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독립군단의 편성과 그 조직"에서 "(2) 독립군단의 조직"만 가져왔습니다.
 
(2) (1920년 전후) 독립군단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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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더불어 독립군의 기지 만주 노령에서는 항일무장독립군단이 우후죽순(雨後竹筍)격으로 탄생해 갔다. 즉 3·1 운동은 해외 항일 독립전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3·1운동 후 만주·노령에서 형성된 항일무장독립군단의 내부 조직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같은 내부 조직면의 고찰은 당시의 항일무장독립군단의 기능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항일무장독립군단이라 하여도 그 규모와 조직은 군단마다 크게 틀리기 때문에 이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가령 규모로 보더라도 큰 독립군단은 수천 명으로부터 수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있었고, 적은 것은 15명 정도의 게릴라부대도 있었다.註 012
 
따라서 여기에서는 큰 것에 속하는 군정서와 북간도 국민회의 조직과 적은 것에 속하는 대한독립군결사대의 조직을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큰 독립군단에 속하는 군정서와 국민회의 조직을 표로 나타내면 〈표 2〉, 〈표 3〉과 같다.註 013

〈표 2〉군정서 조직
 

〈표 3〉국민회 조직
 
위의 조직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항일독립군단은 이곳에 이주 한국인을 기반으로 그들과 밀착된 관계아래 운영되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적(人的)·재정적(財政的) 뒷받침을 비롯하여 정보의 수집 등 긴밀한 연결에 주안점을 둔 군정적인 광범한 조직체임을 알 수 있다.
 
군정서 기구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부서로 모연국과 징모국이 있다.
 
모연국은 연금 즉 군자금을 모집하는 업무를 담당한 곳으로 모연국장이 모연대를 통할하였고 모연대의 1대에는 대장이 1명으로 그 밑에 대원 12명이 소속되어 있다. 모연대의 수는 많았으리라 생각되는데 이곳에서 모금한 군자금은 재무국에 수납하여 보관하게 되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군자금은 경리국을 통하여 지출하게 된다.
 
한편 징모국은 독립군 장정을 모집하는 업무를 띠고 있는 곳으로 국장 밑에 있는 과장은 과원 58명을 거느리고 독립군 장정들을 모병하였다.
 
또한 중앙의 서무부장은 경신부장을 겸하여 각 지방경신분국을 지휘 감독하였는데 그 수는 30분국에 달하였다. 1분국에는 통신원이 1과에 5인 이상 서기는 1과에 1인, 경사원은 1과에 5인 이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사원은 통신원의 호위 및 관내의 순찰, 통신원의 명령의 전달, 문서의 체송에 종사하는 등 실로 중요한 업무를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의 항일무장독립군단이 지방조직에 세밀한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언제 어느 곳에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적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지방의 긴밀한 정보의 입수와 파악 없이는 중앙이 존립할 수 없었던 당시의 항일무장독립군단의 기본적인 처지와 성격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경향은 북간도 국민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에 든 조직표를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민회는 국민회총본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지방회를 두고 지방회 밑에 지회를 설치하였는데 그 수는 총 46개소에 달하였다.
 
지방회에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를 띤 경호부장(주로 통신국경호)·통신부장이 있어 중앙으로의 긴밀하고 신속한 연락에 주력하도록 되어 있다. 또 국민회 지방회에는 모연대장이 있어 군자금 조달에 노력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독립군의 장정모집에 있어서 국민회 동부지방총회에서 결의한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남아 있어 국민회의 기본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국민회 동부지방총회 결의문
1. 각사의 호구조사를 종료하고 그 결과에 의해 매호로부터 장정 1명씩을 의무로 응모케 한다.
2. 장정의 연령은 18세로부터 40세까지로 한다.
3. 총회에서 1개월간 교련을 시킨 후 군역에 나아가게 한다.註 014
 
즉 독립군을 중앙에서 강제로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총회에서 결의하여 장정을 스스로 군역으로 내보내는 절차를 밟고 있다. 이는 비록 중앙으로부터의 요청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지방 총회의 결의를 거쳐 처리한다는 자치적인 민주주의 방식을 취하였던 것으로 당시의 항일 무장독립 군단 인사들의 정치사상의 선진성의 일단을 알려 는 사실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항일무장독립군단이 어디까지나 지방 이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들과 밀착된 관계에서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독립군단으로서 또한 당연한 절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군정서의 군사행동의 조직에 있어서 사용되었던 군인 계급명 즉 사령관·참모총장·대대장·중대장·소대장·사관후보생·하사·헌병대장·군의 등의 명칭은 일본 육사출신의 독립군 장교들이 근대 일본의 군제를 항일독립군단편성에 도입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직명 가운데 산포대장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과거 항일 의병항전 때 위력을 떨친 산포수로 조직된 부대라 생각된다. 이 제도는 항일무장독립 군단을 조직 편성할 때 근대전술에 알맞는 새로운 군제를 도입하면서도 좋은 전통성은 그 가운데 살리려는 노력의 일단을 알려주는 것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규모가 적은 항일 무장 독립군단의 조직을 살펴 보고자 한다. 그 예로는 15명의 부대원으로 구성된 대한독립군결사대를 들 수 있다. 이 부대는 항일 독립군의 국내 작전의 기세가 높아가던 1920년 말 노령에서 조직된 것으로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註 015
 
결사대장(決死隊長) 김학섭(金學燮)
 제 1 대……대장 김학섭외 4명
 제 2 대……대장 김병관(金秉官)외 4명
 제 3 대……대장 강석훈(姜錫勳)외 4명
 
이념을 같이 하는 15명으로 구성된 항일무장독립군단이다. 특히 이 독립군단 조직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총대장인 김학섭이 제1대장을 겸하여 3개 대의 대장이 1구성원이 되어 명령하는 대장인 동시에 행동하는 하나의 대장이 되어 있다. 이러한 독립군단은 기동성에 초점을 두고 조직 편성된 전형적인 예이다. 적의 허점을 기습 공격하는 게릴라 부대로서는 전과를 올리기에 가장 적합한 조직이었다.
 
이러한 조직으로 구성된 대한독립군결사대는 1921년 1월 4일 노령 연해주로부터 함북 신건동(新乾洞)으로 진격하여 야반(夜半)에 그곳 일군 수비대와 주재소를 기습공격하여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또한 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후 연해주로 물러났다.註 016
 
이상의 항일무장독립군단의 조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3·1 운동 후의 만주·노령의 항일무장독립 군단의 조직은 과거의 항일의병항전 때와는 달리 조직면에 있어서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면이 독립군단으로 하여금 기능을 발휘하게 하였고 또한 커다란 전과를 올릴 수 있게 하였다.
 
 
 
 
 
註 012  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Ⅲ, pp. 277~280.
 
註 013 채근식(蔡根植),『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대한민국공보처/大韓民國公報處, 1948), pp. 96~98.
 
註 014 강덕상(姜德相),『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7(도쿄/東京 :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1970), p. 81.
 
註 015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 96~98.
 
註 016 주 15)와 같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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