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4277
'잔혹한 군주' 이방원, 이런 면도 있었네?
[아버지와 아들 ④] 사관들이 포착한 태종 이방원의 부정(父情)
11.11.19 13:16 l 최종 업데이트 11.11.20 14:52 l 김종성(qqqkim2000)
▲ KBS2 <대왕세종>의 태종 이방원(김영철 분). ⓒ KBS
태종 이방원은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윤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비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몽주도 죽였고 정도전도 죽였고 이복동생들도 죽였다. 동복형도 귀양 보냈고 아버지도 왕위에서 쫓아냈다.
그런 이방원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찰칵' 하고 붓끝으로 담아내는 사관(史官)들이었다. 그는 사관들이 무척 귀찮았다. 세상에 파파라치보다 더 귀찮은 것은 '사(史)파라치'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방원은 사관들이 자신의 일거일동을 밀착 취재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그는 즉위 직후부터 그들과 신경전을 벌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1년 4월 25일(1401년 6월 6일)에는 사관 하나가 주상 집무실인 편전에 접근하다가 계단에서 내시의 제지를 받았다. 편전은 청와대 본관의 대통령 집무실 같은 곳이다. 태종은 "이곳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라며 사관을 내쫓았다.
하지만, 4일 뒤에 또 다른 사관이 편전에 들어가려다 제지를 받았다. 태종이 "이곳엔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하자, 사관은 자기가 올바로 기록하지 않으면 하늘이 지켜볼 것이라는 식의 협박을 하고 퇴장했다.
6월 22일(1401년 8월 1일)에도 사관이 연회장에 진입하려다 실패했고, 7월 28일(9월 6일)에는 사관이 문틈으로 편전을 엿보다가 적발됐다. 오늘날 같으면 '카메라'를 빼앗길 만한 상황이고, 그때 같으면 붓과 종이를 빼앗길 만한 상황이었다. 사관 중 한 명은 결국 유배를 떠났다. '하늘이 지켜볼 것'이라고 막말을 던진 그 사관을 꼭 집어서, 이방원은 분풀이를 했다.
이렇게 이방원의 행동 하나하나를 집중 취재한 사관들. 그들은 취재 대상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 심리까지 '카메라'에 담아냈다. 아들들 간의 분쟁 가능성을 염려하는 이방원의 미묘한 심리까지 포착한 것이다. 목숨까지 걸고 임금을 밀착 취재한 그들의 눈에 '아버지 이방원'이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임금을 밀착 취재한 사관의 눈에 비친 '아버지 이방원'
▲ 경복궁 사정전. 이곳도 편전이다.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소재. ⓒ 김종성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서열'로는 왕이 될 수 없었지만 '능력'이 그를 왕으로 만들었다. 서열은 높지만 능력은 부족한 형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자기 자신의 경험 때문인지, 그는 자기 아들들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노심초사했다. 그것이 결코 기우가 아니었던 것은, 장남인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보다 셋째인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이 훨씬 더 유능했기 때문이다. 사관들이 포착한 '아버지 이방원'의 모습 중에서 세 장면을 클릭해보자.
[장면 ①] 잘난 아들보다 못난 아들이 더 마음 아픈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나도 내일모레면 50이야" 하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장수를 기원하는 파티를 열었다. 태종 13년 12월 30일자(1414년 1월 21일) <태종실록>을 볼 때, 이 파티는 1413년 겨울부터 1414년 연초 사이에 열렸다. 세자 이제가 폐위되기 4년 전이었다.
이날 연회에서 노래와 시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평소 시에 조예가 깊은 충녕대군(당시 18세)이 아버지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상당히 깊이가 있었다. 사관들은 "(그 질문이) 심오해서 임금께서 가상히 여겼다"고 기록했다.
이 순간, 사관들은 이방원의 심리를 포착했다. 그들은 이방원이 충녕대군의 질문을 듣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작 충녕대군을 칭찬하지 않고 장남에게 눈길을 돌리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이방원은 장남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너를 도와 큰일을 해낼 아이다."
여느 아버지 같았으면, 심오한 질문을 한 셋째아들을 쓰다듬거나 칭찬했을 것이다. 이방원도 셋째가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속마음을 단속했다. 옆에 있는 장남을 의식한 것이다. 지금 잘못 말했다가는 첫째가 셋째에게 질투심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장차 화가 생길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문의 주인공인 셋째를 칭찬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옆에 있는 첫째에게 격려의 말을 했다. 앞으로 너를 도울 아이라고 말한 것이다. 질투심을 느끼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이방원이 아들들 간의 분쟁 가능성을 얼마나 염려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김종성
[장면 ②] 장남이 내뱉은 말에 민감해하는 아버지
태종 14년 10월 26일(1414년 12월 8일), 세자 이제와 대군들이 부마(세자 입장에서는 매형) 이백강의 집에서 밤새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세자가 큰누나인 정순공주에게 무심코 내뱉은 말이 다음 날 이방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큰형이 동생을 칭찬하는 말이구나' 하고 그냥 넘길 수도 있는 한마디를, 이방원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 말 속에서 위험한 기운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는 큰아이가 셋째 아이한테 경쟁심을 드러냈다고 판단했다. 사관들도 그런 이방원의 심리를 포착했다. 그래서 이방원의 표정과 발언을 '찰칵' 하고 사료 속에 담아냈다.
"임금께서 그 말을 듣고 불쾌해하면서 '세자는 동생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모임을 파했으면 (일찍) 돌아오는 것이 옳거늘, 어째서 이렇게 방종하게 놀았느냐!'라고 말했다."
이방원이 화를 낸 것은 왕자들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자가 겉으로는 동생을 칭찬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동생을 견제하는 듯한 발언을 무심코 내뱉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그것이 취중진담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동생들과 너를 비교하지 마라'고 말한 것이다.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버지 이방원은 장남이 그렇게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 사이를 예리하게 주시했던 것이다.
[장면 ③] 물러가는 장남의 체면을 세워주는 아버지
첫째보다는 셋째가 더 유능했지만, 이방원은 어떻게든 장남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남이 자질 부족을 드러낸 데에다가 툭하면 섹스 스캔들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큰아버지인 정종(당시 상왕)의 애첩마저 건드렸으니, 더 이상 큰아들을 지켜줄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첫째를 폐하고 셋째를 세자로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방원은 훗날을 염려했다. 큰아들의 체면을 세워주고 동생들이 혹시라도 큰형을 무시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런 그의 심리는, 그가 큰아들에게 '양보'의 뜻이 담긴 양녕대군이란 대군호(號)를 부여한 데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장남 이제가 세자에서 폐위된 날은 태종 18년 6월 3일(1418년 7월 6일)이고, 그가 양녕대군에 봉해진 날은 이틀 뒤인 6월 5일(7월 8일)이다. 양녕이란 타이틀은 첫째가 셋째에게 일부러 자리를 양보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타이틀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첫째와 셋째 간의 우애를 과시하는 동시에, 장남 본인에게는 '네가 동생에게 양보한 것이지, 결코 빼앗긴 게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태종은 쫓겨나는 장남의 대군호 하나를 짓는 순간에도 아들들 간의 우애를 걱정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아들들 간에 혹시라도 골육상쟁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 고뇌하는 이방원. ⓒ KBS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왕의 일거일동을 역사기록에 담고자 했던 '사파라치'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잔혹한 군주, 이방원'만 기억할 뿐 '애잔한 아버지, 이방원'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이방원의 부정(父情)이 포착된 사료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자식을 지극히 사랑했다 하여 이방원의 살상행위가 덮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 대(代)의 골육상잔이 아들들의 대에 재현될까봐 노심초사한 이방원을 보면서 인간적 동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요즘 아버지들은 안 그렇지만, 얼마 전만 해도 아버지들은 사랑을 입으로 잘 표현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도 그런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는 아들들을 바라보는 애잔한 눈길을 통해 자신의 부정(父情)을 표현했다. 비록 폭군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그는 아들들 앞에서만큼은 그저 한없는 '약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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