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5403
기무사의 잘못 끼워진 첫 단추, 그 실체가 놀랍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한국 방첩대에 정치공착-사찰 악습 물려준 미군 방첩대
18.07.19 08:38 l 최종 업데이트 18.07.19 08:38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예지(jeor23)
▲ 특별수사단, 기무사 문건 수사 착수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촛불 계엄령' 문건과 세월호 민간사찰 의혹을 파헤칠 특별수사단(단장 전익수 공군대령)이 수사활동에 공식 착수한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 별관에 관계자들이 출입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말이 이보다 적합한 경우가 있을까. 기무사(국군기무사령부)가 거듭 문제시 되는 배경에는 해방 직후에 태생한 원초적 문제점이 있다.
군대에는 당연히 정보기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를 이용해 정치 문제에 개입하고 최근 '계엄령 문건' 논란이 불거지는 등 기무사에선 오욕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기무사는 여러 차례 개명됐다. 그 개명의 역사를 소급해, 기무사->보안사->방첩대->특무부대->방첩대->특무대->조선경비대 특별조사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꼭대기에서 미군 방첩대(CIC)를 만나게 된다.
최초의 한국 방첩대, 즉 조선경비대 특별조사과가 1948년 5월 27일 창설될 당시, 사실상 산파역을 담당한 게 바로 미군 방첩대다. 조선경비대는 국군의 예전 명칭으로, 1946년 6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이렇게 불렸다.
조선경비대 특별조사과와 미군 방첩대의 관계에 대해, 김득중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은 전 CIC 요원인 케네스 맥두걸(Kenneth MacDougal)의 증언을 토대로 이렇게 말한다.
"미군은 한국 방첩대에 관한 역사를 서술하면서 '미 CIC 장교들이 초기 한국 CIC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했고 '1948년 말 미군 방첩대의 기능은 이전되었다. 방첩대 문서 대부분은 이 조직으로 넘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 수선사학회가 발행하는 <사림> 제36호에 나오는 논문.
이 논문에 따르면, 미군 방첩대의 기능이 한국 방첩대로 이전됐다고 한다. 같은 나라 기관도 아닌데 문서 대부분이 이전됐다고 했다. 초기 한국 방첩대가 미군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군 방첩대의 역할은 문서 제공에만 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CIC 요원을 양성하는 일도 그들이 맡았다. 정규진의 <한국 정보조직>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국 CIC 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미 CIC 측에서 맡았다. 미 CIC 고문들은 특별조사과 학교를 설치하고 요원들을 교육했다."
미군 CIC가 한국 방첩대의 산파뿐 아니라 유모 역할까지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미군 CIC가 즐겨 했던 일이 바로 민간인 사찰과 정치 개입이다.
미군 방첩대가 한국에서 군사 첩보만 수집한 게 아니다. 민간인 사찰과 정치 개입에도 큰 비중을 뒀다. 공식 업무는 군사 첩보활동이고, 비공식 업무는 민간인 사찰 및 정치 개입이었던 게 아니다. 이런 활동 역시 주한미군 CIC의 공식 업무였다.
1947년 3월 29일 만들어진 주한미군 CIC의 예규 혹은 표준업무절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에 관련 조항이 있었다. 이 예규를 근거로 한 정용욱의 '해방 직후 주한미군 방첩대의 조직 체계와 활동'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방첩대의 주 임무는 방첩 활동이었지만, 주한미군 방첩대 <예규>에서 보듯이 주한미군 방첩대는 애초부터 점령지의 정치·사회적 활동 전반에 대한 감시와 사찰을 자신의 고유한 임무로 삼았다.
특히 서울지부는 한국인 주요 정치인들과 정당·단체의 동향을 일상적으로 감시하였고, 정치인에 대한 빈번한 면접조사 등을 통해 그들의 활동을 낱낱이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은 단순한 감시·사찰에 머물지 않았고, 한국 내 정치에 적극 개입하면서 공작 활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 서울대가 발행한 <한국사론> 제53권에 나오는 논문.
미군 방첩대는 한국 정치인들을 상대로 면접 조사까지 했다. 또 정계에 변화를 줄 목적으로 공작 활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도, 비공식적으로가 아니라 예규에 기초해 공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미 CIC의 공작 활동은 정치인들을 만나 압력을 행사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도 그곳 요원이었다. 이들의 정치 공작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들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부정적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짐작케 하는 사례다.
악습 끊어내지 못한다면 변화는 요원하다
▲ 미군 방첩대 요원한테 암살당한 백범 김구.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김구 암살 현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번 계엄령 문건 논란을 비롯해, 우리는 기무사를 포함한 공안기관들이 이제껏 벌인 '종북몰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 종북몰이도 미군 방첩대가 해온 역할이다.
"그들은 한국 내 모든 정치활동을 반소·반공의 시각과 관점에서 재단하였고, 그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의 활동은 좌익 탄압, 극우세력 부양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졌다. 그렇게 본다면 주한미군 방첩대는 간첩·파괴행위·전복활동의 조사와 예방이라는 미명 하에 한국인들에 대한 일상적인 조사 및 공산주의 세력의 색출과 검거에 활동을 집중함으로써, 이른바 빨갱이 숙청(Red Purge)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위의 정용욱 논문.
미군 방첩대는 민간인 불법 사찰의 원조일 뿐 아니라 한국인들을 좌우로 이간질시킨 장본인 중 하나다. 긴 시간을 거치고도 과거 미군 방첩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 것일까. 기무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 계엄령을 검토했다는 문건이 나와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7월 11일에 전국 19세 이상 성인 1만 5657명과 유·무선 전화로 접촉해 502명의 응답을 받은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44.3%는 기무사의 전면 개혁을 원하고, 34.7%는 기무사 폐지를 원하고, 11.3%는 현행 유지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9.7%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면 개혁을 원한다는 응답은 30대 이상의 전체 연령층에서 나왔다. 지역별로 보면, 주로 수도권과 영남에서 이런 응답이 나왔다. 중도층과 자유한국당 지지층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기무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전면 개혁을 원한다는 것은 지금의 기무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다. 기무사를 그대로 두더라도 지금 모습으로는 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국민의 79.0%(44.3+34.7)가 지금 모습의 기무사를 원치 않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기무사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역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지 못하고 쇄신하지 않는다면, 기무사가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은 매우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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