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alhae.org/sogilsu/travel/CHOLLI-5.HTM
안시성을 찾아서
고구려 천리장성을 찾아 (5)
고구려 천리장성을 찾아 - 고구려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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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요령성 수암(岫巖)의 고구려 낭낭산성 http://tadream.tistory.com/4517
(12) 최초 공개, 고구려 박작성(泊灼城)! http://tadream.tistory.com/5498
(13) 요동-평양간 최고 요충지 오골성 http://tadream.tistory.com/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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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안시성으로 가는 거다" 필자가 해성을 다음 목적지로 삼은 것은 바로 해성에 우리의 최대 관심사인 안시성이 있기 때문이다. 해성에서 7㎞거리에 있는 동네 입구에는 영성자촌이라는 표지판이 있어 처음 가는 사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말이 촌이지 100호가 넘은 큰 마을이다. [영성자]촌은 원래 [고려영성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즉 고구려의 병영이 있었던 성이라는 뜻인데 요령성에서 고구려라는 뜻이 담긴 [고려]를 빼고 [영성자]라고 표기하다가 영(營)자가 길영(英)자로 와전되어 현재의 이름이 된 것이다(요령사적자료 57쪽) 운전사는 소련제 라다 차를 몰고 성안으로 들어가 길이 끝나는 산 중턱까지 데려다 주었다.
안시성
이곳 저곳에서 사과나무를 손질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낯선 사람들을 바라본다. 한 젊은이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느냐?" "카메라를 좀 보자" "중국말은 하느냐"는 등 호기심이 대단하다. .
도라지밭에서 고구려 기왓장이
"저기가 점장대요" 건너편에서 일하던 할아버지 한 분이 묻지도 안 했는데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바라보니 오른쪽 산꼭대기였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점장대란 장대(將臺)를 말하는 것으로 성안에서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를 말한다. 우선 장대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장대가 있는 산 꼭대기에는 밭을 일구어 도라지를 심어 놓았다. 바로 거기서 기왓장을 발견하였다. 환도산성에서 보았던 적갈색 고구려 기왓장이 분명하다. 바둑판 무늬나 노끈무늬 등 한 눈에 고구려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시성이 고구려 산성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산성은 자연적인 산등성이를 따라 흙으로 쌓은 토성인데 총 둘레가 4㎞이고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하나씩 있다. 성안에서는 고구려 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여러 해에 걸쳐 출토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기와조각들은 필자도 쉽게 발견할 정도였고, 독이나 옹기 같은 토기조각, 쇠칼, 쇠창, 쇠화살촉, 돌포탄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안시성의 산쌓기 작전
기록에 보면 성터 동남쪽 귀퉁이 바깥쪽에 인공적으로 쌓은 작은 토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장대에서 내려다보는 바깥쪽이다. 이 토산은 안시성에 대한 사료의 기록과 일치한다. 645년 군대를 직접 이끌고 처들어온 당 태종은 사생결단하고 전력을 다해 막아내는 안시성은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자 새로운 전투방법을 채택한다. 안시성의 성곽 높이와 비슷한 규모로 토산을 쌓은 다음 점차 성벽으로 접근시켜 군사들이 한꺼번에 성안으로 넘어들어 갈 수 있도록 한다는 공격대책이었다. 60일간 연인원 60만 명을 동하여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은 토산은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성으로 접근해 왔다. 안시성의 고구려인들도 이에 맞서 당군의 토산 높이에 따라 성벽을 높여 당군이 성 안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양쪽 군사들이 경쟁적으로 토산과 성벽을 자꾸만 높여 나갔다. 그러던 중 어느날 갑자기 토산이 허물어지면서 안시성의 동남쪽 성벽을 덮치는 바람에 안시성의 성벽 일부도 무너졌다. 이 틈을 이용해 우리 군사 수 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쏟아져 나가 싸워서 토산을 지키고 있던 당나라 군사를 격멸하고 순식간에 토산을 점령해 버린다. 당나라 군이 막대한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여 구축한 토산이 한 순간에 우리 손에 들어와 거꾸로 당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고구려군의 망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당 태종은 책임자의 목을 베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군이 총력을 다하여 3일간을 공격하였지만 막대한 인원과 장비만 손실하고 끝내 토산을 탈환하지 못한다. 9월 18일 드디어 당 태종은 철군을 명령한다.
당나라 종군기자의 기록
중국측 문헌에는 당 태종의 패전을 감춘 엉터리 기록이 많다. 이러한 엉터리 기록의 극치를 이룬 것이 당 태종의 철수장면이다. [군사를 안시성 밑에 모아 깃발을 떨치며 떠나니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다만 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면서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격려하였다.] 패전하여 황망히 도망하는 당 태종에게 안시성 성주가 절을 하고, 당 태종이 비단을 내리며 적군의 왕을 잘 섬기라고 했다는 묘사는 정말 코메디 중의 코메디다. 태종이 안시성에서 퇴각한 지 3일만에 황급히 요하를 건넜고 철군 후 고구려의 침공을 몹시 후회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군은 대패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기사를 읽노라면 마치 당나라측 종군기자가, 그것도 어용 기자가 쓴 글을 읽는 것 같아 씁쓸하다.
당 태종은 제위 찬탈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면서 내건 명분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간의 도리상 이러한 자를 어찌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있겠는가]였다. 그러나 알 고 보면 당 태종이야 말로 인간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대표적인 표본이다. 당나라를 세운 아버지 이연(李淵)은 수나라 왕실에서 수여한 당국공(唐國公)이란 직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빼앗았고, 이연의 둘째 아들로 황제가 될 수 없는 당 태종 이세민은 장자인 황태자 이건성(李建成) 일파를 제거하고 제위를 찬탈한다. 이것이 유명한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다. 이런 패륜적인 당 태종에 대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기록한 찬탄은 가히 찬란하다.
[당 태종은 어질고 명철한 불세출의 임금이다. 난을 평정하기는 탕과 무왕에 견줄만 하고, 이치에 통달하기는 성왕·강왕과 비슷하였으며, 병법에는 기묘한 전술이 무궁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 정벌의 공이 안시성에서 무너졌으니, 그 성주는 가히 비상한 호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는 그의 성명을 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양자가 이른바 "제·노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김부식이 당나라의 고조와 태종의 역모를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사가로서 준엄한 비판을 못할 망정 그를 불세출의 임금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당시 성주였던 양만춘(梁萬春 또는 楊萬春)이 당 태종의 눈을 화살로 맞추어 태종이 한 눈을 잃고 패주하였다는 이야기가 고려 후기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물러가면서 잘 가라고 절을 하는 성주에게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고 갔다고 쓰고 있는데 눈알이 빠진 사람이 어찌 비단까지 주고 가겠는가. 중국이 황제를 치켜세우기 위해 쓴 미사여구를 적국인 우리 나라에서 그대로 옮겨 쓰다니 이거야말로 사대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천년을 이어온 안시성의 대추나무
장대에서 동쪽 성벽을 따라 북쪽을 거쳐 처음 들어온 서문쪽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장대를 출발하였다. 동벽을 따라 장대를 내려오자 뒤로 넘어가는 문(터진 곳이) 있는데 넘어가지 직전 제법도 편편한 곳이 나온다. 여기가 바로 동문인 것이다. 동벽을 따라 북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산성을 답사할 때는 성벽 위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 가장 쉽다. 아무리 험한 지형에다 쌓았다고 하더라도 성벽길을 따라가면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산성답사를 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아 언뜻 보기에는 쉽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성벽 위를 따라 걸어가 보니 쉽지가 않다. 대추나무, 아카시아 나무가 길을 막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나무는 손가락 길이 만큼씩이나 긴 가시들을 가지고 있어 가는 길을 더디게 만들었다. 풍상에 시달려 위로 자라지 못하고 땅딸보가 되어서도 굳세게 버티며 살고 있는 대추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대추나무를 심을 사람은 없을 것이고 스스로 나고 자라면서 천년을 아니 수 천년을 대를 이어 살아왔을 이 야생 대추나무야말로 안시성대첩을 비롯한 수많은 안시성의 애환을 말없이 내려다 본 증언자일 것이다. 동벽 중간을 지나자 또 넘어야 할 재가 있고, 바닥이 돌로 된 넓고 평평한 곳이 있어 건물이나 또 다른 장대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벽을 내려오니 1시간 이상이 걸렸다. 해성역에 돌아오니 5시가 조금 넘었다. 차가 연착을 하여 7시 20분쯤 개현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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