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50_0040_0020_0020_0020 

 
(2) 한국독립군의 해체와 주도세력의 관내 이동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2) 한국독립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한국독립군은 우이청/오의성 휘하의 차이스롱/시세영·시종헝/사충항(史忠恒) 등의 부대, 중국공산당 계통의 훈춘/혼춘(珲春/琿春)·왕칭/왕청(汪淸)유격대, 한인부대와 연합하여 중·소국경지대의 둥닝/동녕현성을 공격하였다. 이 연합부대는 1933년 9월 6일 밤 이 성을 포위, 공략하여 거의 점령했으나, 만주국군과 일본군 연합부대가 대포와 장갑차 등 중화기를 동원한 격렬한 반격으로 한중연합군은 결국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710) 한중연합군은 많은 적을 무찔렀지만 결국 패주하게 되었고, 적은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계속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구국군 부대장 사충항이 부상당하는 등 중국군의 피해도 컸고, 한국독립군도 총사령 이청천이 부상당하고 군의관 강진해(姜振海) 등 수십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711)
 
둥닝/동녕현성 전투 이후 한국독립군은 이들 부대와 함께 다뎬즈/대전자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이 때 참모장 저우바오중/주보중은 천한장/진한장(陈翰章/陳翰章) 등 다수의 중국공산당원과 함께 구국군 부대의 공산화와 통일전선공작을 진행시키고 있었다.712) 또 유격대에는 다수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독립군은 차츰 이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주보중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오의성 부대내에서 고립되어 갔다. 여기에 연변지방 한인들의 다수가 좌경화하여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같은 해 8월 초 우이청/오의성 등은 한국독립군에 대해 구국군에 합류·편성될 것과 무기의 절반 이상을 넘기라는 무리한 요구를 몇 차례나 강요하였다.713) 이러한 요구는 다뎬즈/대전자령 전투 이후 전리품 분배시 발생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였다. 물론 이러한 요구는 거부되었다. 더욱이 저우바오중/주보중과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한국독립군 장병들이 1932년 2월 롱징/용정(龙井/龍井)에서 성립한 친일반공단체 민생단(民生團)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음해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몇 가지 요인으로 오의성은 산하 부대를 동원하여 한국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을 해제하며, 상당수의 장교와 사병들을 무고하게 구금하는 사태를 일으켰다.714) 이른바 ‘민생단 사건’은 후일 중국공산당계 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에 적극 가입하여 투쟁하고 있던 다수의 한인들에게 ‘일제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한·중 양 민족 사이는 물론 서로 믿고 지내던 동지간에도 분열과 의심을 조장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715) 이무렵 동만지역에서는 이미 유격대 안에서 소위 ‘반민생단(反民生團)’ 투쟁이 전개되어 무고한 한인들이 다수 희생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여파가 한국독립군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 같은 위기는 시세영 등 일부 간부들의 변호와 독립군측의 항의로 가까스로 극복되었으나, 한국독립군이 중국의용군과 결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구국군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다수의 장병이 흩어지거나 도주한 데다가, 구국군에 대한 반감이 깊어져 더 이상의 공동투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독립군은 8월 12일 경 그곳을 떠나 이후 동녕과 영안현 등 산악지대를 전전했다. 또 이무렵 간부회의를 열고 소규모 유격작전 위주로 적과 싸우며, 열악한 생존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병사들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716)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전략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한국독립군이 이처럼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관내에 있던 김구(金九)와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金元鳳) 등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협조로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교육을 받게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전쟁에 대비한 정예간부를 양성코자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정부는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낙양(洛阳/洛陽)분교에 ‘한국청년군사간부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의 주요 간부들과 청년들을 관내로 이동시켜 교육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이청천이 교관겸 책임자로 선정되었다.717)
 
김구는 일찍부터 만주지역 독립군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윤봉길·이봉창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정부 요인들의 신임과 지원을 받고 있던 김구로서는 만주 독립군 요원들을 관내로 이동시켜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무장투쟁의 기반과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반임시정부 계열에서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718) 김구의 군사훈련계획은 1933년 10월 초순 이규보·오광선 등을 통해 한국독립군에 전해졌다. 이에 따라 10월 20일 경 마침내 한국독립당 당수 홍진 및 총사령 이청천, 조경한·오광선·공진원(公震遠)(본명 고운기/高雲起)·金昌煥 등 한국독립군 주요 간부들과 병사 가운데서 선발된 군관학교 입학지원자 등 40여 명은 중간거점인 베이징(北京)을 거쳐 중국관내로 먼저 이동하게 되었다.719) 이들 중 홍진·이청천·조경한 등 일부 간부는 관내 이동 초기에는 조선혁명당과 민족혁명당 등 반임시정부 및 반(反)김구 계열에서 활동했으나, 나중에는 결국 통합 한국독립당 및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 때 이동한 34명의 청년들은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이 해 12월에 입학하여 1935년 4월 졸업하였다.720) 관내지역 이동 직후 이들은 김구 계열과 이청천 계열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721) 그러나 이들도 이후 조직된 조선의용대나 광복군에 참여하여 만주독립군의 무장투쟁론을 계승·발전시키며 관내지역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사령관 등 주요 성원들이 만주를 떠나게 되자 사실상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최악(崔岳)과 안태진(安泰振) 등이 거느리는 일부 지대가 미샨/밀산(密山)·후린/호림(虎林) 등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며 항전을 지속했지만 이들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큰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다. 이들은 얼마 후에 적과 싸우다 희생되거나 흩어져 버렸고, 일부 인사들은 중국공산당 계열의 유격대나 동북인민혁명군 등에 참가하여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1932∼1933년 북만과 동만 일대에서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었던 한국독립군이 해체됨으로써 북만주 지역 민족주의계열 독립군의 활동은 끝나고, 대신 적지 않은 한인들이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이 영도하는 항일부대에 참가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710) 김동화(金東和) 외 편저(編著),≪연변당사 사건과 인물≫(연길:연변인민출판사), 144∼145쪽.
흑룡강성사회과학원(黑龍江省社會科學院) 지방당사연구소(地方黨史硏究所)·동북열사기념관 편(東北烈士紀念館 編),≪동북항일열사전(東北抗日烈士傳)≫2(하얼빈/哈爾濱:헤이롱장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1), 72∼73쪽.
 
711) 조경한(趙擎韓), 앞의 책(1979), 212쪽.
712) 흑룡강성사회과학원(黑龍江省社會科學院) 지방당사연구소(地方黨史硏究所)·동북열사기념관 편(東北烈士紀念館 編), 앞의 책, 86쪽.
 
713) 지헌모(池憲模),≪청천장군(靑天將軍)의 혁명투쟁사(革命鬪爭史)≫(삼성출판사, 1949), 150∼151쪽.
 
714) 조경한(趙擎韓), 앞의 글(1934), 72∼73쪽.
715) 민생단 사건에 대해서는 김성호(金成鎬),≪1930년대 연변(延邊) 민생단사건 연구≫(백산자료원, 1999) 참조.
 
716) 조경한(趙擎韓), 앞의 글(1934), 74쪽.
717) 조경한(趙擎韓), 앞의 책(1979), 210·217쪽.
 
718) 한상도,<재만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관내지역 이동>(≪한국독립운동과 국제환경≫, 한울아카데미, 2000), 156·170쪽.
 
719) 김구,≪백범일지≫(서문당, 1989), 309쪽.
신숙,≪나의 일생(一生)≫(일신사/日新社, 1963), 124∼125쪽.
한상도, 위의 글, 168쪽.
 
720) 후춘훼이(胡春惠)·신승하(辛勝夏) 역(譯),≪중국(中國)안의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단국대출판부, 1978), 52쪽.
 
721) 이청천과 김구의 갈등은 1934년 8월 김구가 자파계열의 입교생을 한인특별반에서 퇴교시킴으로써 파국을 초래하고 말았다. 김구는 난징(南京)지역의 다수 한인 민족운동가들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거쳐 유력한 독립운동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을 가시화하고 있는데 대한 반발로 해석할 수 있다(한상도, 앞의 글, 162쪽).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한국독립군 세력은 물론 김학규와 최동오 등 조선혁명당·군 출신 인사들도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직후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되고 있던 통합정당 ‘민족혁명당’에 가담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만주 독립군 세력이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직후부터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기존의 통설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관내지역에 이동한 뒤 다양한 행태를 보였지만, 그중 다수는 관내 민족운동 세력, 혹은 중국 관민과 연계하여 만주 지역의 무장투쟁을 지원·활성화하려는 “운동기반 확충과 기회포착”의 논리를 유지했다고 추측된다(한상도, 앞의 글, 163쪽 및 신주백, 앞의 책, 332∼333쪽). 또한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上海)를 떠나 유랑하다가 1939년 총칭(重庆/重慶)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김구 역시 1932년 6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를 이탈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구 개인차원에서 중국의 도움을 받아 운영한 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나 ‘한인특무독립군’ 조직을 곧바로 임시정부 조직과 관련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도진순 주해,≪백범일지≫, 돌베개, 1997, 465∼466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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