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4906
효종이 북벌정책 추진? 사실은 정반대였다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9편] 현행 한국사 교과서의 문제점
11.05.13 14:55 l 최종 업데이트 11.05.13 14:55 l 김종성(qqqkim2000)
▲ 삼전도비.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사실을 기념하는 비. 서울 송파구 잠실동 소재. ⓒ 김종성
후기의 조선왕조는 '친청'국가였다. 이런 상태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병자호란의 악몽 때문에 민간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런 정서가 국가적으로 표출되거나 국가정책이 된 적은 없었다.
친청(親淸)의 시대인 조선 후기에 가장 적극적 방법으로 친청을 실천한 군주는 제17대 효종(재위 1649~1659)이었다. 그는 청나라의 나선(러시아) 정벌에 협력하기 위해 1654년과 1658년에 최정예 조총부대를 파병하여 러시아를 격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청나라를 위해 파병을 해주는 것만큼 더 확실한 친청도 있을까?
물론 그가 기분 좋게 파병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나라 젊은이들을 외국 군대의 용병으로 보내는 일을 즐거워 할 통치자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파병했든 간에, 효종이 친청을 안했다고는 할 수 없다.
통치자가 어떤 노선을 취하는가는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었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가 공식적으로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마음속을 기준으로 통치자를 판단한다면, 이 세상에 나쁜 통치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효종을 평가할 때도 그의 객관적 행위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가장 명시적 방법으로 친청을 실천한 인물이 효종인데도, 그는 오늘날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도 있다. 가장 친청적인 행적을 남긴 군주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북벌정책을 추진했다니, 이보다 더 헷갈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친청 행적 남긴 효종이 청나라 정벌하는 '북벌정책' 펼쳤다고?
▲ 모 출판사가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효종의 북벌정책을 실제 사실처럼 다루고 있다. ⓒ 모 출판사
효종이 북벌정책을 추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있다. 효종 10년 3월 11일(1659.4.2) 효종과 송시열의 단독회담(독대)이다. 하지만, 실제로 회담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을 근거로 북벌론을 도출하는 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 회담은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과 여당대표의 영수회담이었다. 당시 송시열은 이조판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집권여당인 서인당의 총재였다. 회담의 목적은 꼬일 대로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해서였다.
당시 효종이 추진하는 중앙군 확충정책으로 인해 주상(왕의 공식명칭)과 여당의 관계가 악화될 대로 악화돼 있었다. 여당이 중앙군 확충에 반대한 것은, 중앙군을 확충하자면 세금을 더 거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부유층이 돈을 더 많이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송시열이 중심이 되어 효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했고, 효종은 어떻게든지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 송시열과 효종은 개인적으로는 사제지간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렇게 서로 으르렁대는 관계였다. 회담이 열린 것은 그런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회담의 내용이,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서습유> 권7 '악대설화'에 실려 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담에서, 효종은 자신이 군비를 증강하는 목적은 실은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며 "10년만 준비하면 청나라를 꺾을 수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효종이 처음으로 북벌론을 입에 담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송시열은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이라면서도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라고 신중론을 피력했다. 총론에는 찬성, 각론에는 반대였던 것이다.
송시열이 반대 입장을 나타냈는데도 효종은 집요하게 자기 입장을 개진했다. "하늘이 내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관계없이 한번 거사해볼 계획이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보도록 하오."
송시열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신은 결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전하께서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이 "우리 반미를 해봅시다"라고 하자 여당 대표가 "천만의 말씀! 저를 그렇게 보셨습니까?"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효종-송시열 단독회담에서 처음으로 나온 '북벌론'
송시열이 반대입장을 피력한 것은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효종의 북벌론이 군비강화 및 왕권강화를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청나라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10년 뒤에 칠 테니 그동안은 잠자코 나에게 협조해달라고 말했으니, 송시열로서는 효종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었으니 누구보다도 효종의 마음을 잘 읽지 않았을까.
송시열의 태도가 강경하다는 것을 확인한 효종은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급선무인지 말해주시오." 그러자 송시열은 격물·치지·성의·정심을 통한 마음공부가 가장 급선무라고 대답했다.
격물·치지·성의·정심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것으로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 주자의 해설에 따르면, 격물(格物)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 치지(致知)는 무궁한 단계까지 지식을 확장하는 것, 성의(誠意)는 마음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또 정심(正心)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송시열의 말은 '치국평천하'에 앞서 '격물·치지·성의·정심'부터 하라는 것이었다. 군비 증강을 주장하는 임금 앞에서 "마음공부나 하시오"라고 말했으니, 사실상 임금을 조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방 얻어맞은 효종은 북벌론 같은 것을 더는 내세우지 않고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밤낮으로 애써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력을 기르는 일 뿐이오"라며 다시 한 번 협조를 구했다.
송시열의 답변은 이랬다. "먼저 기강을 세운 뒤라야 이 법(군비증강 관련 제도)을 시행할 수 있는데, 기강을 세우는 길은 전하께서 사심을 없애는 데 달려 있습니다." 군비증강에 앞서 사심이나 없애라는 말이었다. 당신이 군비증강을 추진하는 진짜 목적은 북벌이 아니라 왕권강화가 아니냐는 메시지였다.
기분이 틀어질 대로 틀어진 효종은 "경은 말끝마다 주자를 거론하는데, 몇 년 동안이나 주자의 글을 읽었기에 이처럼 잘 아는 것이오?"라며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어렸을 때부터 읽었죠"라고 답변했다.
이날의 비공개 영수회담은 이렇게 냉소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감되었다. 서로 간의 입장차만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상하게 만든 회담이었다.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한 자리가 도리어 정국을 더 꼬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 효종의 무덤인 영릉(寧陵).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소재.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가장 친청적인 군주가 북벌론 대명사로 기록된 '허술한 교과서'
이날의 회담은 효종이 북벌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효종이 북벌정책을 추진했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이 회담 이후 '청와대'와 여당 간의 긴장관계는 한층 더 악화되었고 여당이 임금을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 효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효종이 죽은 시점은 효종 10년 5월 4일(1659.6.23)이다.
영수회담이 열린 때가 효종 10년 3월 11일(1659.4.2)이었으니, 효종은 북벌론을 제기하고 나서 3개월도 안 되어서 죽은 셈이다. 게다가 영수회담에서 북벌론을 꺼냈다가 퇴짜를 맞은 탓에, 나머지 3개월 동안 북벌론을 추진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효종-송시열 회담을 근거로 북벌정책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영수회담에서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니, 효종 시대에 북벌정책이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효종이 살아 있을 때는 회담 내용이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회담 내용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현종 15년(1674)이었다. 효종이 죽은 뒤 15년 후의 일이었다. 그동안은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효종이 살아 있을 때는 북벌론이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표출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효종이 죽고 나서 15년 뒤에 공개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공개된 경위가 아주 중요하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왜곡까지도 감행할 수 있는 지배권력의 본질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1674년은 1623년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이래 51년간 유지된 서인당 정권이 붕괴된 해였다. 물론 그 후 다시 서인당으로 넘어갔지만, 이때는 권력이 서인당을 떠난 시점이었다. 이 해에 정권은 남인당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서인당 총재 송시열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남인당은 송시열이 과거에 효종을 압박하고 결과적으로 임금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비판하면서, 송시열의 죄를 종묘(왕실 사당)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묘에 알릴 정도의 죄를 지은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남인당의 주장은 송시열을 죽이기 위한 수순이었다.
이때 송시열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효종의 충신이었음을 강조하는 길뿐이었다. 이를 위해 송시열은 15년간 비밀로 유지된 효종과의 비밀회담 내용을 공개하고 나섰다. 효종 임금이 죽기 직전에 북벌론을 제기했고 송시열은 원론적으로 찬성했다면서, 효종과 송시열은 동지나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송시열은 죽음을 모면했다.
▲ 송시열 영정. ⓒ 왕실도서관 장서각
하지만 송시열은 북벌론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지만"이란 표현은 자신의 반대의사를 부드럽게 전달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좋은 일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통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는 통일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가? 어린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는 가난한 아이들이 공짜로 밥 먹는 꼴을 보기 싫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가?
누구나 다 말로는 통일을 염원하고, 누구나 다 말로는 가난한 집 어린이들을 걱정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논의단계에 들어가면 이러저러한 현실적 핑계를 대며 훼방을 놓곤 한다. 송시열도 그러했다. 그러니 그가 과연 효종과 함께 북벌정책을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엄밀히 말하면 효종도 북벌론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공식적으로 북벌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저 북벌을 입에 담은 적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 발언도 죽은 지 15년 뒤에야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가 남긴 객관적 행적은, 두 차례의 파병을 통해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친청을 실천했다는 점이다. 가장 친청적인 군주가 북벌론의 대명사로 기록되고 있으니, 우리의 역사 교과서가 얼마나 허술한지 짐작할 수 있다.
효종이 송시열과 함께 북벌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은 조선시대에 생산된 대표적인 거짓말 중 하나였다. 이런 거짓말은 조선 후기의 대부분을 지배한 서인당과 그들의 후계자인 노론당이 자신들의 총재(송시열)를 보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허위의 역사가, 300년도 훨씬 지난 오늘날의 <한국사>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다. 300년 전의 지배권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고자 만들어낸 허위의 역사가 대한민국 시대의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으니,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역사를 배우는 것인가 아니면 300년 전의 서인당(노론당)을 위한 역사를 배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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