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0088
수원 화성, 정조가 사비 털어 세운 이유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7편] 서민을 위하는 통치자의 자격조건
11.05.03 11:06 l 최종 업데이트 11.05.03 11:06 l 김종성(qqqkim2000)
▲ 정조의 초상화(어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화성행궁 옆에 있는 화령전에 보관되어 있다. ⓒ 김종성
궁궐이나 성벽 같은 역사유적 앞에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유적지의 웅장한 규모를 보고 경외심을 느낄 때도 있고, 거기에 서린 서민들의 피땀을 헤아리며 서글픔을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서글픔보다는 경외심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궁궐이나 성벽을 짓는 대규모 토목건축에 서민들의 세금과 노동력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서는 당시 사람들의 피땀을 절절히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편,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경외심 못지않게 서글픔을 느끼기도 쉬웠을 것이다. 세금을 내고 요역(무보수 공사참여)까지 참여한 당시 사람들이 웅장한 건축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대규모 토목건축이란 것이 서민들의 피와 땀을 강제로 뽑아내는 것인데도, 이런 사업에 목숨을 거는 지도자들은 서민들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아니면 일부러 그것을 무시하곤 했다. "왕족이나 귀족으로 살다가 군주가 된 사람이 서민의 고통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서민 출신으로서 통치자가 된 사람들 중에도 서민의 고통을 무시하고 토목사업을 무작정 벌여놓고 보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서민을 위하는 통치자가 되느냐 여부는 일차적으로 서민 생활을 경험해봤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모든 경우에 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한 개인의 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데 익숙한 사람은, 서민생활을 아무리 많이 경험해봤더라도, 최고통치자의 관저에 들어가는 순간 '과거의 구차한 것들'과 영원한 이별을 고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이 누굴까?"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와 정반대 유형의 인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서민으로 살다가 통치자가 됐는데도 그 누구보다도 반(反)서민의 길을 걷는 사람들과 달리, 평생 왕궁에서만 살았는데도 그 누구 못지않게 서민을 배려한 군주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경기도 수원시 소재. ⓒ 김종성
평생 왕궁에서만 살았는데도, 서민을 배려한 '정조'
조선 제22대 주상인 정조(재위 1776~1800년)도 그런 군주 중 하나였다. 정조가 서민을 위한 개혁군주였다는 점을 문헌기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원 화성이 바로 그곳이다.
한국에서 옛날 궁궐이나 성벽이 가장 잘 보관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수원 화성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축조 당시의 건축물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수원 화성은 아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남문인 팔달문, 서문인 화서문, 동문인 창룡문. 이 4개의 대문을 연결하는 화성 성벽. 그 성벽에 둘러싸인 화성행궁. 그 옆에 붙어 있는 화령전.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어진)를 보관하는 곳이다.
정조가 건설한 화성을 감상하다 보면, 이곳이 상당히 잘 짜인 계획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한편으로는, 이런 도시를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궁궐 한 채 새로 짓는 게 아니라 궁궐·성벽·사대문을 포함한 도시 전체를 새로 건설하는 수준이었으니 그 공사에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입되었을 것인지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 화성행궁의 정문. ⓒ 김종성
정조는 화성 지을 때 어떻게 공사비용을 조달했나
화성 건설 같은 대규모 토목건축을 계획하는 통치자라면, 당연히 국민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방안을 고민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국민적 저항을 받지 않고 세금을 더 거둘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할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세금 거둘 생각부터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업으로 인해 서민들이 겪게 될 부담을 먼저 걱정했다. 단 한 번도 서민의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는데도 그는 사업구상 단계에서부터 서민들의 가계를 염려했다.
정조의 그런 마음씨는 정조 20년 10월 22일 자(1796.11.21) <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비변사) 고위 관계자인 이시수에 대한 업무지시에서 그는 "재물은 백성과 나라의 근본"이라면서 "세금이 적어야만 민생이 안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재물은 국가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소중한 것이므로 세금을 함부로 거두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백성의 재산을 '돌'처럼 생각하지 말고 '금'처럼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정조는 말만 그렇게 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화성 건설과정에서 자신이 그런 군주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위의 <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화성 공사를 3년 만에 종결지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았고 국고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대규모 국책사업을 신속히 완성하고자 하는 통치자들은 아무래도 서민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조는 3년 만에 화성을 건설하면서도 서민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았다. 서민들의 세금으로 공사비용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국고를 건드린 것도 아니었다.
▲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 김종성
정조가 공사비용을 조달한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공사계획을 발표하기 오래 전부터 왕궁 금고(내탕고)에 차근차근 자금을 축적했다. 요즘 말로 하면, 봉급과 판공비를 아껴서 화성 건설비용의 상당부분을 준비했던 것이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터는 대신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맨 것이다. 국고와 달리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내탕고의 자금을 동원해 화성을 건설했으니, '사비'를 털어서 화성을 세웠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둘째, 그는 자신의 경호부대(금위군)를 축소시켰다. 공사 개시 10년 전부터 금위군을 축소 운영하고 거기서 생기는 여윳돈을 착실히 모아두었던 것이다. 금위군을 축소할 당시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정조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서민들의 돈'을 거두지 않고 '자신의 안전'을 거두어서 화성 건설비용을 조달했던 것이다.
정조는 서민들의 세금 부담만 덜어준 게 아니었다. 그는 화성 건설과정에서 기존의 요역제도를 대폭 수정했다. 종래의 요역은 서민들의 노동력을 대가 없이 동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화성 건설에 동원된 서민들에게 일당을 지급했다. '백성의 노동력은 공짜'라는 인식이 지배했던 당시로써는 꽤 파격적인 조치였다.
정조가 화성 건설현장에 거중기 같은 첨단 장비를 도입한 데는 비용문제에 대한 고려도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세금을 거두지 않는데다가 임금까지 지급했으니, 첨단 장비라도 동원해서 인건비를 줄이고 공사기간을 단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개혁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 거중기(모형).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 있다. ⓒ 김종성
서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화성 건설 10여 년 전부터 차근차근 '적금'을 붓고 서민들의 노동에 대해 임금까지 지급한 정조의 마음씨. 그런 그를 보면서 우리는 그가 서민 지향적인 개혁군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그가 시도한 정치개혁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런 마음씨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평생 왕궁에서만 생활한 사람이 이 정도로 서민을 위할 수 있다면, 서민으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 해본 사람이라면 이보다 훨씬 더 서민을 위해야 하지 않을까. 하긴, 앞서 언급했듯이 '서민생활을 경험했느냐' 못지않게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냐'도 중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고통치자가 될 사람의 겉모습이나 말솜씨보다는 그 내면의 본성을 읽어낼 수 있는 지혜. 그런 지혜를 갖춘 국민만이 훌륭한 통치자를 맞이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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