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10915011
충남 당진에서 한성백제군의 부대 막사 확인…고구려와의 전쟁 위한 군사기지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입력 : 2019.08.01 09:15 수정 : 2019.08.01 09:15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 내부의 주거지. 성벽에 붙여 열을 지어 조성된 이 주거지는 한성백제 병사들의 막사로 추정된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에서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한성백제군 군사기지의 막사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됐다. 지난 4월부터 산성을 정밀조사 중인 금강문화유산연구원은 “성 내부에서 총 6기의 주거지가 성벽과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면서 “유구의 형태로 보아 군사들의 거주용 막사인 군막일 가능성이 짙다”고 1일 밝혔다. 길이 239m에 이르는 성벽은 해발 67m의 야상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성벽은 야산의 자연경사면 위에 흙과 잡석을 켜켜이 쌓아 축조한 테뫼식(산 정상부를 둘러서 쌓은) 산성이다.
성산리 산성의 성벽 단면. 5열 정도의 나무기둥을 110㎝ 정도의 간격으로 박아 고정시킨 뒤 그 사이를 적갈색 점토로 다져 쌓은 기법으로 축조했다.|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성벽의 규모는 높이 5.3m 정도에 너비는 약 14m이다. 5열 정도의 나무기둥을 110㎝ 정도의 간격으로 박아 고정시킨 뒤 그 사이를 적갈색 점토로 다져 쌓은 기법으로 축조했다. 이렇게 주변의 흙을 이용해서 일정 높이까지 쌓아올린 다음 마감 높이에서 두들겨 일정한 성벽의 형태를 유지하는 축조기법을 ‘성토(盛土)기법’이라 한다.
이들 건물의 평면은 대부분 네모꼴이었지만 그 중 1기는 한성백제 주거지의 전형적인 형태인 철(凸)자형이었다. 이들 건물지들은 암반 위에 조성됐고, 성벽에 매우 가깝게 붙여 열을 지어 있었다. 또한 구들시설을 구축해서 계절에 관계없이 취사와 난방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의 이인호 연구원은 “굳이 축조하기 어려운 암반 위에 사철 난방과 취사가 가능한 건물을 열을 지어 축조했다”면서 “성벽에 붙여 조성한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이 건물들은 군막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라고 해석했다.
추정 군막에서 춡토된 세발달린 그릇과 굽다리 접시, 계란모양 토기, 시루, 가락바퀴 등의 유물들. 취사를 비롯한 생활용품들이다. 백제병사들을 위한 군납용품이었을 것이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추정 군막에서는 세발달린 그릇(삼족기·三足器)와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계란모양(장란형·長卵形) 토기, 시루, 실을 뽑을 때 사용한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등 취사 및 생활용 토기와 쇠도끼 등 200여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이인호 연구원은 “출토 유물로 미루어볼 때 한성백제 시기(기원전 18~기원후 495) 중에서도 4세기 후반의 유적으로 편년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 유물들은 한성백제 군인들을 위한 ‘군납 용품’이라 할 수 있다.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이면 근초고왕(재위 346~375)과 그 아들인 근구수왕(375~384), 손자인 침류왕(384~385)·진사왕(385~392)과 아신왕(392~405), 전지왕(405~420) 시대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가 바로 백제였다. 고구려 고국원왕(331~371)을 죽였고, 마한 소국을 차례로 접수해서 영역을 영산강 유역까지 넓혔으며, 중국측 사료(<송서>와 <양서>)에 따르면 요서 지방까지 차지했던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백제는 396년(아신왕 5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공격을 받아 58성 700촌을 빼앗기는 등 국력을 잃어버린다.
한성백제 시대 군사기지로 추정되는 충남 당진 성산리 산성의 원경.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과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쌓은 해안방어기지일 가능성이 있다. |금강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그렇다면 최전성기를 구가하다가 국력이 꺾인 이 시기에 충남 당진에 축조한 이 산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원래는 당진 성산리 산성이 마한 소국을 병합하여 한성백제의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구축한 최전방 전초기지였다는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이면 당진은 이미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당진은 안성천을 통해 경기 남부로, 삽교천과 곡교천을 통해 호서지방으로 연결되는 해상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아산만 초입에 조성된 성산리 산성은 한성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의 치열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전략적인 요충지에 축조한 해안 방어기지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와함께 성벽 안의 한성백제 군사기지와 지난 2011년 당진 석문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발굴에서 확인된 집자리 36기의 상관관계 또한 주목된다. 이인호 연구원은 “석문단지의 집자리가 성산리 산성 안에 주둔한 군대와 관련된 민가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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