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3·1 독립운동과 무장독립 단체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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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북만에서는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키 위한 하나의 무장독립단이 조직되었다. 서일이 중광단(重光團)을 만들어 왕칭/왕청(汪淸)현에 본영을 두고 의병과 무관학교 출신의 유능한 군사간부를 규합한 것이다. 초기에는 무기가 없어 군사활동은 하지 못하고 정신교육에 치중하였으나 점차 무비를 갖추면서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 중광단은 대종교인이 많이 참가하여 민족정신이 투철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 무비 : 군사에 관련된 장비. 또는 그 장비를 준비하는 일.
 
이와 같이 만주에서는 부민단이나 중광단과 같은 조직이 이루어져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무장독립운동을 지도·후원하고 있었다. 한편 도만(渡滿)해 온 의병부대들은 군비면에서 점차 보완되고 정예화가 이루어졌으며 체제면에서 조직화된 부대로 편성되어 의욕적인 독립전쟁을 시도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만주와 노령의 항일독립전쟁은 생기를 더하게 되었다. 대전 중에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가 독립을 선언하게 되자 이에 자극되었던 것이다.
 
오인(吾人)은 의당(宜當) 시기(時期)의 도래(到來)를 고대(苦待)한다. 기천백년(幾千百年)을 경과(經過)할지라도 결코 조국(祖國) 부흥(復興)의 정신(精神)을 포기할 수 없다. 첵코를 따르자.註 050
고 외치며 독립의 그날이 멀지 않았다고 확언하였다.
* 의당(宜當) : 마땅히, 으레
 
노령과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은 특히 러시아의 과격파와 연결하여 그들의 원조에 기대를 걸었다. 한편 중국인들과도 공동전선을 펴기도 하여 1915년에 장종휘(張宗輝)에 의하여 간도 쥐즈지에/국자가에 만들어진 만국개량회(萬國改良會)에 많은 지도자가 참가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저명한 사람은 이동휘, 정재면, 권사용(權思容), 유기연(柳基淵), 유찬희(柳儹熙), 하희옥(河熙玉), 정안립(鄭安立), 최빈(崔斌), 유흥윤(柳興允) 등 이었다.註 051
 
이와 같이 만주에서는 “대한독립을 모의하려는 일 이외에는 사회도 없고, 교육도 없고, 종교도 없다”註 052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귀일되고 있었다.
* 귀일 : 한군데로 돌아감
 
재만한인에 의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진행되고 국내의 의병활동이 만주로 연장되어 독립군으로 개편되고 있는 동안 국내외 정세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에서는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도에 달하여 항일의식이 팽만하였고 국내에서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약소민족해방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식민지화 10년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면서 실지회복을 고대하며 참았던 민족적 저항의식은 3·1독립운동으로 폭발하였다. 주객관적인 상황의 성숙으로 우리 민족은 드디어 분기, 만주에서는 대한(大韓)독립선언으로, 도코(東京)에서는 2·8독립선언으로, 국내에서는 3·1 독립운동으로 구체화되어 민족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3·1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이요, 국외에서도 다함께 호응하여 참가한 일대 민족운동이었다. 특히 만주의 경우는 3·1 독립운동에 선행한 대한독립선언도 있었고, 해외독립운동기지 가운데에서는 제일 기반이 튼튼하였으므로 독립선언과 독립축하회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만주 전역에서 활발한 독립축하회가 열리게 되자 그동안 잠재됐던 민족의식을 고조시키고 민족역량을 결합시키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한인 지도자들은 희생에 비하여 성과가 적었다는 것과 그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과연 쟁취할 수 있을까 하는 데 회의를 품게 되었다. 더구나 일제의 군사적 동원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에서 계획된 시위일망정 더 이상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한편 해외독립운동자들이 한결같이 일루의 희망을 걸고 고대하였던 약소민족의 해방기운이나 파리강화회의가 열강의 패권 다툼이라는 국제적 이해 속에서 우리 민족에게는 기대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남은 길은 무력투쟁 뿐이란 결론에 도달하였다. 물론 무력을 통한 대일전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 막대한 희생이 지불될 것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최후의 성패를 판가름할 최선의 수단이었고, 독립선언 이후의 고조된 분위가 속에서 귀착될 당연한 추세였다.
* 일루 : 한 오리의 실. 몹시 미약하거나 불확실하게 유지되는 상태
 
그로부터 독립운동은 시위운동의 단계를 지나 완연히 무력단계로 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진전은 독립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뒤에 행하기로 했던 사전계획이기도 하다. 따라서 재만한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력항전은 당초부터 항일독립운동선상에 설정·계획되었던 것으로 항일구국독립운동의 중심 형태였고 최종단계의 투쟁방법이었다.
 
배일의 온상지였던 사립학교에서는 내일의 독립 혈전에 대비하여 청소년들에게 신백(身魄)을 고결하게 하고 지기를 용감히 하고 체력을 건전히 하는 등 병식체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 신백(身魄) : 신체와 정신
* 지기 : 의지와 기개
* 병식체조 : 대식으로 하는 체조.
 
이러한 무력항쟁의 사상적 배경은 바로 의병정신이며, 대한독립선언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궐기(蹶起)하라! 일제히 독립군(獨立軍)이여, 한번 죽음은 사람으로서 면(免)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 같은 일생(一生)을 누가 구차하게 원할 것인가. 살신성인(殺身成仁)하면 이천만(二千萬) 동포(同胞)는 국체(國體)를 부활(復活)할지라 일신(一身)을 어찌 아끼리오 …… 일체(一切)의 사망(邪網)으로부터 해방(解放)하는 건국(建國)임을 확신(確信)하며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서 독립(獨立)을 완성(完成)할지어다.註 053
 
또한 1919년 3월 17일에 조직된 만주·노령의 대한국민의회도 그 결의문에서 한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과 일본 통치가 철폐되지 않으면 일본에 대하여 영구한 혈전을 선포한다고 하였다.註 054 이러한 주장은 동 의회의 독립선언서에도 밝혀져 같은 달 20일에 훈춘/혼춘 독립집회에서도 발표되었다. 또 1919년 4월 재대륙대한독립단임시위원회(在大陸大韓獨立團臨時委員會)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에서도 일제가 살육을 계속하면 자유행동 즉 혈전 등의 방법을 불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선언은 독립운동의 방법제시이며 만주가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임을 명기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단체가 조직되어 만주는 한인독립군의 기지화하였다. 북간도지방의 무장독립운동단체와 독립군의 조직 및 활동 상태에 대하여 일제의 경무국 기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치적 동기에 근거하여 이주한 선인은 점차 각 소재지에 유력한 단체를 조직하고 병영을 세우고 무기를 구비하고 대원을 양성하여 조련을 행하며 백주에 대를 꾸며 각지에 횡행 활보하고 때때로 조선 내지에 대하여 무력침습을 꾀하고 혹은 군자금모집을 위하여 양민을 납치하는 것과 같은 불령행등(不逞行動)을 하고 있는데……註 055
* 불령(不逞) : 원한, 불만, 불평 따위를 품고서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함. 또는 그런 사람.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上海)에 수립되고 만주지역이 군사적 기능을 실질적으로 담당하게 되자 그 중요성이 더해 갔다. 많은 단체들은 초기의 분산성을 지양하고 임시정부 권력 하에 통합되어 감으로써 독립군은 사병이 아니라 정부의 정규군화되어 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군사문제에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만주독립단에 대한 조정을 시작하였는데 필연적인 독립전쟁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외국민에게 독립전쟁에 대한 각오와 군사행동에 대한 노력을 당부하였고 끝내는 장기전쟁계획이 시정방침으로 발표되었다.註 056
 
이러한 임정의 시정방침은 만주의 독립전쟁과 같은 이상을 가진 것으로 의용병 모집과 훈련·작전계획·군수 등에 걸친 치밀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만주의 한인 독립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적 임무를 담당한 국군으로서 국내의 한인의 여망을 받게 되었다. 북간도지방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인독립운동에 대하여 일제의 한 보고는
 
간도는 재외 불령선인단 전세력의 집중처로서 동지에서의 각 불령단의 무력은 곧 조선독립 표방자가 갖고 있는 위력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상해가정부와 같은 것도 간도에서의 무력단체를 배경으로 하는 고로 점차 그 존재를 인정케 되었고, 또 조선 내지에 있어서의 무식한 무리들은 간도 무력단의 세력을 과신함으로서 독립의 가능성을 믿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간도에 있어서의 불령선인단은 선내의 치안유지상 극히 중시해야 하므로……註 057
* 가정부(假政府) : 국제법 차원에서 적법한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사실상의 정부.
 
라고 지극히 근사(近似)한 지적을 하고 있다.
 
1919년의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그 전후 약 1년간에 만주와 노령에서는 한인들의 독립운동기관 특히 무장독립단이 속출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단이 조직된 것은 독립자주의 의지가 높았던 데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한인사희의 성장과 독립운동기지 조성을 위한 지도자들의 노력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고 외적으로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있었다. 만주에서 1년간에 약 50개 내지 100개 단체가 조직된 것으로 현재 조사 되어 있다.註 058 그러나 이 수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각 단체들의 이합소장(離合消長)이 빈번하고 확실한 조사통계가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아주 희귀한 우리측 사료와 일제 당국의 조사보고서, 군경기밀문서를 통하여 종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소장(消長) : 쇠하여 사라짐과 성하여 자라남.
 
현재까지 조사된 단체들을 서북 간도로 나누어 보면, 서간도에 한족회(韓族會),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광한단(光韓團), 태극단(太極團), 폭동단(暴動團), 대진단(大震團),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향약단, 중흥단(中興團), 충의사 보합단(普合團), 흥업단(興業團), 농무계(農務稧), 의군강습소(義軍講習所), 창흥상회(昌興商會), 대한독립총지단(大韓獨立總支團), 친목회 등이고, 북간도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의군단(義軍團), 의군부(義軍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야단(野團), 도독부(都督府), 애국청년혈성단(愛國靑年血誠團),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신대한청년단(新大韓靑年團), 복황단(復皇團) 창의단(倡義團), 급진단(急進團), 청년맹호단(靑年猛虎團), 보황단(保皇團), 학생광복단(學生光復團), 충렬대(忠烈隊), 조선국민의사회(朝鮮國民議事會), 건국회(建國會), 자위단(自衛團), 자유공단(自由公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중앙보약단(中央保約團) 등이 조직되었다.
 
만주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각별한 관심을 끌게하는 땅이다. 현재도 200만에 가까운 우리 동포가 중국속의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이글에서는 한인의 만주 이민이 일본의 한국침략과 망국으로 주권을 상실함에 기인함과 재만한인은 망국의 노예보다 만주를 신천지로 믿고 이주한 정치적 실향민임을 살펴 보았다. 이들은 기한과 고통속에서 개간을 하였고 중국인 지주의 압박속에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과 착취가 심하면 심할수록 이주자가 증가하여 1910년대말에는 45만명으로 늘어났다. 정치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이주민들이었으므로 반일의식은 높았고 자손들에 대한 교육열도 생활의 안정과 함께 높아 갔다.
 
이러한 배경과 기반위에 애국지사들은 자주독립정신을 부식했고 교육을 통하여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들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만주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설정 국내진공의 전진기지로 만들려했다. 이 계획은 신민회간부들에 의하여 국내에서 극비리에 논의 결정을 본 것으로 뤼허/유하현 산위엔푸/삼원포가 후보지였다. 또 척사유림의 의병장도 백두산 중심의 근거지론을 제기하였고 이를 실천하려고 입만(入滿)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척사와 개화사상의 맥을 계승한 두 계통의 만주독립운동기지화의 주장은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보겠다.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도 국내활동의 연장으로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의 이대조류가 주축을 이루었었다.
* 부식(扶植) : 초목을 뿌리를 박아 심음. 힘이나 영향을 미치어 사상이나 세력 따위를 뿌리박게 함.
 
1910년부터 만주는 한국독립운동의 기지로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만주리아지방총회와 하얼빈/하르빈, 스토허즈/석두하자, 헝다오촨즈/횡도천자, 무링/목림, 하이라얼/해랍이, 삼성지방회가 동북만 전역에 걸쳐 그 조직을 하였고 대한인공제회, 대한기독청년회, 신한국민회, 창의소, 둔전영, 급당, 민권당, 일심계, 노동회 등이 배일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금조성과 비밀망을 위하여 ‘신성호’나 ‘해도호’와 같은 비밀조직이 표면으로 상호를 내걸고 암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시영·이동영·박무림·이원식·김약연 등은 교육활동을 하였고 홍범도·차도선·채응언·조상갑·박만홍·현덕승 등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대일전을 전개하였다. 또 이들 지도자들은 전기한 제단체의 조직에 참여하고 있어 독립운동기지화는 급속히 확산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의 노선은 무력투쟁과 같은 독립전쟁의 방향으로 주도되어 갔고 한중공동전선의 경향도 나타났다. 특히 간민교육회나 신한국민회는 새로운 한국 즉 신한국을 창건할 것을 주장하여 민족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였다.
 
경학사·신흥강습소·부민단·중광단·서전서숙·명동서숙을 비롯한 새로운 많은 조직이 1910년부터 본격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배일단체의 활동과 민족교육 그리고 의병전쟁은 국내 항일운동의 국외 연장이며 독립운동 근거지론의 실천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1910년대 초기 만주의 항일독립운동단체와 의병활동은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어 3·1독립운동을 계기로 독립군의 출현과 활동으로 계승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註 050 경상북도경찰부(慶尙北道警察部),『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1934).
註 051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앞 책, p.882.
註 052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독립신문(獨立新聞)』, 1920년(年) 1월(月) 10일자(日字).
 
註 053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재간도(在間島) 스에마쓰 요시지?요시쓰쿠? 경시 보고(末松吉次警視 報告), 다이쇼(大正) 8년(年) 5월(月) 8일(日) 신문계역(新聞係譯).
 
註 054 「조선민족운동연가(朝鮮民族運動年鑑)」, 1919년(年) 3월(月) 17일(日),『재미한인오십년사(在美韓人五十年史)』및 「대한민국의회독립선언서(大韓國民議會獨立宣言書)」참조.
 
註 055 (비/秘)「간도에서의 불령선인단의 상황(間島ニ於ケル不逞鮮人團ノ狀況)」, 다이쇼(大正) 9년(年) 10월(月),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註 056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 기사록(記事錄) 제4회집(第四回集), 1919년(年) 5월(月) 12일(日)과 1919년(年) 7월(月) 8일(日)의「정부시정방침 연설(政府施政方針 演說)」과 1920년(年) 3월(月) 2일(日)의「정부시행방침(政府施政方針)」참조.
 
註 057 (비/秘)「간도에서의 불령선인단의 상황(間島ニ於ケル不逞鮮人團ノ狀況)」, 다이쇼(大正) 9년(年) 10월(月),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註 058 오세창(吳世昌), 앞 글, 여기에서 48개 단체를 조사 발표한 바 있는데 1988년 4월에 발표한 동제목(同題目)의 논문에서는 98개 단체(團體)를 조사하여 발표하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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