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만보산사건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2. 일제의 만주침략과 한인사회의 수난 > 3) 만보산사건
1931년 7월 2일 중국동북지방의 만보산에서 발생한 재만한농과 중국농민 사이의 충돌, 즉 만보산사건은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간의 분쟁·갈등 속에서 재만한인 동포사회가 겪은 수난을 잘 대변해 준다고 하겠다.
사건의 발생장소는 행정구역상 지린/길림성 장춘현향(张春县乡/長春縣鄕) 삼구(三区/三區)에 속하는 완바오산/만보산으로, 사건의 발생은 장춘에 거주하는 하오용더/학영덕(郝永德)이 일본측과 몰래 결탁하여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한 후 1931년 4월 16일 이통허/이통하(伊通河) 동쪽 산싱바오/삼성보(三姓堡) 관황둔(官荒屯) 일대를 샤오한린/소한림(萧翰林/蕭翰林) 등 12호와 10년 기간으로 계약을 체결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계약서의 맨 끝 제13항에는 ‘이 계약은 현정부에서 비준한 날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만약 현정부에서 비준하지 않으면 무효이다.”註 043라고 명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오용더/학영덕은 다시 이승훈(李承勳) 등과 계약을 맺어 이곳에 한농 188명을 불러들였다.註 044 한인들은 도착하자마자 이통허/이통하를 관통하는 수로를 파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공사장 중간 지대는 중국인 쑨용칭/손영청(孙永淸/孫永淸) 등 41호의 소유였는데, 하오용더/학영덕과 한농은 이들에게 전혀 양해를 구하지 않고 20여 리의 수로와 중국인 토지 40여 향(晌)을 파헤쳤다. 이에 중국인의 항의가 빗발쳤으며 중국경찰이 현지에서 떠나라고 여러 차례 통고해 왔으나 한인들은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중국인과 한국인의 대립은 점차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장농도전공사의 경리(經理)인 하오용더/학영덕이 조지계약(租地契約) 13항에 명시된 대로 장춘현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바로 전조(轉租)계약을 맺은 것은 고의적인 것으로서 중국측으로 볼 때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 조지(租地) : 소작지
* 전조(轉租) : 빌린 걸 다른 사람에게 빌려줌
중국측에서는 이미 이같은 하오용더/학영덕의 음모를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며, 이는 다음과 같은 중국 국민당 길림성 당무지도위원회(黨務指導委員會)의 8월 14일자 「만보산사건조사보고」제2항에 입증이 되고 있다. 즉,
비밀정보에 의하면, 일본인은 이통하에 대수로(大水路) 17개를 만들어 연도(沿道)에 도전(稻田) 천 향으로 2천 향의 벼농사를 경영할 토지를 마련하고 한농 2~3만 명을 수용하려고 한다. 또한 남만로(南滿路)를 연장하여 마쟈샤오커/마가초구(马家哨口/馬家哨口)에 이르게 하고 큰 창고를 지어 양곡을 매수하며, 일본영사관 분관과 경찰지부를 설치하려는 음모에서 극비리에 상세한 측량을 마쳤다. 다음으로 이통하에 강둑을 쌓고 수로를 만드는 것은 그들이 의도한 공사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중국인 하오용더/학영덕으로 하여금 장농도전공사를 설립케 하였는데, 장은 장춘(张春/長春) 농은 농안(农安/農安)이란 뜻에서 장농도전공사라 부르게 되었다.
* 도전(稻田) : 논
라고 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일제는 앞으로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인의 식량을 현지에서 공급하기 위하여 장춘과 농안에까지 이르는 대규모농장을 만들려는 음모를 꾸몄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공안국측에서는 한농의 수로공사를 중지시키면서 전조계약자 중 이석창(李錫昶)註 045 등을 주동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한국인들 가운데에도 일제의 음모에 가담했던 자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註 046 그러나 역시 대다수의 한농들은 벼농사에만 이용되었던 듯하다.
한농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원조지자(原租地者)가 제3자에게 재상조(再商租)한 것으로써 규정상 제2 계약자인 한농은 중국 장춘현 정부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중국인 학영덕이 허가를 얻어 한농에게 전조해야만 될 일이었으므로 한농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아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측은 하오용더/학영덕의 원조지계약 자체도 현의 허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효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전조계약을 할 권리가 없으므로 전조계약 역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註 047 결국 만보산지역에서의 한·중 양국 농민의 충돌은 재만 한농을 위요한 중·일간의 첨예화된 토지상조권 분쟁이었다.
* 원조지자(原租地者) : 원 소작인
* 토지상조권 : 토지 사용 권리
한농들은 1931년 4월 9일과 10일, 13일 등 세 차례에 걸쳐 만보산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13일 한농 100여 명은 이통허/이통하 연안 마쟈샤오커/마가초구에 모여 이통하신(伊通河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 마을 토지묘(土地廟)에서 토지신에게도 제사를 올리고는 토지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던 바(마푸산/马夫山/馬福山 등 17호의 말)註 048, 이곳은 3구계내(區界內) 장홍빈(张鸿宾/張鴻賓) 등 12호의 땅으로 이곳에 수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5월 20일 41호의 중국인 지주와 2·3구 주민 213명이 장춘현 정부에 가서 한인들의 위와 같은 행위에 대해 호소하였고, 현정부에서는 루치/노기(鲁绮/魯綺) 공안국장으로 하여금 한농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 구축(驱逐) : 몰아내다, 쫓아내다
* 구축(驱逐) : 몰아내다, 쫓아내다
그러나 한농이 말을 듣지 않으므로 중국인들은 다시 그들의 상부 관청인 장춘시정주비처(長春市政籌備處)로 가서 청원하였다. 이에 시정주비처장 저우유핀/주옥병(周玉柄)은 다시 루치/노기 국장에게 현지에 가서 한농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루치/노기국장은 6월 2일 부하들을 인솔하고 마쟈샤오커/마가초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미 일본영사관의 명령을 받은 경찰관 나카가와 요시누마/중천의소(中川義沼), 촉탁 고교(高橋:다까하시) 등이 현장에 와서 한농을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루치/노기 국장은 한농을 체포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 농민들이 당국에 청원한 내용 중에서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하오용더/학영덕과 샤오한린/소한림 등 12명이 조지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장춘현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는 점, 둘째 수로를 불법적으로 파헤치고 이통하의 물을 막은 것과 조약과 관계없는 중국 농민들의 권리를 침범한 점, 세째 한농의 이 지역에 있어서의 경종(耕種)의 권리가 크게 개재(介在)된다는 점, 네째 일본영사관 경찰이 중국안 깊숙히까지 들어와서 농민들을 간섭함으로써 사건이 더욱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註 049
* 경종(耕種) : 땅을 갈고 파종
* 개재(介在) : 중간에 끼여 있음
6월 2일의 출동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장춘 시정주비처는 6월 3일 장춘 일본영사관에 항의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하오용더/학영덕의 계약은 무효이며, 하오용더/학영덕은 전조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므로 한농은 수로와 제방을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는 중국 농민의 정당한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며, 한농은 중국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의법(依法) 처리하여 줄 것, 중국 농민의 손실을 배상하여 줄 것 등이 그 주요 골자였다. 그리고 다시 6월 4일의 항의에서는 일본영사관 경찰이 현지에서 한농을 보호·협조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고 한농은 중국 법률을 지키지도 않고 공안국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으니 일본영사관 경찰을 즉시 철퇴시키고 이와 더불어 공사를 중지시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6월 6일자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한농이 만보산에서 수전을 경작하는 것은 계약에 의한 것이다. 모두가 빈곤하여 사경에 처해 있으므로 공사를 중지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귀처(貴處)에서 한농의 공사가 중국 농민에게 방해받지 않게끔 설득시켜 줄 것을 부탁하며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지방질서는 가히 염려할 것이 없다.
귀처(貴處) : 상대편이 사는 곳의 높임말
이처럼 쌍방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6월 2일 장춘 시정주비처장과 장춘 일본영사 사이에 한농간종도전개굴수도문제(韓農墾種稻田開掘水道問題)의 임시협정판법(臨時協定辦法)이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일 쌍방 경찰은 곧 전부 철수한다.
2. 만보산의 한농과 중국인 지주와의 분규 문제는 쌍방 파견원이 현지에 모여 조사하고, 그 문제점을 사실대로 조사한 후 공평하게 최선의 처리 방법으로 해결한다.
3. 이곳 한농은 즉시 수로를 파는 공사를 중지하는데 응하며 이통하에 물을 대는 공사도 중지한다.
4. 사건 해결 후 이곳 한농은 떠나든지 머물기로 하든지 태도를 정한다. 해결 이전에 한농들의 공사를 중지시키는 일은 장춘현 공안국에서 책임을 지고 그 현상을 고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5. 본 사건의 조사 완료 후 쌍방이 최단시일에 이 문제를 해결한다.註 050
그리고 중·일 양국은 이 합의에 따라 현지 조사단을 구성하였는데 중국측에서는 장춘 시정주비처 외교과장 궈청허/곽승후(郭承厚), 장춘현 농회총간사(長春縣農會總幹事) 우장춘(吴长春/吳長春), 장춘 공안국 독사장(督査長) 량쉐구이/양학귀(梁雪贵/梁學貴)가, 일본측에서는 주장춘 일본영사관 서기 나미야 나미헤이/생옥파평(生屋波平), 경부(警部) 나카가와 요시조?/중천의연(中川義沿), 남만철로회사 장춘지방 사무소 섭외주임 카고타니 타모쯔(笼谷保/籠谷保) 등이 그 구성 멤버였다. 조사단은 만보산의 한농간종도전(韓農墾種稻田)의 현지에서 수로와 한·중농민들의 분쟁점 등을 조사하고 6월 11일에 장춘으로 돌아왔다.
* 독사장(督査長) : 감독관
당시 중국측의 조사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조지계약(租地契約)
장농도전공사 경리 학영덕은 1931년 4월 16일 장춘현향 3구 지주 샤오한린/소한림·장홍빈·멍자오허/맹소화(孟昭和)·딩후이/정회(丁会/丁會)·루자오샨/노소선(卢昭善/盧昭善)·쟝위안헝/강원형(姜元亨)·런푸/임부(任富)·왕중푸/왕중부(王中富)·멍셴원/맹헌문(孟宪文/孟憲文)·쟝성이강성의(姜圣义/姜聖義)·류정궈/유진국(刘振国/劉振國)의 생황숙지(生荒熟地) 약 500향을 조득(租得)하였다. 조기(租期)는 10년이며 계약서 마지막 13항에 “이 계약은 현정부에서 비준한 날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만약 현정부에서 비준하지 않으면 무효이다”라고 계약되어 있으나 허가를 받지 않았다. 동시에 하오용더/학영덕은 500향을 조지계약한 후 한농 이승훈(李承勳)·이조화(李造和)·박노성(朴魯星)·이석창·서용호(徐龍浩)·김동광(金東光)·심형택(沈亨澤)·정원택(鄭元澤) 등 9명에게 경종(耕種)을 전조(轉租)하여 10년 기한으로 계약하고 장춘현 정부에 신고하지 않았다.
* 생황(生荒) : 개간되지 않은 땅
* 숙지(熟地) : 다년간 경작한 땅
* 조기(租期) : 임대기간
2. 중국 농민과 지주들이 반대한 이유
수로를 파고 이통하의 물을 끌어들여 이통하 연도의 점용한 민전(民田)은 처음부터 한농과 지주와의 계약에는 없었던 땅이다. 하오용더/학영덕은 단지 샤오한린/소한림 등 12명의 숙지(熟地) 500향을 조득하였을 뿐인데 수로연선(沿線)에 점용한 민지 약 20여 리를 함부로 파서 그 땅의 소유자인 마바오샨/마보산(马宝山/馬寶山) 외 40명의 소유권을 침범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대하여는 하오용더/학영덕 및 한농 이승훈 등과 계약시 어떤 항목의 계약도 없었다.
* 민전(民田) : 민간 소유 농지
이통하의 물을 끌어들인 수로 때문에 지주 및 농민이 입은 손해는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① 수로를 판 흙이 양쪽으로 쌓여 제방을 이루었다. 넓이는 약 7, 8장(丈), 길이는 20여 리이며 양전(良田) 손해액은 약 40향이다.
② 수호가 통과한 땅이 모두 그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개간지이다. 이 수로는 중국 농민 각 호의 개간지를 잘라서 양쪽 제방을 이루었다. 각 호는 매일 경작농구와 경작지로 가는 길을 돌아야 한다. 그러므로 농사짓는 시간과 농자금의 소비가 크다.
③ 이통하 하수(河水)로서 관개 도전(稻田)을 위하여 옛날에 수로를 막은 제방에 다시 수로를 만들어 물이 들어오는 결과가 되었고, 이통하 연안 양쪽 저지(低地)의 민지(民地) 약 2천 향은 장차 침수 피해를 입게 되었다.
④ 수로 양쪽 저지에 침수하여 반드시 침벌될 전지(田地)가 약 4, 5만 향이다.
⑤ 하오용더/학영덕은 종도전(種稻田) 구역으로 지세가 비교적 높고 물에 잠기지 않는 곳을 조지하였는데 아래의 낮은 지대 수백 향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⑥ 이통하 하류의 마쟈샤오커/마가초구는 하동(河東)·하서(河西) 내왕 공도와 관계되므로 하수(河水)로 인하여 옆에 방천의 끝이 끊어지면 수세(水勢)가 점고되어 옛날 하동과 하서의 교통은 단절된다.
⑦ 이통하는 장춘에서 농안으로 가는 길, 즉 여름철에는 항행운수(航行運輸)로서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길이므로 중간 제방이 몇자 남아 있어야 한다. 양현(兩縣) 공공 운수항로로서 방해를 받게 되어 강 근처에 사는 주민은 운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수백 호인데 그 생계의 손실이 크다.
* 항행운수(航行運輸) : 배로 운송
3. 조사결과의 의견
이상의 검토를 통해 볼 때 각 지주의 동의를 얻지 않고 협정 계약을 이용하여 수로공사를 강행하는 실로 불법적 행위를 자행하였다. 이곳 지주와 농민이 강력히 반대한 이유는 ①수로점유의 땅이 각 호(戶)의 소유권을 불법 침해하여 피해를 입힌 것, ②각 호의 농전(農田)이 수로 때문에 양쪽으로 2분되어 경작에 크게 손실을 보게 된 점, ③이통하 중류에 제방을 쌓고 막음으로써 상하 민전(民田) 수천 향이 물에 잠겨 수해를 보게 되는 점, ④이통하는 여름에 장춘과 농안 사이를 운항하는 곳이므로 중류 지역에 제방을 쌓으면 운항을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 때문이었다. 이상의 사실에 의하면, 많은 농민들의 합법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또한 공공운항교통에 있어서 두루 방해가 된다. 따라서 어느 나라 국민인들 이러한 행위를 보고 말하지 않겠느냐, 국가는 단연코 용서할 수 없다.註 051
사건의 조사가 완료된 후 1931년 6월 11일자로써 장춘 주비처장이 장춘 일본영사관에게 부조사보고건(附調査報告件)으로 공문을 발송하였으며 당일 오후에는 일본영사관에서 시정주비처장을 방문하였다. 중국측은 현지를 조사한 결과 한농의 수로계획은 중국 농민의 권리를 침범하고 그들의 전지(田地)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이를 엄중히 항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농 등이 학영덕의 땅을 조지하였으나 현청(縣廳)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그 개종조도(改種早稻)를 허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로 인한 손실은 부채인(負債人) 하오용더/학영덕에게 배상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자 일본측에서는 곧 이 제의를 거절하고 한농으로 하여금 공사를 계속시키겠다고 회답했다.
조도(早稻) : 조생벼 / 개종조도(改種早稻) ?
이런 상황에서 6월 12일에 다시 중국측은 일본측에 종전의 주장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평화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일본측은 6월 13일의 회답에서 이통하 제방공사에 의해 수재(水災)가 발생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며, 또한 교통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수로로 인해 중국 농민이 입는 손해는 한농이 당연히 상당한 배상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한농이 조지(租地)한 것에는 필요한 수속이 없다는 것도 설명했다. 즉 중개인(하오용더/학영덕)의 착오이므로 한농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공사 진행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부근 농민 전지의 지가(地價)가 상승할 뿐 아니라 그 주민들의 장래도 이로 인해 유리해진다고 앞으로의 전망을 설명하였다. 중국측은 6월 14일 길림성정부가 공포한 길림성관리도전수리장정(吉林省管理稻田水利章程) 각 조에 명시된 것을 통하여 지금 한농의 공사는 크게 위배된다고 맞섰다. 계속하여 6월 16일과 6월 17일자의註 052 왕복문서가 교환되었다.
그러나 장춘 일본영사관측에서는 중국농민과 관헌의 계속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장춘 일본영사관경찰의 보호하에 한농이 계속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점점 양측 관헌과 농민 사이에 사건의 격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1931년 7월 2일 만보산사건이 발발하기 며칠 전의 상황을 보면, 6월 26일 향2구(乡二区/鄕二區) 마쟈샤오커/마가초구 부근 한농 수 명을 중국 경찰이 체포하고 이곳 주민들이 이때까지 파놓은 수로 중 18척 정도를 파괴하였다고 장춘 일본영사관은 장춘 시정주비처에 항의 통보했다. 이에 맞서 중국측에서도 일본측이 임시협정판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두 차례에 걸쳐 항의하였다. 첫째 한농이 공사를 원상복구시켜 종전대로 완성하게 되면 중국 농민과 선호(船戶)는 장차 손해를 입게 된다. 한농의 처사를 정중히 설명하라. 그리고 이것은 실로 중국법률에 위배되므로 장차 모든 분규에서 발생되는 손실은 일본측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한농의 수로공사를 설명하고 중국 농민의 땅을 양쪽으로 분리하여 중국 농민이 부득이 메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강경히 주장한 것이다.
* 선호(船戶) : 수상 생활자
7월 2일 만보산 지역의 중국 농민 3·400명이 한국 농민이 약 2리 정도 이룩한 수로공사와 유조(柳條)로서 막은 제방을 파괴하여 토지를 원상대로 회복시켰다. 6월 12일부터 한농의 공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경찰은 중국 농민에 대하여 사격을 가하였고, 중국 농민과 주민들은 수로로 대피했다가 일단 철수했다. 오전에 중국 제3공안국 분국장(分局長) 톈시이/전석의(田锡毅/田錫毅)는 7명의 경찰을 대동하고 중국 농민을 대피시킨 뒤 귀가시켰으며 일본 경찰에 의해 이러한 사태에 당면하게 된 한·중 농민의 충돌을 방지하는 데에 대처하였는데 이날은 다행히도 쌍방의 큰 피해는 없었다.
* 유조(柳條) : 버드나무 가지
7월 2일 새벽 중국 농민이 모여 계속 수로를 매몰하려고 하자 일본측은 50여 명으로 증가된 경찰력으로 무장 시위를 벌이고 다시 편의대(便衣隊:형사) 약 10명이 마쟈샤오커/마가초구에 주둔하였다. 오후 일본영사관경찰서 경부(警部) 나카가와 요시하루/중천의치(中川義治)는 비둘기를 날려서 관동청(關東廳)에 연락 보고하고 병력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따라서 쌍방이 대치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얼마나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7월 2일 주장춘 일본영사는 장춘 시정주비처장에게 중국 주민의 불법적인 수로언지공사(水路堰止工事)의 파괴에 대한 일본 경찰의 부득이한 조치와 중국 농민에 대한 엄중 항의로 종전의 주장을 강력히 되풀이하였다.
언지(堰止) : 방죽, 둑
또한 같은 날 장춘시정주비처장은 일본 영사에게 6월 8일 쌍방의정조사해결판법(雙方議定調査解決辦法)이나 종전 주장대로 중국 농민은 지주 농민의 합법적인 권리를 침해하려는 데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부득이 정당방위의 자위수단이라고 주장하여 맞섰다.註 053
7월 1일, 2일 양일간의 한·중농민의 충돌과 양측의 항의문서의 왕래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건이 크게 취급된 까닭은 일본인들 특히 일본영사관이 이 사건을 중국동북지방에서의 대륙침략의 구실로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재만한인 동포사회의 수난이 국내에 알려지자 1927년 12월 9일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이 조직되어 거족적으로 일본정부와 중국 동북정권에 항의하였다.
또한 중·일간의 첨예화된 갈등의 한 표출로 일어난 1931년 7월 2일의 만보산사건은 그 사건의 실상과는 달리 일본의 오도(誤導)로 국내에서의 중국인 배척운동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주
註 043 「지주 샤오한린,장홍빈등 12인과 하오용더 소정조지계약(地主蕭翰林張鴻賓等十二人與郝永德所訂租地契約)」, 중국국민당중앙위원회당사사료편찬위원회(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史料編纂委員會), 『혁명문헌(革命文獻)』제33호(第33號)(타이베이/臺北 : 1970), pp.505~507.
註 044 「하오용더와 선인 이승훈 등 9인 소정전조계약(郝永德與鮮人李承薰等九人所訂轉租契約)」, 중국국민당중앙위원회당사사료편찬위원회(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史料編纂委員會), 앞 책, pp.507~509.
註 045 중국측 사료에 의하면 이석창(李錫昶)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으나 실은 한말의 경상도 의병장 신돌석(申乭石)과 함께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한 의병이었다. 항일투쟁시(抗日鬪爭時) 부상을 입어 한쪽 팔을 쓰지 못하였고, 의병활동(義兵活動)으로 인해 국내에 거주할 수 없어 만주(滿洲)로 망명한 행적으로 보아 그 당시에도 일제에 협조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심형택沈亨澤과 1975년 4월 6일 서울역 그릴에서 대담. 또한 1973년 12월 20일 이석창(李錫昶)의 인척인 조규철(曺圭喆)과의 대담에서도 확인되었다.)
註 046 『상해신문보(上海新聞報)』, 1931년 7월 18일자.
註 047 중국국민당중앙위원회당사사료편찬위원회(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史料編纂委員會), 앞 책, pp.483~495.
註 048 『텐진대공보(天津大公報)』, 1931년 8월 19일자.
註 049 구웨이쥔(顧維釣), 『중국현대사료총서(中國現代史料叢書)』제3집(第三輯), p.16.
註 050 『상해신간보(上海新聞報)』, 1931년 7월 19일자.
註 051 중국국민당중앙집행선전위원회 편(中國國民黨中央執行宣傳委員會編), 『만보산사건급조선배화참안(萬寶山事件及朝鮮排華慘案)』(난징/南京 : 1932), pp.210~214.
註 052 주 47)과 같음.
註 053 중국국민당중앙위원회당사사료편찬위원회(中國國民黨中央委員會黨史史料編纂委員會), 앞 책, pp.53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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