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독립군단의 편성과 그 조직"에서 "(1) 지역별 편성상황"과 "(2) 독립군단의 조직"을 제외한 앞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1) 독립군단의 편성과 그 조직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2. 독립군의 편성과 국내작전  > 1) 독립군단의 편성과 그 조직 
 
 
한말의 항일 의병항전은 민족적인 의식면에 있어서나 형태면에 있어서 이후의 항일독립운동에 위대한 전통을 유산으로 물려 주게 되었다.
 
이러한 항전의식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받아 일제의 한국 강점 후 만 주·노령에서의 항일무장독립군의 활동은 해외 독립운동 가운데 가장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1910년의 일제의 한국강점을 계기로 이전의 항일운동을 의병운동이라 하고, 이후의 항일운동을 독립운동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일제에게 강점당한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항일의병항전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인 1914년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5년에 항일의병들은 활동근거지를 만주·노령으로 이동하게 된다. 말하자면 1910년으로부터 1914년에 이르는 5년간은 항일의병항전과 독립군의 항전이 공존한 일종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항일의병항전에서 항일무장독립군항전으로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항일독립군이라는 개념이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1915년 이후의 일이다.
* 노령 : 러시아령
 
그리고 이해로부터 1919년 3·1운동까지를 준비기로 보고, 1920년대를 본격적인 항일무장독립군의 항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음은 3·1운동 후 만주·노령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항일무장독립군단이 형성되어 갔는가를 살피기에 앞서 먼저 그곳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가능케 한 배경 즉 조건들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노령 각지에서 항일무장군단이 편성될 수 있었던 배경 즉 조건으로는 대체로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1.
첫째로 들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국내에서 항일의병항전의 풍부한 경험을 쌓은 노련한 많은 항일의 병장과 의병들이 이곳으로 집결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한말의 항일의병항전은 1909년의 호남의병들의 대항전(소위 일제의 ‘남한대토벌’)을 마지막으로 의병들의 항전은 점차 한반도 중·북부로 이동하여 1914년에는 독립군의 기지인 만주·노령으로 완전히 이동해 들어가게 되었다.
 
충북(忠北)의 유생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일찍 부터 ‘북천지계(北遷之計)’를 세워 먼저 많은 부하 의병들을 거느리고 만주(滿洲)의 통화(通化)·지안/즙안(辑安/輯安)현으로 들어가 독립군기지의 터전을 닦고 있었다. 그 후 살아 남은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의 의병들도 이곳으로 이동해 들어 가고 또 황해도(黃海道) 의병장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박장호(朴長浩) 등도 국내에서 항일전을 계속하다가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1913년을 전후하여 동만주 창바이/장백(长白/長白)·푸순/무순(抚顺/撫順)·지안/즙안(辑安/輯安)·린장/임강(临江/臨江)현 일대로 이동해 들어 갔다.
* 북천지계(北遷之計) : 호서·관동지방에서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또 관군의 군세가 강하여 중부지방에서 싸우기가 불리하니 인민의 기질이 강건하고 용맹하며 무예에 능한 사람이 많은 서북지방으로 옮겨가서 의병운동을 계속하자는 임기응변적 전술을 말한다. 
 
또한 명포수의 평민 의병장으로 일본군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 그 이름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홍범도(洪範圖)도 많은 부하 의병을 거느리고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 기지의 터전을 닦아가면서 때때로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었다.
 
또한 평안(平安)도의 의병장 조병준(趙秉準)·김덕원(金德元) 등도 많은 부하 의병을 거느리고 만주 콴뎬/관전(宽甸/寬甸)·환런/환인(桓仁)현으로 들어가 독립군 기지의 터전을 닦고 있었다. 이외에도 국내 항일의병항전에서 살아남은 많은 의병들이 만주·노령으로 이동해 들어갔다.註 001

 

 
2.
항일무장독립군단 편성의 둘째의 배경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많은 애국지사들의 이곳으로의 망명이다. 그들의 투철한 구국항일정신과 희생적인 재정적 뒷받침은 이곳에서의 항일무장독립군단 탄생의 산모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애국지사 가운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은 신민회(新民會)의 회원들이었다. 이들 신민회 회원들은 1909년의 비밀회의에서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설정하고, 그곳에 군관학교를 창설하여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냄으로써 장차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러한 계획 아래 먼저, 이철영(李哲榮)·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와 이동녕(李東寧)·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윤기섭(尹琦燮)·주진수(朱鎭洙) 등은 그 자금을 마련하여 1911년에 만주 펑톈/봉천성 뤼허/유하(柳河)현 산위엔바오/삼원보(三源堡)로 이주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이해 이곳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창설하고 뒤이어 1913년에는 지린/길림(吉林)성 왕칭/왕청(汪淸)현 나자구 대전자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 일명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와 미샨/밀산(密山)현 펑미샨즈/봉밀산자(蜂密山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註 002
 
이와 같이 출발한 신흥무관학교에서는 1920년 8월까지 2천수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註 003 이들은 졸업 후에도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여 독립 쟁취를 위해 단결하였다. 이들이 또한 만주로 이동한 항일의병들과 손을 잡고 항일무장독립군단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3.
셋째의 항일 독립군단 형성의 배경으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출신 한국인 장교들의 항일무장 독립군진영으로의 가담이다. 즉 노백린(盧伯麟 ; 일본육사 11기생/日本陸士 11期生)·임재덕(林在德 ; 동상/同上)·김의선(金義善 ; 동상/同上)·이갑(李甲 ; 동상/同上)·김광서(金光瑞 ; 일본육사 23기생/日本陸士 23期生)·이청천(李靑天 ; 일본육사 26기생/日本陸士 26期生)·이종혁(李鍾赫 ; 일본육사 27기생/曰本陸士 27期生) 등은 대 개 1907년으로부터 1919년에 걸쳐 해외(만주·노령·중국)로 망명하여 항일 무장 독립군진영으로 가담하였다.註 004 
* 동상(同上) : 위에 적힌 사실(事實)과 똑같음.
 
이들 가운데 이청천·김경천(金擎天 ; 金光瑞)과 구한국 무관출신인 신동천(申東天 ; 신팔균/申八均)은 당시 만주 의 독립군 사이에 ‘동만주의 삼천(三天)’이라고 하여 추앙된 인물이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註 005 이들의 독립군진영으로의 가담이 당시 항일독립전선에 얼마나 고무적이었던가 하는 것은
 
한적(韓籍) 일본장교(日本將校)가 혁명진영(革命陣營)에 가담하여 왔다함은 혁명진영에 큰 힘을 주고 특히 청년(靑年)들에게 다대한 감명을 주어 신흥학교(新興學校)에 입학지원자(入學志願者)는 일증(日增)하여 갔다.註 006
* 한적(韓籍) : 한국 국적
* 일증(日增) : 나날이 늘어감
 
라고 한 사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들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습득한 근대전술은 이제 이들이 무관학교 교관으로 등장함으로써, 무관학교를 통하여 독립군 간부들에게 보급되어 항일전술의 질을 높이고 또 항전에 자신을 가져오게 하여 항일무장독립군단 형성의 커다란 힘이 되었다.
 
 
4.
네째의 항일무장독립군단 형성의 큰 배경으로는 그들의 활약 기반으로 이곳으로의 한국 이민의 증가와 그곳에서 실시된 항일민족교육을 들 수 있다.
 
3·1운동 당시 만주·노령의 한국이주민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 당시 만주의 한국 이주민의 수는 27만 7천 781명이고 노령 연해주의 수는 13만 3천 7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註 007 그러나 실제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연대가 훨씬 내려가기는 하나 만주괴뢰정부가 수립되던 1932년의 해외 한국인의 수를 일제는 만주에 65만 6천 341명(관동주/關東州를 포함) 노령 연해주에 19만 4천 249명 중국 본토에 3천 582명으로 잡고, 또 만주 내의 분포를〈도 1〉과 같이 표시해 놓고 있다.註 008

〈도 1〉 만주내 한국 이주민 분포(1932년)
 
당시의 한국 이주민의 만주내의 분포상황은 만주에 있어서의 항일독립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므로 여기에 게재하였다. 당시의 숫자 또한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한국 이주민 지역에는 일찍부터 애국 지사들에 의해 학교가 설립되어 항일 독립운동을 의식면에서 강력히 뒷받침하는 항일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
 
일제측이 조사한 1916년 12월 당시의 만주·노령 및 미주의 학교수와 학생수를 보면〈표 1〉과 같다.
 
〈표 1〉 재외 한국인 경영 각 학교·서당 일람표註 009

 
국내에서는 교육이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으로 변질 전환되어 가는 가운데 독립군 기지인 만주·노령에서는 순수한 항일 민족교육이 실시되어 갔다. 즉 이곳 한국인 학교에서는 한국어·한국사·한국지리·애국가 등이 필수과목으로 교육되고 어떤 학교에서는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병식교련(兵式敎練)·전술까지도 가르쳤다. 또한 1913년에 설립된 허롱/화룡(和龙/和龍)현 롱옌/용암(龙岩/龍岩)촌(太拉子)의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는 신한독립사(新韓獨立史)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쳤고 또 1913년에 설립된 옌지/연길(延吉)현 장쇼우/장수(张寿/張壽)동(長興洞)의 흥동학교(興東學校)와 훈춘/혼춘(珲春/琿春)현 스상허즈/석상하자(石上河子)의 동명학교(東明學校)에서는 우리들의 원수를 잊지말자는 뜻의 ‘오수불망(吾讐不忘)’이라는 과목을 필수로 교육하여 항일 독립을 의식면에서 뒷받침하는 강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註 010
*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 프랑스의 월남 식민지화
* 병식교련(兵式敎練) : 군사훈련
 
만주·노령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 비록 그들의 경제적인 곤궁으로 말미암아 항일무장독립군을 경제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정성어린 물심양면의 따뜻한 협조 또한 교육면을 통한 강한 항일민족의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항일무장독립군단 형성의 기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항일무장독립군단의 형성을 가능케 한 다섯째 배경으로는 만주는 국내와는 달리 넓은 지역이 노령·연해주와 연접되어 있어 이곳으로부터의 무기구입이 용이하였던 것도 독립군단 형성의 배경으로 무시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만주·노령에서 3·1운동 후 항일무장독립군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한말 항전의 경험을 쌓은 많은 항일의병들이 이곳으로 집결한 것, 그리고 또 일제의 한국강점을 계기로 신민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하는 애국지사들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독립군기지를 설정하고 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낸 것, 또 일본 육사출신 한국인 장교들이 항일무장독립 전선으로 가담하여, 독립군을 지도함으로써 전술의 질을 높이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과 이곳 이주민들의 물심양면의 협조, 또 항전을 의식적으로 뒷받침하는 강한 항일민족교육의 성과 등이 토대가 되어 항일무장독립군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또 이곳이 노령 연해주와 가까와 무기를 구입하기에 편리하였던 것도 무장독립군단형성의 중요한 요건으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외 독립운동사 고찰에 있어서는 대일항전을 가능케 한 이러한 배경들의 고찰이 등한시되어 왔다.
 
 
 
 
註 001 김의환,『의병운동사』(박영사/博英社, 1974), pp.222~281 ; 사사키 하루다카(佐々木春隆),『한국독립운동의 연구(韓國獨立運動の硏究)』(도쿄/東京 : 도서간행회/圖書刊行會, 1985), p. 138 ; 유인석(柳麟錫),『의암집(毅菴集)』(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제5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참조.
 
註 002 김의환, 앞 책, pp. 222~281 ; 신용하(愼鏞廈),『한국독립운동사연구(韓國獨立運動史硏究)』(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85), p. 390.
 
註 003 채근식(蔡根植),『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대한민국공보처/大韓民國公報處, 1948), p.53.
 
註 004 사사키 하루다카(佐々木春隆), 앞 책, pp. 465~466 ;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홍사익중장의 처형(洪思翊中將の處刑)』(문예춘추사/文藝春秋社, 1986), pp. 28~51.
 
註 005 사사키 하루다카(佐々木春隆), 앞 책, p.465.
註 006 채근식(蔡根植), 앞 책, p.52.
註 007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간도사정(間島事情)』(1918), p. 25, pp. 262~281 ;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 『조선경찰지개요(朝鮮警察之槪要)』, 「병합이후외국이주조선인누년비교표(併合以後外國移住朝鮮人累年比較表)」참조.
 
註 008 경무국보안과(警務局保安課),『고등경찰보(高等警察報)』 제3호(第3號) (1932), pp.72~86.
 
註 009 강덕상(姜德相),『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7(도쿄/東京 :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1970), pp. 141~153.
 
註 010 강덕상(姜德相), 앞 책, pp. 141~170에 나오는 학교일람표의 교과목(敎科目) 참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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