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5149.html?_fr=mt2


사라지는 위수령, 역사적 전환점 때 세 번 발령됐다

등록 :2018-07-27 10:21 수정 :2018-07-27 10:58


① 1965년 한일협정 반대 ② 1971년 교련 반대 ③ 1979년 부마항쟁

1987년 6월 항쟁 땐 검토 후 취소…반세기 넘도록 논란


2017년 2월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촛불을 들고 걸어가는 시민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민중당은 이번 국정감사를 통하여 지난번 학생들의 한일협정반대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발동 , 위헌이라고 지적되기까지 하는 등 말썽을 일으켰던 위수령의 법적 근거와 그 발동으로 인한 부당 처사를 다시 따지는 한편 동령의 폐지를 추진할 방침이다 . 22일 민중당 소속 법사위원 박한상 의원은 위수령은 일본 명치 시대의 위수령을 그대로 옮긴 것이며 법적 근거가 없는 위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국회의원으로서 이의 폐지를 정부에 건의하기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 > 1965년 10월 22일치


송영무 국방부 장관의 “위수령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놓고 국방부와 국군 기무사령부(기무사)가 연일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송 장관이 기무사 계엄령 문건 검토 과정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보고서가 25일 국회에 제출되자 국방부는 반박에 나섰다. 한국 현대사에서 격동의 시기마다 등장한 ‘위수령’이 수십 년 만에 다시 파문의 중심에 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위헌 논란에 휩싸이면서도 폐지되지 않던 위수령은 68년 만에 계엄령 문건 파동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국방부는 지난 4일 위수령 폐지안을 입법 예고했다. 1950년 3월27일 육군의 질서 및 군기유지, 군사시설물 보호 목적으로 최초 제정된 위수령은 치안 유지에 군 병력을 동원하는 계엄령과 비슷하지만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계엄령과 다르다. 위수사령관은 재해 또는 비상사태 때 지방자치단체장으로부터 병력 출동 요청을 받을 경우 육군 참모총장에게 출동을 상신할 수 있는데, 군에 법 집행권을 부여하면서도 상위법에 구체적 근거 규정이 없다는 점에서 논란이 이어져 왔다. 그러함에도 1970년 4월, 2001년 3월, 2003년 3월 세 번의 미세한 개정이 있었을 뿐 1959년 제정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법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 격동의 역사마다 등장한 위수령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현수막을 들고 가두 행진하는 학생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반대 시위, 1971년 교련 반대 시위, 1979년 부마항쟁,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2017년 촛불집회의 공통점은 이때 모두 국가가 위수령을 발령했거나 발령을 검토했다는 사실이다.


1950년 3월 공포된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때 민주화 운동을 무력화시키는 데 주로 사용됐다. 과거 정부 수립 당시 질서 유지를 주로 군과 경찰이 담당하게 됨에 따라 지나친 법 집행권을 부여해 많은 피해가 발생했는데 전시가 아닌 상태에도 군이 질서를 유지하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정부가 학생 데모를 막기 위해 발동한 위수령과 그에 앞서 군의 실력 행사에 근거를 준 수도경비사설치령에 대해 법적 근거 등에 의문이 있다고 하는 점에 공화당 안에서도 문제시하는 측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 공화당은 위수령 등의 발동 근거 내지 경위에 대해 아직 공식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나 국회의 당 소속 법사위원 등 간에 신중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동아일보 > 1965년 9월 2일치


박정희 정권 때 발령된 첫 번째 위수령은 학생 8만여 명이 참가한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였다. 1964년 3월부터 시위가 계속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해 6월3일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22일 한일협정을 조인했다. 7월29일 비상 계엄령은 해제했으나 반대 시위가 그치지 않자 재차 선택한 카드가 위수령이었다. 또다시 계엄령을 내리기에는 비난 우려가 커서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이듬해 8월14일 한일협정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학생 시위가 격화되고 일부 대학에 무기 휴교령이 떨어진다. 위수령으로 8월26일 병력이 출동했다가 같은 해 9월25일 철수된다.


■ 1971년, 교련 반대 시위


1971년 4월26일 고려대생들이 ‘교련 전면 철폐’ 펼침막을 들고 거리 시위에 나서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2차 위수령 발령 시기는 부정선거 논란이 극심했던 1971년이다. 박정희 정권은 1968년부터 남북 대치상황을 빌미로 학생 군사훈련 강화와 향토예비군 창설 등 전 사회의 병영화를 밀어붙여 또다시 대학가의 반대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그해 대학가에서는 교련 반대 시위가 이어졌고 위수령 발동으로 10월15일부터 11월9일까지 서울대 등 서울 9개 대학에 병력이 출동한다.


“교련 반대에서 시작된 학원 동요 사태는 마침내 위수령이 발동 , 일부 대학에 군인들이 주둔하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8개 대학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 정부는 최근 학생들의 집단 시위 행동으로 학원의 질서가 정상 수업을 실시할 수 없게 문란해져 학원 스스로가 질서를 바로잡지 못할 긴박한 사태에 도달했다고 판단 , 이 같은 강경 자세로 나온 것이다 . 민관식 문교부장관은 일부 불순 학생들에게 강점되어 있는 학원을 되찾아 공부하려는 선량한 학생들에게 면학의 분위기를 마련해주자는 것이 이번 정부 조치의 의도라고 밝혔다 .”

-<동아일보 > 1971년 10월 16일치


마지막 위수령은 1979년 부마항쟁 때 발령됐다. 1979년 10월15일 부산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다음날에는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한다. 시민들까지 합세하자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진다. 시위대는 유신 타도와 정치 탄압 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출소, 경찰서, 도청, 방송국 등으로 들어갔다. 시위는 18일과 19일 마산과 창원으로 확산됐다.


“청년학도여 .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 청년학도여 !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 (중략 )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 그것은 법이 아니다 .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 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 있는가 . (중략 ) 모든 효원인들이여 , 드디어 오늘이 왔네 !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뿌려진 선언문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시청 앞 계엄군의 모습.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위수령은 마산시에 20일 발령됐다가 같은 해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으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종료된다.


“친애하는 마산시민 여러분 , 마산시 일원의 일부 학생과 분자들의 난동 소요로 우리 군은 마산시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마산시 일원에 수령을 발동하였습니다 .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필요 없이 시위 군중에 휩쓸려 구경함으로써 주동자 체포와 질서 확립에 지장을 초래케하고 데모 군중으로 오인돼 체포되는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우리 군은 데모대 주위 모든 군중을 시위 군중으로 판단하고 전원 연행하겠습니다 .”

-1979년 10월 20일 위수사령관 담화문


■ 1987년 민주화 항쟁, 위수령 발령 검토


1987년 6월13일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87년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도 위수령을 선포하려다 6.29 민주화 선언 직전 취소한 것으로 알려진다. 전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간 당시 노태우 후보는 그때의 기억을 이경남 작가에게 전해 책에 기록했다.


“1987년 6월 20일 새벽 4시 위수령 등 비상사태 결정 시각이 잡혀졌다는 얘기에 따라 19일 낮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 대통령을 만나 보니 비상조치 유보와 정치적 해결 방식 의지를 가진 대통령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6.29 선언의 구상에 착수했다 ”

-<용기 있는 사람 노태우 > 이경남 저 , 을유문화사, 1987년


계엄령은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고유권한이지만 위수령은 설치 근거가 되는 모법이 없는 데다 모호한 조항이 다수다. 제15조 2항을 보면 ‘다중성군하여 폭행을 함에 즈음하여 병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진압할 수단이 없을 때’라고 특정하면서 병기 사용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 영장 없이 현행범을 체포할 권한까지 위수사령관에게 부여하고 있다.


1965, 1971, 1979년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격동의 시기마다 발령된 위수령.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발령되려다 취소된 위수령이 전 세계에 타전된 2016~ 2017년 평화적 촛불 시위 때 검토됐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 사회의 권력이 어디까지 퇴보했는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주는 핵심 증거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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