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yahoo.com/historybook/articles/285143 

안시산전투, 패전속에 감춰진 승리

아마 안시산이란 이름은 무척이나 생소할 것이다. 사실 안시산은 개인적으로 붙인 이름이고, 역사적으로는 주필산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주필산이란 명칭은 당태종 이세민이 자신의 승전을 과장 선전하기 위해, 고구려의 고유지명에 마음대로 고쳐 붙인것으로 결코 올바른 지명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민족사학이나 고구려 다시보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주필산이란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 산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어떻게 정할지는, 보다 폭넓은 의견수렴과 구체적인 논의과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안시성 인근의 산이었음은 분명하기에 개인적으로 안시산이라 부르고자 한다.

당태종 이세민

중국 당(唐)나라 제2대 황제(626∼649). 서량(西凉;五胡十六國의 하나)의 군주 이호(李暠)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가계가 분명하지 않다. 북방민족의 피도 섞인 듯하며 아버지는 이연(李淵;당나라 초대황제 高祖)이다.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국가붕괴의 기색이 짙어지자 [太原(태원)] 방면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당왕조를 수립했다. 

당나라가 각처에 있는 군웅들을 평정하고 국내의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그가 20세 때의 일이었다. 황태자 건성(建成), 동생 원길(元吉) 두 사람을 죽이고 626년 아버지의 양위(讓位)를 받아 즉위한 뒤 장손무기(長孫無忌:鮮卑族)의 누이동생을 황후로 삼았다.

돌궐을 비롯하여 주위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부족의 추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라는 칭송을 받았고, 후세 제왕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유능한 후계자가 없었을 뿐더러 말년의 고구려 친정(親征)의 실패로 인하여 사망한 뒤에는 정권이 흔들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혁명을 초래했다.


644년 음력 3월에고구려를 침략한 당태종은 약 4월에 요수를 돌파하고,약 보름만에 요동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 좋게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었다.그리고 요동성이 무너지자 백암성 성주는연개소문이 파견한 지원병 1만명이 도착하기도 전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때문에 지원군 1만명을 이끌던 고돌발 장군은 당나라의 선봉 계필하력의 군과 싸워 선전을 하였지만, 거점을 우선 장악한 당군의 완강한 공세에 밀려 후퇴하고 말았다.

이에 연개소문은 더이상 밀려서는 안된다고 판단 북부 누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누살 고혜진(高惠眞)을 총장으로 삼아 15만의 대군을 모집하게 된다. 이것은 고구려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대의 군사작전으로, 당시의 상황의 얼마나 절박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영향력이 어느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고연수와 고혜진은 왕족이자 북부와 남부를 대표하는 대귀족이었을 망정 이후 전개되는 전투과정으로 보아 그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군사지휘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지휘관으로 삼은 것은,각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들을 압세워 충분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大盧(대로) 고정의란 또 한명의 인물을 자문 역할로 따로 보낸것을 보면, 연개소문 역시 이들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나 신뢰를 보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들이 이끈 15만의 대군은 안시성(安市城) 인근의 산을 선점하여, 전술상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나라의 군사는 약 3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고구려 원정 당시 총 병력이 최소 15만에서 최대 30만 정도로 보는데,왜 3만명 밖에 되지 않을까?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소 틀리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본다. 우선 삼국사기에 보면 장량이 4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비사성을 점령하는데 3월부터 5월까지 약 두달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아직 이들이 합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백암성 항복에 고무되어, 앞선 부대의 전진속도가 너무 빨랐다. 이것은 곧 본진과의 간격이 너무넓게 벌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이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등을 점령하긴 하였지만, 군사적으로 완벽하게 굴복시켰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10만여 명 정도의 본진은 고구려 군의 역습을 대비하면서 따라가야 했기때문에, 선봉부대의 전진 속도를 맞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태종은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승리를 장담하였다. “저들이 만약 군사를 정비하여 안시성과 연합을 하여 성벽을 쌓고, 높은 산에 의거하여 성중의 곡식을 날라다 먹으면서, 말갈의 무리를 풀어 우리의 牛馬를 약탈하여 간다면, [우리가] 공격을 하여도 함락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중책은 성중의 무리를 이끌고 밤에 도망가는 것이고, 하책은 우리와 싸우는 것인데 반듯이 하책으로 나올것이니 눈앞에서 사로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당태종의 주장은, 후대 역사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덧붙여 진 것으로 보인다. 당태종의 주장한 상책은 재고할만한 것이지만, 군사적으로도 우위에 있고, 지리적으로도 고지를 선점한 상태에서 야밤을 틈타 도망하는 것이 어떻게 책략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싸워보지도 않고 적들을 성안에 무혈입성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또 숫적인 우위에 있는 상태에서 지나치게 방어태세만을 고집하는 것도 그리 좋은 책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당나라에게 병력을 보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봉부대와 본진의 간격이 벌어졌을 때 집중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당연히 검토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다만선재공격을 할 경우 승패의 향방은지휘관의 역량에 따른 것이었는데, 군사지휘의 경험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수비전으로 일관하는 것이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고정의역시 고연수의 지휘능력을신뢰하지 않았던지, 우선 수비하면서 기병대로 하여금 적의 군량 수송로를 끊고 지구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고연수는고정의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선재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물론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당나라의 군대는 여러성과의 전투에서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였고,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월등한 군사적 우세에 있는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문제는 이후 벌어지는 당군과의 혈전에서 고연수가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것에 있었다.

우선 고연수는 안시성으로부터 40리거리까지 육박하였다. 안시성마저 당군에게 내준다면, 천리장성의 허리가 완전히 끊겨 요하강변에 있는 주요요새는 사실상 함락상태에 이르고, 비사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량의 군대가 합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안시성을 보존하는것은 고연수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러한 작전은 상당히 유효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고연수는 비록 당태종이 유인작전을 펼치기 위해 보낸 돌궐병사들이지만, 기세좋게 격파하고 안시성 인근 8리에 있는 산을 점령하였다. 또한 고연수는 무려 40리에이르는 진영을 구축하여,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당태종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비록 당태종은 유인작전을 펼치긴 하였지만, 고구려군의 기세가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질 형편이었다. 이때 강화왕 도종은 5000명의 기병으로 평양성을 급습하여 항복을 받아내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하지만 당군으로서는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5천명이나 차출한다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고연수가 포로로 잡혔을 때 10만의 병력으로도 당군에게 패했다고 말한 것으로보아 5만의 병력은후방의수비군으로 남겨두엇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당태종은 유인작전을 끝까지 밀어 부치기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으며, 고구려 군이 함정에 걸려 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우선 당태종은 이세적으로 하여금 주력 1만 5천명으로 서쪽 능선에서 진을 치도록 하였고, 장손무기에게는 기병 1만 1천명을 이끌고 북쪽 계곡을 나와 고구려 군의 후미를 치도록 하였다. 나머지 4천명은 당태종을 호위하도록 하였으며, 그 자신은 가장 안전한 산정상에 진영을 꾸렸다. 그리고 진영을 정비할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고구려가 과거처럼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점령하고 있는 모든 땅을 되돌려 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여 고구려군을 방심하도록 만들었다. 

이 내용은 사실상 당태종의 항복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고연수는 당군이 진영을 정비하고 있는 동안에도 전혀 사태 파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당군이 진영정비를 마치는 동안 날이 밝았다. 그런데 고연수는 척후병을 먼저보내 지형부터 살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고,또한 여전히 당태종이 약속했던 말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방비없이함정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고구려 지형이라도, 직접 답사하지 않은 이상은 세세한 부분까지 알기는 힘들다. 또 좁은 계곡 속에서의 전투라면 기병대의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되기 때문에 고구려가 자랑하는 개마무사들의 전투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힘들다. 만약 척후병을 풀어 조금만 더 면밀히 살펴 보았아도, 당군의 유인책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성급하게 진격하였던 고연수 부대는, 능선에서부터 급작스럽게 쏟아지는 당나라의 엄청난 타격에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급히 빠져 나가려 하였지만 앞은 좁은 골자기라 대규모 병사가 이동하기 불편하였고, 후방은 이미 장손무기(長孫无忌)의 군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구려군은 숫적인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호각세였고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또하나의 변수가 등장하였다. 때마침 설인귀가 이끄는 지원군이 고구려군의 진영에 기습적인타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진영은 걷잡을 수 없이 뒤엉키게 되었고,명령전달체계는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고대의 전쟁에서 진영이 한번 엉켜 버리면 아무리 우수하고 많은 병력을 가진 군대라도 수습하기 힘들다. 더구나 지리적으로 계곡속에 갖혀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당시 고구려군 전사자가 3만명이라 하였고, 당사의 기록에는 2만명 정도로 나와있지만, 당사의 기록은 전투에서 직접참살한 수만 헤아린 것이고, 삼국사기에는치명상을 입고 진영에서 죽은 수까지 합쳤기 때문에 이같은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고연수는그래도 3만 6800명의 패잔병을 수습하여,근처의 산에 올라가 수비태세를갖추고 항전의지를 다졌다. 그러자 당태종은 여러 군대를 합세하여 산을 포위하고 냇물의 다리를 철거하여, 퇴로를 끊고 고구려 군을 고립시키기에 이른다. 3만의 넘는 군대를 포위하였으니, 설인귀 등의 합류한 당나라의 군대는 적어도 6만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전투에선 물론 질수도 있고 이길수도 있다.그러나 당태종의 기만책을그대로 믿고10만의 군대를 일시에 잃은 것은 분명 군사지휘자로서 고연수의 역량을 높게 평가 할 수 없는 이유중 하나이다. 또한 고연수를 총장으로 임명한 연개소문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 연개소문은 모든 국정운영과 군사업무를 총괄하고 잇었기 때문에, 최종책임은 당연히 잘못된 인사를한 연개소문에 있다. 

다만 고정의란 군사책략가를 대동하여 그나마 피해를 줄였다는 점은 있지만, 그는 말 그대로 조언자이지 실질적인 작전권이 없는 사람이다.또한 비록 1차 대접전에서 패하였지만 3만 6천명이라면 결코 적은 숫자의 병사가 아니었다.여기에 말이 5만필이고 소도 5만 마리나 되었다고 하니, 전부 수습할 수는 없었겠지만 일부라도 수습하여 군량으로 삼았다면, 안시성과 연대하여 한달정도는 산악에 의존하여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장수라고 하여서 반드시 희생정신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진정한 고구려 무장이었다면 비록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꺽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지구전 정도는 벌여 주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별다른 반격없이 퇴로가 막히자 그대로 항복하고 말았다. 군사들의 생명을 아껴서였을까? 혹은 후방에 남겨둔 5만의 군대가 구원해 줄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 였을까? 그러나 그 어떤 변명을 한다고 해도 한번의 반격조차 없이항복한점은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만 이후 3만명이나 되는 포로에 대한 예우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우선 당태종은 고연수와 고혜진이 포함된 누살들과 장교 3500명은 포로로 잡아 중국으로 옮기고, 말갈족 3300명은 그대로 생매장하였다. 이제 약 3만명이 남았는데, 역사기록에는 이들을 조건없이 풀어 주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런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당시에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의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시대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전쟁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는 상태에서 수만명의 포로를 순순히 풀어 준 예는 없다. 더구나 책사역할을 하였던 제 3의 인물 고정의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차라리 3만명을 전부 생매장 시켰다면 이와같은 모순점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있어서도 수만 아니 수십만의 포로들을 생매장 시킨 예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의 주목하여,고정의가 잔여 5만명과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역습을 가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재기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있고 합리적인 주장으로 공감하고 있다. 따라서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군의 압력을 받은 당나라 진영은, 최소한 3만이나 되는포로를 풀어주거나 포기해야 되는 상황에 몰렸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패전은 하였지만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고구려 군이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지 못한 것은, 역시 고연수를 비롯한 고구려 귀족 다수가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당나라는 곧바로 평양공격을 계획하지만, 건안성, 신성에 있는 10만 대군이 후미를 칠 것을 두려워하여 포기하고 만다. 그렇다면 건안 신성에 있는 10만 대군의 정체는 무엇일까? 건안성은 당태종의 초기 공격에서 영주도둑에게 크게 패해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일이 있었다. 신성 역시 요동성의 몇배에 달하는 군사가 처음부터 배치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건안, 신성의 군중에 대해서 '무리'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군사로 볼지 아니면 성안의 주민과 합친수로 봐야할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전히 15만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당나라 군이, 역습을 두려워 하여 결국 진로를 안시성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들이 존재가고구려 군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결국 고정의가 이끄는5만~10만에 달하는 고구려 군이 건안과 신성에 합류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군사숫자가 증가하게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 이들이 배후에 주둔하고 있음으로 인해 당나라 군사들을 사실상 포위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요동성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식량보급이 그리 원할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3월부터 약 7개월 가량전개된 1차 고당전쟁에서, 장기적으로 고구려가 승리하게 된 또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듯 본래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이 산을, 당태종이 자의적으로 붙인 주필산으로 부르는 것에는 반대한다. 중죽측의 일방적인 기록에 의해서, 그리고 중국측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수 있도록 편찬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해서, 단지 주필산이란 이름으로만 전해지는 이곳의 이름을 그대로 두어도 좋은가?

비록 본래의 이름은 완전히 사라져 추측조차 할 수 없지만, 안시성 인근에 있었던 이곳의 이름을 안시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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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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