들 가운데 제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정도였다. 능묘를 짓는데 나라가 휘청할 지경에 대소신료들을 순장까지 하려 하였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마침내 7월에 이르러 왕후의 능인 휘평릉(徽平陵)이 완성되고, 모용희는 장례를 위해 상여를 끌고 성을 나섰다.

모용희가 성을 비운 사이 드디어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난다.

후연의 장수 풍발은 죄를 짓고 도망쳐 숨어 지냈는데, 장례로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용성 내부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모용희가 상여와 함께 성 밖으로 나서자 무리를 모아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풍발은 모용보의 양자였던 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여 모용운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모용희는 모반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여를 멈춰둔 채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온다.

용성을 공격한 모용희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일단 물러났다. 이때 성 안의 병사들 중 일부가 모용희에게 호응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모용희가 이를 적절하게 이용했다면 용성을 되찾는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게도, 모용희는 이들의 말을 듣고 공포에 질려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병사들이 의아해하는 가운데 모용희를 수행한 친위대장 모용발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모용희의 명을 사칭하면서 용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여 성문이 열리고 모반을 일으킨 병사들이 무기를 놓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현장에 모용희는 없었다.

모반을 주도한 자, 모반에 호응한 자, 모반을 번복한 자, 그저 끌려다닌 자, 모용희를 따른 자 등등. 승리(?)한 병사들이긴 해도 모두들 상황은 다르다. 그런데 정작 그런 그들의 구심점, 아니 정통성을 부여해줄 모용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이들의 마음에 의심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결국 병사들은 모용희를 찾다가 슬그머니 흩어져 버렸고, 모용발은 모반자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모용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후연 정권의 몰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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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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