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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해국의 주민구성

발해국의 주민은 여러 계통의 족속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던 것이 고구려계와 말갈계 주민이었다. 건국 과정에 참가하였던 집단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말갈계와 고구려계 중 어느 족속이 발해국을 이끌고 나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느냐에 대해서는 그간 논의가 분분하였고, 그것은 발해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쟁점이 되어 왔다. 말갈족이 중심이었다고 보는 경우에는 발해사를 중국사나 만주지역사의 일부로 파악하였고, 고구려계의 주민이 중심이었다고 보는 경우에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분으로 여겼다. 이렇듯 논란이 분분한 것은 발해인 자신이 남긴 사서(史書)가 전해지는 것이 없고, 발해 왕실의 기원에 관하여 신라와 당측의 단편적인 기록에서는 이를 말갈족이라 한 서술과 고구려인이라 한 것이 모두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세기초 발해가 멸망한 뒤, 요(遼)의 지배 아래에서 옛 발해국의 주민들은 두 족속으로 나뉘어져 파악되었다.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이 그것이다. 발해인과 여진인은 그 존재 양태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여진인의 생활은 부족 및 부락 단위의 공동체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는데 비하여, 발해인의 그것은 이미 사회 분화가 깊이 진행된 상태였다. 그래서 요는 발해인을 한인(漢人)과 동일하게 주현(州縣)으로 편제하여 요의 지방관이 직접 통치하였고 한법(漢法)을 적용하였다. 여진인은 그 추장의 주도 아래 부족 단위로 자치를 행하며, 요의 간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발해인과 여진인은 집단적인 귀속의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여진인은 말갈족의 후예였다. 발해 멸망 후 고려로 넘어온 발해국의 주민들에 대해서 고려 조정에서는 그들을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구분하여, 요나라의 그것과 동일한 면을 보였다. 이렇듯 발해국의 멸망 후에 보였던 주민 구성에서의 이중성은 발해국이 존속하고 있을 때에도 존재하였다.

8세기 전반 발해를 방문하였던 일본 사신이 남긴 기록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터에 자리잡고 있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이 적으며, 주(州)가 설치된 큰 촌락의 촌장은 모두 토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건국 초기부터 주민 구성에서 이중성을 지녔고, 토인이 발해국을 주도하였음을 나타내준다. 여기에서 말하는 토인은 고구려계 사람들을 의미한다.

일본에 보낸 발해의 국서(國書)에서 발해왕이 스스로 고려왕이라 칭한 예가 있으며, 일본에 간 발해인을 일본측에서도 이들을 고려인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반면 발해인이 스스로 말갈족이라고 표현한 예는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는 사례가 보인다. 792년 당에 파견된 발해 사신 양길복의 관직이 말갈을 관할하는 직이라는 뜻의 '압말갈사(押靺鞨使)'였다는 사실은 그 구체적인 예이다.

보수성이 강한 무덤의 양식을 보면 발해 초기 왕족 등 지배층의 무덤떼인 육정산고분군은 고구려계의 양식인 석실봉토분이었다. 발해의 고분 양식은 석실분과 토광묘 및 벽돌무덤으로 나뉘어진다. 이중 석실분은 주로 5경지역과 압록강 유역에 분포하고, 토광묘는 주로 외곽지대에 있다. 후자는 말갈계 무덤이었다. 벽돌무덤은 당문화의 영향을 받은 귀족의 무덤으로서 발해 중기이후에 출현하였다.

한편 발해 존립 당시 그 나라의 성격에 관한 인접국 사람들의 인식을 보면, 보장왕(寶藏王)의 손자로서 당의 안동도호를 역임한 고진(高震)의 묘지명(墓地銘)에서 그의 출자를 '발해인'이라 하였다. 내륙아시아의 터키계 사람들도 발해를 'Mug-lig'라 하였다. 이 단어는 그 전에 돌궐에서 고구려를 지칭하던 'Mokli'(맥구려, 貊句麗)라는 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후 그 땅에 일시 설치하였던 동단국(東丹國)의 좌차상(左次相)을 지낸 야율우지(耶律羽之)가 발해인을 강제 이주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요하유역을 발해인의 고향이라 하였다. 이 역시 발해가 고구려계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여기고 있던 거란인의 인식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볼 때 발해국은 고구려계 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말갈족 일부가 이에 합류하여 이룩한 나라로 볼 수 있다.

발해국의 주민 구성에서 보이는 이중성은 지방제도의 운영에도 반영되었다. 외형상 전국의 모든 지역과 주민이 주현제로 편제되어 일원적으로 통치되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주민의 일부는 부족 및 부락 단위로 그 추장인 수령(首領)의 휘하에서 자치를 영위하면서 지방관의 간접적인 통제를 받았고, 일부의 주민은 주현의 지방관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다수의 말갈족이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며, 이들은 발해 멸망 후 여진인으로 불렸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토인'이며 발해 멸망 후 발해인으로 불린 이들이다. 이들은 주현이 설치된 지점을 중심으로 그 인근지역에 주로 거주하였고, 요가 발해국의 주민들을 요동지역으로 대규모 강제 이주시켰을 때 그 주된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기도 하다. 곧 발해의 지방제도는 주현제의 외피(外皮)를 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주현제와 부족제(部族制)가 함께 작용한 것이었다.

발해국을 주도해 나가던 주민은 주현제하에 있던 이들이다. 이들은 귀족과 평민 및 부곡(部曲) 노비(奴婢) 등의 예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부족제하에 있던 말갈족보다 소수였다. 이 점은 발해의 지배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으며, 그 문화 기반이 상대적으로 협애함을 나타내게 한 요인이었다. 한편 말갈족은 요대의 여진인의 상황을 통해 미루어 볼 때 아직 공동체적인 관계가 강하게 작용하는 사회상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진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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