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
먼저 가야시대의 개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야의 전성시대는 포상팔국의 전쟁이후부터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신라에 통합된 때까지이다. 물론 가야는 포상팔국과 더불어 기원 42년 무렵에 남쪽의 해안지대에서 시작되었지만 포상팔국 전쟁을 신라연합군과 더불어 승리로 이끈 후 562년 전후까지 그 전성시대를 구가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기가야 12개국, 후기가야 13개국은 각자의 독자적인 문화와 생활양식으로 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약 600년 동안이나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교류와 갈등의 마찰을 겪으면서 독자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년 전이었다.
<삼국유사>는 가야사의 전개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와 낙동강 서쪽의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ㆍ양산ㆍ창녕 등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ㆍ장수ㆍ임실ㆍ남원 등에서도 가야문화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즉 가야는 현재의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진 분지형태의 지역들은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독자적으로 존립하고 발전하기에는 적절한 공간형태였지만, 가야지역을 강력한 통일왕국으로 이루기에는 부적절한 지형이었다. 이처럼 가야는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서기 516년으로 추정되는 신라에 귀화한 가야인인 우륵의 12곡에 나오는 지명을 보면 1.하가라도(下加羅都), 2.상가라도(上加羅都), 3.보기(寶伎;곤양 곤명), 4.달기(達己), 5.사물(思勿; 사천지역), 6.물혜(勿慧), 7.하기물(下奇物), 8.사자기(師子伎), 9.거열(居烈), 10.사팔혜(沙八兮), 11.이사(爾赦), 12.상기물(上奇物)이다. 후기 가야 13개국의 지명은 1.가라국(加羅國), 2.안라국(安羅國), 3.사이기국(斯二岐國), 4.다라국(多羅國), 5.졸마국(卒馬國), 6.고차국(古嵯國), 7.자타국(子他國), 8.산반하국(散半下國), 9.걸찬국(乞湌國), 10.임례국(稔禮國), 11.탁순국(卓淳國), 12.녹기탄국(銶己呑國), 13.남가라국(南加羅國)이 있다.
가야(加耶)는 가라(加羅)에서 온 말이다. 가라는 우리말에서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였는데, 이후는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다.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은 ‘가라의 나라’였다. 가야의 한자표기는 加耶(신라)→伽耶(고려)→伽倻(조선)와 같이, 시대가 전개되면서 사람 인(人)변이 하나씩 더해졌다. 금관가야(金官加耶, 김해)ㆍ아라가야(阿羅加耶, 함안)와 같은 이름이 우리에게는 친숙하지만, 그러나 이 명칭은 고려시대의 일연 스님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여서 지었던 이름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작 가야인들은 이런 이름들을 몰랐을 것이다. 가야의 각국은 구야국ㆍ안야국ㆍ반로국 등과 같이 부르는 것이 옳다. 임라(任羅)는 <일본서기>에 주로 쓰여 고대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고 꾸미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00년)ㆍ<삼국사기> 강수전(7세기)ㆍ진경대사비(932년)」와 같이 고구려인과 신라인들도 사용하였다. 임나는 ‘님의 나라(主國)’라는 뜻이다. 임나는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었다. 김해와 고령은 가야의 대표국가로 일본과 교섭했기 때문에 고대 일본에서는 임나를 가야의 대명사로도 사용하였다. 대가야(大加耶)는 고령의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의 대가야는 둘이었다. 첫째, 1~4세기에의 김해 가락국이 ‘큰가야(大加耶)’였고, 둘째, 5~6세기의 고령 반로국이 ‘큰가야(大加耶)’였다. 가야사에서 마지막 ‘큰가야’가 반로국이었기 때문에 고령을 대가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보통 가야의 역사를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눈다. 이 시대구분의 기준은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기준으로 한다. 전기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세력이었다. 전기가야 때에는 남해안에 인접한 거제(瀆盧國)ㆍ김해(狗邪國)ㆍ창원(古淳國ㆍ卓淳國)ㆍ함안(安邪國)ㆍ고성(古自國)등이 번성하였고, 후기가야 때에는 고령(大加耶)ㆍ합천(多羅國)ㆍ창녕(不斯國ㆍ比斯國)ㆍ의령(爾赦國)ㆍ거창(居烈國)ㆍ남원(己汶國)ㆍ하동(多沙國)ㆍ사천(史勿國)등이 가야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런 개요의 가야사에서 곤양지역의 위상은 어떠하였는지 다음과 같이 전기가야 후기가야의 연대순에 따라 추론해 본다.
먼저 전기가야시의 곤양지역에 미친 세력영향권의 판도이다.
첫째, 전기가야의 초기에는 전술한 가야의 여러 나라ㆍ통일된 마한ㆍ해상교역중심의 포상팔국의 3대 세력권이 저마다의 토착세력으로 존립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곤양지역은 마한의 영향도 가야의 지배도 받지 않는, 다른 포상팔국과 마찬가지로 독립적 국가체제로서 존립하고 있었다. 당연히 백제나 신라의 영향권으로부터도 멀어져 있었음은 물론이고, 가야와 왜에 우수한 문물을 가공ㆍ전달하여 주는 선진문물 전달자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서기 212년경의 포상팔국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곤양지역은 가야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신라가 포상팔국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낙동강하구의 교역권을 장악하였기는 하지만, 곤양ㆍ사천지역이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곤양ㆍ사천 및 포상팔국의 지역들은 여전히 해상교역로를 통하여 중국과 왜의 문물을 교역하면서 국제교류의 물고를 응용해 나가는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고구려가 313년에 낙랑군을, 314년에 대방군을 축출하면서 이들 지역에 바탕을 두고 남해연안으로 공급되었던 선진문물의 공급처가 사라져 버렸다. 이 후 포상팔국의 여러 나라들은 자연히 가야, 마한, 신라 등의 문화와 문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들 지역으로부터 필요한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포상팔국의 여러 나라들은 저절로 이들 나라의 영향력과 세력권 안으로 편입되게 되었다.
넷째,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및 그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 375~384년) 은 국력을 신장시켜 북으로는 중국군현의 대방고지(帶方故地)와 고구려의 남평양성을 공격하고, 남으로는 호남지역을, 동으로는 경상도의 가야지역까지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백제와 인접하여있는 곤양지역은 가야나 신라의 영향보다 백제의 여러 문물을 수용하게 되어 백제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섯째, 서기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5만의 병력으로 백제ㆍ가야ㆍ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지난 1세기 간의 역사적 격변은 가야사의 한 획을 긋게 한다. 가야사의 중심이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북부의 내륙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백제 신라 가야의 붕괴와 힘의 쇠락으로, 곤양지역에는 영향을 끼치던 주요 지배세력의 공백이 생겼다. 곤양지역은 지역판도를 주도하여 나갈 주체적 입장도 아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세력권 안에 편입되는 완전한 복속관계도 아닌 어중간한 형편에 처해지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눌지왕(417~458)대에 곤양ㆍ사천지역에 신라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고 판단된다. 아마도 곤양지역은 가깝게는 가야와 백제 양측으로부터 문물을 수입하고, 멀리로는 중국 및 왜와 교역하면서 지역정체성을 유지해 나갔으리라 추정된다.
다음 후기 가야시의 곤양지역에 미쳤을 세력권의 모습이다.
첫째, 이후 후기가야가 성립되는데 후기가야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고령의 대가야왕(嘉實王 荷知로 추정)은 479년에 중국 남제(南齊)에 조공하여 ‘보국장군ㆍ가락국본국왕(輔國將軍ㆍ加羅國本國王)’에 제수되는데, 그는 후기가야연맹을 결속시키려 노력하였다. 가실왕은 가야지역에 상당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가야 사절단은 중국의 남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서부 경남지역에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이 확산되는 현상과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내용이다. 대가야식 토기와 금동제 위세품 등이 서부경남 일대로 확산되는 과정은 경제교역권(5C중엽)→간접지배권(5C후엽)→직접지배권(6C초)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고령의 지산동 44호분은 중앙의 주인공을 방사식으로 둘러싸듯이 35개의 돌방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무려 100인 이상을 강제로 죽여 순장되어 있는 모습들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경남의 서부지역에는 고자국(고성) 중심의 사천ㆍ진주ㆍ산청ㆍ함양 등에 존재하는 소국들을 포괄하는 정치체제가 있었는데, 이 정치세력은 5세기 후반 이후 고령의 대가야가 팽창하면서 그 활동영역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6세기 중엽에는 고성ㆍ사천ㆍ진주지역 만으로 축소되었다. 또 그 중심국이었던 고자국 자체도 6세기 전반 이후로는 사실상 소국연맹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어떻든 이 시기는 고령의 대가야의 팽창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사천 용현의 송지리 고분군ㆍ용현의 선진리 고분ㆍ정동의 예수리 고분군ㆍ사남의 월성리 고분군ㆍ곤명의 봉계리 주거지 등은 당시 가야시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유적들을 통하여 볼 때 곤양지역도 가야의 세력권 안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곤양지역도 가야의 정치경제체제 영향을 다소 받았으리라 보여 지며, 전기에는 가락국(김해)의 영향 아래에, 후기에는 대가야(고령)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둘째, 고령 대가야 중심의 정치연맹체 결집노력이다. 가실왕은 중국 당의 쟁(箏)을 보고 기존의 전통악기를 개량하여 가야금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의령의 사이기국(斯二岐國, 省熱縣)사람 우륵(于勒)을 강제 이주시켜, 여러 가야국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포함시킨 가야금 12곡을 작곡하게 하였다. 즉 가실왕은 12개월의 율려(律呂)를 본받아 12현을 만들고, “여러 나라의 방언은 각기 소리가 다르니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하고 작곡을 하도록 하였으니, 그의 독자적 정치문화 결맹체에 대한 의지는 후일 조선의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정신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그리고 가실왕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이들 가야 왕들을 축제의 마당에 불러 모아 이렇게 작곡한 가야금 12곡을 연주케 하여 가야의 문화적 일체감과 정치적 혈맹동지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우륵의 가야금 12곡을 중심으로 한 대연회를 개최하여 가야연맹의 정치적 통합체를 추진하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가야지역의 산맥과 분지의 특성 때문에 한 지역중심 또는 한 지도자를 정점으로 한 강력한 단일 통일체를 구성하기는 힘들었다. 이 때만해도 고령의 대가야 세력은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가야금 12곡에 나와 있는 곤양지역에 관련된 내용은 제3곡인 보기(寶伎)라는 지역상징의 곡명이다.
이에 대한 사천시지가 조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는 지금 하동군의 옛 영현인 하읍현(河邑縣)33)의 옛이름 포촌현(浦村縣)을 ‘보기(寶伎)’의 후보지로 들었다. 그는 그의 선학 아유가이(鮎貝房之進)의 <일본서기>에 나오는 <조선지명고>를 인용하면서 보배 ‘보(寶)’자와 물가 ‘포(浦)’자는 서로 뜻은 다르지만 발음은 가깝고, 재주 ‘기(伎)’와 지탱할 ‘지(支)’ 역시 이와 같아서 서로 통할 뿐만 아니라, ‘支’는 ‘城’으로 통하여 ‘촌읍(村邑)’의 뜻이 있고, ‘伎’와 ‘村’도 통하기 때문에 ‘보기’를 사천시 곤양면(곤명면)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34)
셋째, 대가야 가실왕의 이러한 애씀에도 불구하고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된다. <삼국사기>ㆍ창녕진흥왕순수비ㆍ<일본서기> 등에서 당시의 사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하여 가야정치체제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과 외교를 병행하여 전개하였던 가야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웠다할 수 있다. 가야는 친백제노선과 친신라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시기이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일본의 왜왕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이지만, 이들은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백제나 신라에 대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안라국왕이 이들을 함안에 머물게 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려고 한 노력들은 그런 외교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전기가야의 맹주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 금관가야(金仇亥王)가 신라의 지배권 아래로 들어갔고, 고성의 고자국 중심의 소연맹국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독립된 가야연맹체로 존립하려고 절절한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연맹내부의 단합과 통일을 도출하여 내지 못한 채 끝내는 백제의 외교적 영향력에 굴복하여 550년을 전후하여 백제의 부용국이 되었다. 가야연맹체의 독립을 갈망하여 가야금 12곡을 만들었던 우륵 또한 이런 현실에 절망하여 신라 진흥왕(551) 때에 그의 제자들(尼文 등)과 더불어 신라로 투항 귀화하게 된다. 554년 관산성(管山城,충북 옥천)싸움에서 백제 성왕(聖王)이 패사하자 신라는 그 무력적 전승기를 구가하게 되고, 가야는 어느 한 곳 기댈 곳이 없어 신라로 편입되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560년경에 안라국(함안)이 신라의 회유와 무력에 굴복하고, 후기 가야의 맹주였던 대가야(고령)가 진흥왕(眞興王) 23년(562)에 신라장군 이사부(異斯夫)와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이끄는 부대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여 가야의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지방 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이 가야의 맹주국인 대가야가 신라에 복속되자 나머지 가야의 소국들도 저절로 신라에게 넘어갔으며, 곤양지역 역시 562년 이후 국가로서의 역사를 마감하였을 것이다. 곤양지역 역시 이 이후 신라의 직접적 지배권아래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고승ㆍ학자ㆍ임금들의 이름이 곤양의 지역명에 자주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562년 이후의 시기로, 이러한 전설들은 곤양지역이 이 이후에 신라의 영향력에 편입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하나의 무형적 흔적이라 할 것이다.
33)“古蹟古昆明縣條河邑廢縣本浦村縣新羅景德王改今名爲河東郡領縣本朝移屬于.” <昆陽郡邑誌>
34)사천시사편찬위원회, 사천시사(상), 2003,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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