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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군단의 편성과 그 조직
(1) 지역별 편성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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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상술한 배경 아래 독립군 기지인 만주·노령에서 3·1 운동과 더불어 항일무장독립군단이 어떻게 편성되어 갔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3·1 운동과 더불어 편성되어 가는 중요한 항일 무장독립군단의 형성상황을 남만주지방·북간도(北間島)지방·노령지방으로 나누어 1925년까지의 것만을 요약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ㄱ. 남만주지방
〇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1919년 11월, 안투/안도현(安图县/安圖縣)
상해(上海) 임시정부와의 연락 아래 조직되었고 통령(統領)에는 이상룡, 부통령에는 여준(呂準), 정무청장(政務廳長)에는 이탁(李沰), 군무청장(軍務廳長)에는 양재훈(梁在薰)이 취임하였다. 처음 유하현 삼원보에 설치하였다가 1920년 초에 백두산록(白頭山麓) 안투/안도현 삼림지대로 옮겼다.
〇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 1919년 3월· 뤼하/유하현, 산위엔바오/삼원보
평안북도(平安北道) 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장 박장호·조맹선·백삼규(白三奎) 등이 만주로 이동하여 3·1 운동과 더불어 조직된 것으로 과거의 의병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에 반대하고 전왕조에 충성을 다하려는 복구(復舊)적인 성격을 띤 항일무장 독립군이다. 이들은 과거의 항일의병항전 때의 게릴라전법의 경험을 살려 3~4명을 1 대로 결사편의대(決死便衣隊)로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군경과 친일파를 숙청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21년 5월에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으로 합류하였다.
〇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 1919년 4월. 안동현(安东/安東縣)
→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 1919년 11월. 콴뎬/관전현(宽甸/寬甸縣) 홍통고우/홍통구(弘通沟/弘通溝)
3·1운동 때, 서울에서 활약하던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박영우(朴永祐) 등이 만주로 건너가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추대하여 조직한 것으로 그 후 그해 11월에 조직을 재정비하여 대한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서울에 지하연락본부를 두고 활약하다가 뒤에 대한광복군총영으로 합류하였다.
* 안동현(安东/安東縣) = 현재 단동(丹东)시 동고우/동구현(东沟县) ?
〇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 1919년· 장바이/장백현(长白县/長白縣), 바다오고우/팔도구(八道沟/八道溝)
이희삼(李熙三)을 단장으로 하고 이영식(李永植, 중대장/中隊長)·이병호(李炳浩, 참모장/參謀長)·고인식(高仁植, 제1소대장/第1小隊長)·김락걸(金洛杰, 제2소대장/第2小隊長)·안용도(安瑢道, 제3소재장/第3小隊長)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1921년 후반기로부터 국내진격작전을 감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〇 광정단(光正團) : 1920년 봄. 푸순현/무순현성(抚顺县城/撫順縣城)
김호(金虎)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각처에 분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장백현 스류다오고우/십육도구(十六道沟/十六道溝) 더쉐이리/덕수리(德水里)에 거점을 둔 본단 소속의 성위대(誠威隊)의 과감한 국내진격 작전과 그들의 국내활약은 유명하다.
〇 의성단(義成團) : 1920년. 펑톈/봉천성(奉天省), 화이더/회덕현(怀德县/懷德縣), 우쟈즈/오가자(五家子)
편강열(片康烈)·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이 중심되어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주로 남만주에 존재하는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는 데 주력하였다. 대원 5~6명을 단위로 게릴라전술로 활동하고 서로군정서·통의부(統義府)·구국단(救國團) 등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활약하였다.
〇 신흥무관학교 : 1920년 5월. 퉁화/통화(通化), 하니허/합니하(哈泥河)
1920년 4월 하순 일본 육군중위 이청천이 서로군정서를 찾아간 것을 계기로 그해 5월에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개교하였다. 교장에는 이세영(李世榮), 교성대장(敎成隊長)에는 이청천, 교관에는 오광선(吳光鮮)·신팔균(申八均)·이범석(李範奭)·윤경천(尹擎天) 등 쟁쟁한 무관들이 취임하였다. 1920년 8월에 학교를 안투/안도현으로 옮길때까지 2천수백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들 졸업생은 신흥학우단을 조직하여 그 단결의 힘으로 항일공작을 폈다.
〇 광한단(光韓團) : 1921년 5월. 콴톈/관전현(宽甸县/寬甸縣)
서로군정서의 소극적인 군사행동에 불만을 품은 소장파 이호원(李浩源)·이시열(李時悅)·현익철(玄益哲)·현정경(玄正卿) 등이 콴톈/관전현 샹루고우/향로구(香炉沟/香爐溝)로 진출하여 조직한 것으로 보다 적극적인 게릴라작전으로 국내침공작전을 전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〇 대한광복군총영 : 1920년 6월. 뤼허/유하현(柳河县/柳河縣), 화셰고우/화사구(花斜沟/花斜溝)
대한청년단연합회·의용대·대한독립단이 합류하여 조직한 것이다. 국내에는 지하조직으로 서울에 중앙연락본부를 두고 각도에는 지영(支營)을 설치하여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군경과 친일파를 숙청하여 독립을 달성할려고 하였다.
총영의 영장에는 오동진(吳東振) 참모부장에는 이탁(李鐸) 경리부장에는 조맹선이 취임하였다. 이들은 1920년 후반기로부터 국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서 혁혁한 활동을 한 끝에 커다란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〇 기타(其他)
상술한 외에 남만주에는 중흥단(中興團 ; 퉁화/통화현/通化縣 치다오고우/칠도구/七道沟/七道溝 근거)·무사단 (武士團 ; 푸순/무순현/抚顺县/撫順縣 화카이샨/화개산/花开山/花開山근거)·향약단(鄕約團 ; 콴톈/관전현/宽甸县/寬甸縣 샤오야허/소아하/小雅河근거·유인석의 제자인 백삼규/白三奎가 통솔) 등의 항일무장 독립군단도 있었다.
ㄴ. 북간도지방
〇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1919년 3월. 왕칭/왕청현(汪淸县/汪淸縣), 펑우동/봉오동(凤梧洞/鳳梧洞)
북간도 국민회(國民會)소속의 군단으로 사령관은 한말 항일의병항전에서 용맹을 떨친 홍범도였다. 국민회에서는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대한독립군에게 공급하였다.
사령관 홍범도는 2백수십 명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1919년 8월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혜산진(惠山鎭)일대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위세를 떨쳐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 후 홍범도의 독립군 부대는 곳곳에서 전과를 올려 일제 군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〇 정의단(正義團) : 1919년 3월. 왕칭/왕청현(汪淸县/汪淸縣)
1911년에 망명 의병들을 규합하여 서일(徐一)이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의 토대 위에 3·1운동 후 항일무장항전으로의 성격을 더 한층 강화하여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중심인물은 서일·계화(桂和)·채오(蔡五)·양현(梁玄) 등이었다.
〇 야단(野團) : 1919년 3월. 북만(北滿) 중동선(中東線) 일대
청림교도(靑林敎徒)로 조직된 항일무장독립군단으로 단장은 신포(申砲 ; 아소래/我笑來)이다. 9·18사건 때에는 한국독립군사령관 이청천을 도와 대활약을 한 바 있다.
* 중동선 = 중동철도(中東鐵道)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〇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 1919년 3월. 훈춘/혼춘(珲春/琿春)
노령에서 구입한 장총·권총 150정으로 무장한 500명의 항일무장독립군단으로 단장은 김규면(金圭冕)이었다.
〇 의군부(義軍府) : 1919년 4월· 옌지/연길현(延吉县/延吉縣), 밍웨에/명월구(明月沟/明月溝)
국내에서 항일의병항전에 종군하였다가 일제의 한국강점 후 만주로 망명하여 각지에 산재하고 있던 의병들이 3·1 운동 후 재결집하여 조직한 항일무장독립군단으로 중심 인물은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봉(金淸鳳)·김현규(金鉉圭) 등이다.
〇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 1919년 10월. 안투/안도현(安图县/安圖縣)
3·1 운동 전 국내 에서 항전을 한 구한국 군인과 의병들이 두만강·압록강을 건너가 그곳에서 포수생활을 하면서 항일을 목적으로 조직한 것으로 3·1운동 후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라 칭하다가 1919년 10월 상해 임시정부의 권고로 조직을 개편하여 대한정의군정사라 칭하였다. 총재는 이규(李圭), 부총재는 강희(姜憙)였다. 이 군단의 교련과장 조동식(趙東植)은 탁월한 전술가로 만주독립군단 사이에는 널리 알려져 있던 유명한 인물이다.
〇 도독부군(都督府軍)이 대한독립군으로 합류 : 1919년 말. 왕칭/왕청현(汪淸县/縣)
최진동(崔振東)·이태범(李泰範)이 거느리고 있던 도독군 300여 명이 대한독립군으로 합류하여 사령관에는 최진동, 부사령관에는 안무(安武), 연대장에는 홍범도가 취임하였다. 이와 같이 진용이 보다 강화된 대한독립군은 1920년부터 활발하게 국내작전을 전개하여 크게 그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〇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1919년 12월. 왕칭/왕청현(汪淸县/縣)
상술한 정의단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항일의 군사적인 측면을 강화하여 재조직한 것으로 총재에는 서일(徐一), 총사령관에는 김좌진(金佐鎭) 참모장에는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는 김규석(金奎植), 여단장에는 최해(崔海), 연대장에는 정훈(鄭勳), 연성대장에는 이범석, 경리에는 계화, 군무감독에는 양현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 병력은 500명으로 이들의 무기는 시베리아의 체코군으로부터 구입한 것이었다. 무기는 장총 500정, 권총 40정, 기관총 3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항일무장독립군단 가운데 가장 강력한 화력을 가진 군단이었다.
〇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 1920년 봄. 왕칭/왕청현(汪淸县/縣), 스리핑/십리평/十里坪)
북로군정서 독립군사관학교로소장은 김좌진, 교관은 이장녕·이범석·김규식·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 등으로 1920년 9월에는 298명의 제1기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〇 의민단(義民團) : 1919년 말·본거지 ?
천주교인을 중심으로 하는 200명의 항일무장독립군단으로 단장은 방우룡(方雨龍), 부단장은 김연(金演)이었다. 이 독립군단은 1920년 초에 북간도 국민회의 대한독립군으로 합류하였다.
〇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 1920년 12월. 닝안/영안현/宁安县/寧安縣)
김좌진부대와 이청천부대가 합류하여 부른 이름이다.
〇 광복단(光復團) : 1920년 봄· 안투/안도현(安图县/安圖縣)
김성극(金星極)·홍두식(洪斗植) 등에 의해 조직된 150명 가량의 항일무장독립군단으로 1921년으로부터 1922년에 걸쳐 과감한 국내 작전을 전개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〇 혈성단(血誠團 ; 일명 애국청년혈성단/愛國靑年血誠團) :
1920년. 헤이룽장/흑룡강성(黑龙江/黑龍江省), 야오윈/오운현(鸟云县/鳥雲), 징다툰/경달둔(境达屯/境達屯)
피끓는 청년들만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독립군단으로 단장은 김국초(金國礎), 부단장은 김태일(金泰日)이었다.
〇 의단군(義團軍) : 1920년 7월· 북간도(北間島)
진상산(陳相山)·지장회(池章會)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군단으로 일명 의병산포대(義兵山砲隊)라고도 하였는데 무장군인 수백 명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복벽적인 운동성격을 띠고, 연호도 단기(檀紀)를 사용하였다.
〇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 : 1921년 10월. 간도성(間島省) 장바이/장백현(長白县/縣)
청산리(靑山里)대첩 후 간도에 산재해 있던 군비단·홍경단·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 등이 상해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를 것을 다짐하고 합류하게 된 항일무장독립 군단으로 중심 인물은 김호·이은경(李殷卿)·윤병용(尹秉庸)·김용문(金容文)·석계(石桂)·김찬(金燦)·한창언(韓昌彥)·강연상(姜鍊翔)·윤세복(尹世復) 등이었다. 이들은 주구배 숙청에 노력하였다.
〇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 : 1921년 10월. 북간도(北間島)
대한국민단이 형성될 전후 서간도군비단(西間島軍備團)과 북간도 국민회의 군사부가 병합되어 조직된 항일무장독립군단으로 중심 인물은 김찬·김덕은(金德殷)·임표(林彪)·이계(李繼)·마용하(馬龍河)·주학섭(朱學燮)·강재관(姜載官)·박춘진(朴春振)·최기학(崔基學)·한운용(韓雲用)·김홍일(金弘一) 등이었다. 내부의 알력으로 항전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〇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 1923년 5월. 옌지/연길현(延吉县/縣), 밍웨이고우/명월구(明月沟/溝)
청산리대첩 후 노령으로 들어가 활약하다가 무장해제를 당하는 참변을 겪은 후 다시 만주로 돌아 온 독립군 간부들은 연길현 명월구에서 다시 고려혁명군이라는 항일무장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사령관에는 김규식, 참모장에는 고평(高平), 부관장에는 최해, 기병사령에는 이범석, 사장에는 최준형(崔俊亨), 헌병대장에는 허승완(許承完) 등이 취임하였다. 군세는 400여명으로 이들은 엄격한 교육 아래 조직적으로 행동하였다.
〇 기타(其他)
상술한 항일 무장 독립군단 이외에도 북간도지방에는 태극단·노농희(勞動會)·홍영회(興榮會) 등 10여 군사단체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는 기록이 없어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ㄷ. 노령지방
〇 대한독립군결사대(大韓獨立軍決死隊) : 1920년 12월· 노령(露領) 시지마
* 시지마 : 시지미(Sidimi) ?
한국의 독립은 독립군이 국내로 침공하여 일제의 기관들을 파괴하고 주구배들을 숙청하는 직접적인 군사행동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확신 한 김학섭(金學燮)·김병관(金秉官)·강석훈(姜錫勳)·강용관(姜龍官)·문창학(文昌學)·최시용(崔時龍)·최영찬(崔英燦) 등이 노령 연해주 시지마의 강용관의 집에서 조직된 15명 전후의 정예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이다.
이들은 1920년 말부터 완전 무장한 소수인원의 게릴라부대로 노령에서 함북(咸北)지방으로 침공하여 수차에 걸쳐 다대한 빛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〇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 1921년 1월·연해주(沿海州) 고르찌게
청산리대첩 후 홍범도·이청천·김좌진·안무 등이 거느리는 독립군 부대가 안투/안도현 밀림지대에서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각 수뇌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통일부대를 조직하기로 하고 통일부대의 이름을 대한독립군단이라고 하였다.
이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에는 서일이 부총재에는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 총사령에는 김규식이 참모총장에는 이장녕이 여단장에는 이청천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
독립군단의 총 인원은 3천 500명으로 이들을 3대대 27개 소대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이들은 노령으로 들어간 후 보다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그곳 지방정부와 협정을 맺은 후 그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고려군관학교(高麗軍官學校)를 세울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이를 내탐한 일본정부는 소련정부에 대하여 강력한 외교적 공세를 펴 우리 독립군이 무기를 공급받아 군관학교를 세우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소련측은 이러한 일본정부의 요청에 따라 드디어 독립군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단행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독립군부대는 반대의 격전을 전개하면서 만주로 되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독립군부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만주로 되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니 이를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 한다.
따라서 대한독립군단은 청산리대첩 후 노령으로 이동해 들어갈 때 조직되고, 또 노령으로 들어가서 통일적으로 행동한 항일무장독립군단인 것이다.註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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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3·1운동으로부터 1920년대초의 만주·노령에서의 형성된 항일 무장 독립군단의 개황을 요약해서 살펴 본 것이다.
객관적인 정세변화에 따라 이합(離合)이 무상(無常)하였고, 또한 항일무장독립군단의 성격도 개혁적인 것 보수적인 것 등 그 성격이 다양하였으며, 또 내부적인 파벌·감정대립도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무상(無常) : 일정하지 않고 늘 변함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다양성·내부의 대립이라는 모순을 내포하면서도 항일 독립이라는 같은 목표달성을 위한 항전의 구심체의 형성에 얼마나 노력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주
註 011 이상의 남만주(南滿州)·북간도(北間島)·노령(露領)지방에서의 항일무장독립군단의 편성 상황은 아래의 참고사료를 참조하여 서술하였음.
채근식(蔡根植),『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대한민국공보처/大韓民國公報處, 1948); 강덕상(姜德相),『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7(도쿄/東京 :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197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제5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 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Ⅱ·Ⅲ(도쿄/東京 : 하라쇼보/原書房, 1967) ; 한국일보사,『재발굴(再發掘) 한국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 제1편 만주(滿洲)·노령(露領)에서의 투쟁(鬪争)』(한국일보사 출판국/出版局, 1987) ; 신용하(愼鏞廈),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1985) ; 김승학(金承學),『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독립문화사/獨立文化社,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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