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01407


왕 못 되면 무조건 '저승행'... 살벌한 나라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사극 <화정> 두 번째 이야기

15.04.22 11:21 l 최종 업데이트 15.04.22 11:21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화정>의 광해군(차승원 분).  ⓒ MBC


이복남매인 정명공주와 광해군의 이야기를 다룬 MBC 드라마 <화정>은, 최근 방영분에서 광해군의 고뇌를 심도 있게 묘사했다. 드라마 속의 광해군(차승원 연기)은 이복형제들인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자신과 그들의 정치적 관계 때문에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문제에 관한한, 세종을 능가할 이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세종은 전직 세자였던 큰형 양녕대군의 안위를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무려 32년간이나 안정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지켰다. 어떻게 보면 큰형의 자리를 빼앗은 건데도, 세종은 큰형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왕위를 잘 유지했다. 단순한 왕자도 아니고 전직 세자였던 큰형의 안녕을 지켜주면서도 정치적 안녕을 함께 이룬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광해군은 세종을 따라갈 수 없다. 광해군은 이 문제에서만큼은 보통 임금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정치의 안녕과 형제들의 안녕을 동시에 지켜내지는 못했다. 


사실, 옛날 임금들의 지위를 생각하면, 그 두 가지를 모두 지켜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절감할 수 있다. 지금의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만 '국가대표'이지만, 옛날의 임금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국가대표'였다. 임금은 최고 권력자인 동시에 최고 부자였던 것이다.


정치권력 쥔 자가 곧 경제권력까지 쥐었던 시대


지금의 대통령은 계약제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지만, 옛날 왕은 나라 전체의 백성과 땅을 원칙상 소유했다. 개별적인 토지마다 주인이 따로 있긴 했지만, 그런 토지도 원칙상은 임금의 것이었다. 임금의 땅을 개인이 쓰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개인 소유자가 없는 땅은 원칙상으로뿐만 아니라 실질상으로도 임금의 소유물이었다. 그래서 나라 전체의 땅은 원칙상 왕토(王土)였다. 


백성들은 자기 명의이든 국가 명의이든 왕토에서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수확물의 일부를 임금에게 바쳐야 했다. 그래서 크게 보면, 백성 전체는 임금의 소작인이나 노비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원칙적이고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임금이 나라 전체의 땅과 백성을 소유했기 때문에, 임금이 나라 안에서 최고의 부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재벌 따로, 대통령 따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정치권력을 쥔 자가 곧 경제권력을 쥐었던 것이다. 


임금이 나라 안에서 최고의 부자였다는 사실의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의 서울 시내나 서울 주변에 있는 광대한 규모의 왕릉이나 왕실 무덤들은 모두 다 왕토 안에 조성된 것들이었다. 이런 무덤들의 규모는 임금이 얼마나 부유했는가를 보여주는 증표 중 하나였다. 만약 지금의 대통령이 그만한 땅을 소유한다면, 퇴임 후에 감옥을 적어도 몇 번은 들락거려야 할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패한 왕자들은 모두 저승행


▲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조선 왕릉의 풍경. 사진은 선조의 무덤인 목릉. 목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경내에 있다. ⓒ 김종성


이렇게 임금이란 자리는 최고 권력자와 최고 부자가 되는 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쟁탈하기 위한 투쟁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핏줄에서 태어난 형제간일이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금 자리를 위한 투쟁에서는 '형제 따로, 남 따로'가 있을 수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만만해 할지라도, 막상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임금 자리 앞에서는 형제와 남남이 따로 없다는 점은, 당나라의 압박을 받고 중동으로 쫓겨 간 뒤 중동·북아프리카·동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세운 투르크족(돌궐족)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투르크족이 세운 세계적 강국이자 '중동의 중국'이었던 오스만투르크(1299~1922년)에는 냉혹한 권력의 속성을 반영하는 살벌한 제도가 있었다. 


이 제국에는 장자 상속제가 없었다. 누구든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 왕자가 차기 술탄(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 외의 나머지 왕자는 모두 다 저승으로 직행했다. 새로운 술탄을 보호할 목적으로 술탄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는 관행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17세기부터는 이런 관행에 변화가 생겼다. 술탄이 못 된 왕자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외지고 밀폐된 공간인 카페스에 가둬두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카페스는 새장을 뜻했다. 이런 공간에 왕자들이 연금 혹은 유배됐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은 술탄의 권력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이 점은 술탄의 폐위를 목표로 한 정변 17건 중에서 14건이 17세기 이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술탄이 되지 못한 왕자들을 살려뒀더니, 그들이 중심이 된 반란이 빈발했던 것이다. 


이것은 술탄이 된 형제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빼앗아 보려고 하는 오스만투르크 왕자들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세종처럼 형제의 안녕과 정치의 안녕을 동시에 달성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이로부터 알 수 있다. 


선조가 조금 더 살았다면... 광해군의 운명은?


이런 냉혹한 현실은 형제들을 죽음으로 내몬 광해군의 패륜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광해군이 동복형인 임해군은 물론이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분명히 비정하고 나쁜 일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처지를 살펴보면, 그에게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서얼 출신인 광해군은 아버지인 선조를 대신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기여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는 '지난 7년간 네가 한 일을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광해군을 냉대했다. 그러다가 전쟁 후에 재혼한 인목대비(당시는 왕후)한테서 적장자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광해군을 몰아낼 듯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가 영창대군이 세 살일 때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살았다면, 영창대군이 새로운 세자가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전직 세자로서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광해군이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쥐 죽은 듯이 살아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왕이 못 된 왕자'가 이미 7년간이나 국제적으로 능력을 과시했으니, 광해군이 왕이 된 이복동생 밑에서 목숨을 지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만약 영창대군이 왕이 됐다면, 영창대군 정권은 광해군을 '새장'에 가두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17세기 이전의 오스만투르크 관행에 입각해서 광해군을 처리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상황들을 감안하면,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관계를 단순한 형제관계로만 볼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비극, 정치현실이 낳은 불행한 산물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의 산비탈에 조성되어 있는 광해군묘. ⓒ 김종성


광해군의 불안한 처지는 임금이 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임금이 뒤에도 그는 영창대군의 위협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된 광해군'을 위협할 만한 무기가 '임금이 못 된 영창대군'에게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죽기 전에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줄 조짐을 보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광해군과 달리 적장자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광해군 정권은 소수파였다. 그렇기 때문에 영창대군이 광해군 정권 초반기에 죽지 않았다면 이 정권이 영창대군 비호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은, 영창대군보다 정통성이 약한 인조가 광해군을 몰락시킨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인조가 쿠데타 세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결정적 비결 중 하나는 그의 아버지인 정원군(원종으로 추존)이 신성군의 형제라는 점에 있었다. 


후궁 김인빈(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은 선조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에는 세자의 물망에도 올랐다. 그가 전란 중에 죽지 않았다면, 영창대군이 아니라 신성군이 광해군을 안전을 가장 크게 위협했을 것이다. 


인조는 그런 신성군의 형제가 낳은 아들이다. 신성군이 죽은 뒤였기 때문에, 인조는 자기 삼촌이 후계자가 될 뻔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반(反)광해군 세력을 결집하기가 수월했다. 그런데 인조는 서얼 신성군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 역시 정통성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반광해군 세력을 모아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창대군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조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인조는 왕자의 아들이지만, 영창대군은 왕의 아들이다. 인조는 서얼의 아들이지만, 영창대군은 적장자다. 인조의 경우에는 삼촌이 왕이 될 뻔했었지만, 영창대군의 경우에는 본인이 왕이 될 뻔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려두었다면, 영창대군은 인조보다 훨씬 더 쉽게 정변을 성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복이든 동복이든 형제를 죽이는 것은 인륜상 용납될 수 없지만,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내몬 광해군의 행위는 위와 같은 정치적 조건 속에서 잉태된 일이었다.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비극은, 임금이 되면 최고 권력자와 최고 부자의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형제간의 권력투쟁이 격렬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정치현실이 낳은 불행한 산물이었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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