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72461
고종의 '오판', 경상도 선비들 말 들었어야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0편] 19세기판 FTA 논쟁
11.05.26 17:31 l 최종 업데이트 11.05.26 18:39 l 김종성(qqqkim2000)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중대사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와 국민 간의 입장차는 확연하다. 정부는 이것이 한국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홍보하는 반면, 국민들 사이에서는 지금 같은 조건으로 개방했다가는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런 경우 민간이 정부를 당해내기 힘든 것은 정부가 공권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가 최고의 정보력을 갖고 있다는 점 역시 그 이유 중 하나다. 정부가 방대한 데이터를 내세우면서 시장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할 경우, 국민들로서는 자료의 타당성을 검토하기에 앞서 자료의 방대함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라면 몰라도 먼 미래를 예견할 때는 정보력보다는 통찰력이 더 유용한 경우가 많다. 현재의 산업에 관한 정보력만으로는 먼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와 현재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가장 정확히 예측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데는 정보력뿐만 아니라 통찰력도 요구된다.
그런데 통찰력을 갖추는 데 필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사심'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경우에는 어느 누구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없다.
이 점에서, 정부는 민간에 뒤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사회 내에서 '사심'이 가장 많은 집단이다. 각종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는 뜻이다. 정부는 가장 공정한 집단이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실현된 적은 없지 않은가. 정부가 통찰력을 갖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통찰력 부문에서는 아무래도 민간이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세기 '시장 개방' 두고 쟁론 벌인 고종과 민간
▲ 구한말 개항의 중심이었던 인천항. 사진은 1903년 현재 인천항의 모습.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시장개방이란 화두를 놓고 전 세계가 격렬히 대립한 19세기. 이 시대의 한국인들도 오늘날과 유사한 논쟁을 벌였다. 제26대 고종 집권 당시의 한국인들도 어느 쪽이 국익을 증대시킬 것인가를 놓고 쟁론을 벌였다. 고종을 비롯한 집권여당은 '미국 등 서양열강에게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민간의 주류세력은 '결국 화만 초래할 것'이라며 응수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개방을 늦게 했기 때문에 조선이 망한 게 아니냐?"는 구태의연한 논리는 제기하지 말자. 결과적으로 발생한 일은, 대책 없는 시장 개방 이후 조선이 망했다는 사실뿐이다. 최초 개방(1876년)에서 망국(1910년)까지 34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이 있었으니, 조선은 시장개방을 할 만큼 다 해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방을 안 해서 망했다'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구한말에 개방을 하는 게 좋았느냐 안 하는 게 좋았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시장개방을 둘러싼 19세기의 논쟁에서 어느 쪽의 주장이 결국에는 옳았는가 하는 점이다. 정보력이 우세한 정부가 옳았는가, 아니면 통찰력이 우세한 민간이 옳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을 분석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자료들이 있다. 조선에게 시장개방을 권고하기 위해 청나라 측이 작성한 <조선책략>, 이 책에 대한 고종 임금과 민간 사회의 반응이 그것이다.
1880년 동경주재 청나라 외교관인 황준헌이 본국 정부와의 교감 속에 작성한 <조선책략>의 핵심은,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은 청나라·일본·미국과 연대해야 하며 이렇게 하려면 일단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관계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긴장감을 느낀 쪽은 청나라였다. 전통적으로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던 청나라로서는 북방에서 다가온 러시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조선과 러시아가 한편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조선은 청나라·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조선책략>을 작성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하필이면 미국을 추천한 이유는, 미국이 당시로서는 꽤 '선량한 국가'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동아시아를 가장 악랄하게 침탈한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영국·프랑스였다. 영국이 어떤 나라인가는 아편전쟁(1840)에서 잘 드러났고,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가는 병인양요(1866)에서 잘 드러났다. 또 청나라 황실의 정원인 원명원(웬밍웬)이 영국·프랑스 병사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된 현장을 목격하노라면, 19세기에 이 두 국가가 어떤 나라였는지 절감할 수 있다.
그들과 달리 미국이 유독 선량하게 보였던 것은, 그때만 해도 미국에게 별다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오늘날로 치면 G8 정도에는 해당했지만, 세계 최정상급은 아니었기 때문에 약소국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히지는 못했다. <조선책략>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미국은)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다. …… 항상 약소국을 돕고 공의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오늘날 같으면 콧방귀가 나올 만한 소리들이지만, 청나라는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조선에게 이런 식으로 미국을 소개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소개팅'을 주선했던 것이다. 뺨 맞을 만한 일이다.
청나라의 <조선책략>을 읽자마자 미국에 반한 고종
▲ 고종 황제
하지만, 고종은 미국에 반했다. 고종이 <조선책략>을 읽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하고 얼마 후에 정말로 미국과의 수교를 추진한 것은 '미국이 나쁜 나라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덕분에 미국은 조선과 수교한 최초의 서양국가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물론 고종이 미국을 끌어들인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대를 열려면 시장개방 등을 통해 국면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자면 미국 같은 만만한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했다. 신미양요(1871) 때 조선이 미국을 꺾은 적이 있었기에, 그가 미국을 만만히 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종을 비롯한 집권여당은 기본적으로 <조선책략>의 권고를 수용한 데 비해, 민간의 분위기는 이와 정반대였다. 민간의 주된 분위기는 '미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였다. 이런 논의를 주도한 것은 특히 경상도 선비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이 그 유명한 <영남만인소>에 담겨 있다. 영남에 사는 1만여 명의 선비들이 올린 상소라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이들의 상소가 올라온 때는 '한미 FTA(한미수호통상조약)'가 비준되기 1년 전인 고종 18년 2월 26일(1881.3.25)이었다. 이 상소를 읽다 보면, 미래를 내다보는 경상도 선비들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 <영남만인소>.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미국과 관련된 대목에서 <영남만인소>는 "미국은 본래 우리가 모르던 나라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고종과 집권여당이 <조선책략>을 근거로 갑작스레 '한미 FTA'를 홍보하고 나온 데 대한 반발이었다.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미국을 알았다고 미국을 끌어들여 국가발전을 꾀한다는 말이냐는 메시지였다. 미국과 관련된 대목에서 인상적인 표현들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저들이 풍랑을 몰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나라 관료들을 괴롭히고 우리 재산을 쉴 새 없이 빼앗아 가거나, 또 저들이 우리의 허점을 엿보고 우리의 빈약함을 업신여겨서, 들어주기 어려운 청을 강요하고 감당하지 못할 책임을 지운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러시아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다 똑같은 오랑캐입니다. 그들 중에 누구는 후하게 대하고 누구는 박하게 대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오랑캐 종자들은 그 본성이 탐욕스러운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습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및 비준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미국은 조선시장이 그다지 실익이 없다는 판단 하에 이를 적극적으로 개척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한말에는 한국인들이 미국이란 나라를 제대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그 때문에, 당시로서는 고종의 말이 옳은지 경상도 선비들의 말이 옳은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남만인소가 제기된 때로부터 64년 뒤에 미국은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벌써 65년이나 더 흘렀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 옳았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미국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상세히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권 강화'라는 사심이 고종의 통찰력 흐리게 해
▲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인천시 중구 북성동 3가 소재. 월미도 근처 자유공원 옆에 있다. ⓒ 김종성
1881년 당시의 경상도 선비들이 미국이란 나라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임금을 아버지나 스승 같은 존재로 떠받드는 선비들이 임금의 말을 듣지 않고 미국에 대한 입장을 재고할 것을 촉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한미관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을 잔학하게 학살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도 몰랐다. 또 그들은 당시의 미국 정부가 말로는 자유무역을 외치면서도 실상은 철저하게 보호무역을 하는 이중적인 나라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들이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사를 바라보는 통찰력 때문이었다. 외세는 어디까지나 외세일 수밖에 없고 외세가 우리를 위해 살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세에게 안방을 무조건 개방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러시아가 탐욕스러운 오랑캐라면 미국도 다를 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미국만 따로 우대하느냐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고종을 비롯한 집권여당이 보다 더 나은 정보력을 갖고도 한미관계를 똑바로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통찰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통찰력을 갖지 못한 것은 IQ나 학식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심이 통찰력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미국을 끌어들여 정권을 강화하겠다는 사심이 작용했기에, 그들은 미국이라는 외세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민간의 통찰력만으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보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정보력을 가진 정부는 민간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통찰력을 가진 민간은 정부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가운데, 보다 정확한 분석과 예측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한미 FTA처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중대사에 있어서만큼은, 정부는 국민의 통찰력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친미 성향인데다가 미국과 각종 이해관계로 뒤얽힌 한국 정부가 한미관계를 사심 없이 바라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점에 관한 한, 민간의 통찰력이 더 우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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