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4년 더 살았다면 '대형사고' 터졌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청춘사극 <성균관 스캔들>, 여덟 번째 이야기 (최종)
10.11.03 15:33 l 최종 업데이트 10.11.03 15:33 l 김종성(qqqkim2000)
▲ KBS2 <성균관 스캔들>. ⓒ KBS
개혁의 시대인 조선 정조시대의 성균관을 그린 KBS2 <성균관 스캔들>이 막을 내렸다. 지난 2일 방영된 최종회(20부)에서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누명을 벗길 수 있는 금등지사(金縢之詞)를 결국 찾아냈지만, 그것을 세상에 공개하는 데에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를 압박해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기득권세력이 금등지사의 공개를 그냥 묵인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 본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글이 바로 금등지사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공개되면 기득권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게 드라마 속 정조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금등지사의 공개를 포기하는 대신에, 드라마 속의 정조는 "언젠가는 꼭 수도를 화성으로 천도해서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하는 선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웠다. 기득권세력의 아성인 서울(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천명한 것이다.
위와 같은 드라마 내용은 매우 그럴싸하지만, 실은 거의 다 허구에 불과하다. 정조 17년 8월 8일자(1793.9.12)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즉위년 5월 13일(1776.6.28)에 영조의 충신인 채제공으로부터 "금등지사가 사도세자의 사당 내부에 있다"는 비밀 보고를 받은 후에 승지(비서) 등을 파견해 그것을 신속히 입수했다.
이로부터 17년 뒤인 정조 17년 8월 8일에 정조는 어전회의(국무회의)에서 대신들에게 금등지사의 일부를 공개했고, 그 내용을 접한 대신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드라마 속의 대신들은 '금등지사? 그래, 한 번 공개해봐!'라는 식의 태도로 왕을 압박했지만, 실제의 대신들은 정조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려주는 '센스'를 발휘했던 것이다.
한편, 정조가 경기도 수원에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고 백성들을 그리로 유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드라마에서처럼 화성천도 계획을 선포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명확히 말하기도 힘들다. '화성 천도를 계획했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정황들이 존재할 따름이다. 정조는 노무현처럼 배짱이 좋은 통치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갑자년에 '대형사고' 칠 계획이었던 정조
▲ 최근의 TV 사극에서 정조 역을 맡은 두 배우. 왼쪽은 <성균관 스캔들>의 조성하, 오른쪽은 MBC <이산>의 이서진. ⓒ KBS·MBC
위와 같이 <성균관 스캔들> 속의 금등지사나 화성천도 이야기는 '새하얀' 거짓에 불과하지만, 이 드라마의 최종회에서 강조된 것 중 하나 만큼은 확실한 진실이다. 정조가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가슴에 담아두었다는 내용만큼은 분명한 진실이다. 정조가 꿈꾸었다는 웅대한 포부의 실체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회고록인 <한중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갑자년(甲子年)에 '대형사고'를 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음력인 갑자년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서기 1804년 2월 11일부터 1805년 1월 30일까지다. 그래서 갑자년은 1804년이 될 수도 있고 1805년이 될 수도 있지만, 뒤에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정조는 1804년 3월을 전후해서 대형사고를 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갑자년을 1804년으로 간주하고 이야기를 계속 전개하겠다.
그런데 왜 하필 갑자년이었을까? 정조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과거 동아시아인들의 시간관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현대 한국인들은 100년 혹은 1000년을 단위로 시대를 나눈다. 한국인들이 1999년 12월 31일에 그렇게 요란스레 '호들갑'을 떤 것은 그런 시간관념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음력을 사용했다면, 1999년 12월 마지막 날의 그 같은 '호들갑'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는 100년이나 1000년에 대한 관념이 그다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갑자년으로 시작해서 계해년으로 종결되는 60주년 관념이 훨씬 더 강력한 것이다.
그래서 만약 지금까지도 음력이 계속 사용됐다면, 새천년 전야에 호들갑을 떠는 서양인들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쟤들 왜 저래? 금년은 을묘년이고 새로운 갑자년(2044)이 도래하려면 앞으로 45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라며 의아해 했을 것이다. 이처럼 음력을 사용한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갑자년이 새로운 60년 즉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갑자년이 새로운 60년의 시작이라는 점 외에도, 정조가 갑자년을 고대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을묘년에 태어나 임오년에 죽은 사도세자가 갑자년에 70세가 된다는 점도 작용했던 것이다. 갑자년 1월 21일(1804.3.2)은 사도세자 탄생 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정조에게는 갑자년이 더욱 더 의미 있는 해였던 것이다. 아마도 정조가 대형사고를 계획한 시점은 아버지의 생일이 있는 1804년 3월을 전후한 때였을 것이다.
정조, 대화합의 정치 속에서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소재 화령전에 보관된 정조의 초상화. 화령전은 화성행궁과 붙어 있다. ⓒ 김종성
그럼, 정조는 갑자년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했던 걸까?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자신이 53세가 되는 갑자년에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화성으로 내려가는 동시에 '2가지'를 더 하려 했다고 한다. 그 2가지란 무엇이었을까?
그중 한 가지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을 모두 다 용서해주는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를 죽음으로 내몬 외갓집 홍씨 가문 및 기득권세력과,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문숙의(숙의 문씨, 영조의 후궁) 남매 등을 포함해서 정조의 '철천지원수'들을 모두 다 용서해주는 것이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어머니에게 "모년(某年)의 죄들은 갑자년에 다 풀어주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모년'이란 사도세자가 비좁은 뒤주(곡식 상자)에 갇혀 참혹하게 죽은 임오년을 가리킨다. 당시 사람들은 '임오년'이란 표현을 피하고 가급적 '모년'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임오년이 풍기는 참혹한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임오년 원수들에 대한 완전한 사면을 통해,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기득권세력을 용서해주려 했다. 보복의 정치가 아닌 대화합의 정치를 꿈꾼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한 상태에서, 상왕인 자신의 지원 하에 아들 순조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에 가담했던 세력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정조가 하고자 했던 또 한 가지는, 사도세자의 정치적 복권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4년 뒤에 갑자년이 되면 원자(순조)가 열다섯 살이 되니 왕위를 전하기에 충분할 겁니다. 처음 마음먹은 대로 마마(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경모궁(사도세자)께 자식으로서 행하지 못했던 평생의 한을 이루겠습니다."
자식으로서 이룩하지 못한 평생의 한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정치적 복권을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아버지를 주상(왕의 정식 명칭)으로 추존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아버지의 정치적 복권이 완성되면, 정조 자신의 정치적 부담도 해소되어 정치개혁의 최종적 완성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정치개혁의 최종 승부수를 계획했던 것이다. '대형사고'라는 표현을 붙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프로젝트였다.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 정조가 1804년에 어머니와 함께 살려고 계획했던 화성행궁. 사진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소재. ⓒ 김종성
이와 같이 정조의 '갑자년 프로젝트'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을 모두 용서하고 아버지의 정치적 복권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모든 한을 다 풀고 새로운 60년으로 진입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갑자년 프로젝트 속에 뭔가 비수가 숨어 있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뜻일까?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고 그의 정치적 복권이 완성되면, 정조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사도세자의 적들은 정치적 존립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정조가 그들을 용서한다 해도, 사도세자가 '완전히' 복권되는 순간에 그들은 '완전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용서를 받고 정치적으로는 사실상 매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대대적인 정계개편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기득권층이 정계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외형상으로는 대화합을 내세우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갑'자년이 아니라 '갚'자년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갑자년 프로젝트는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는 갑자년이 되기 4년 전에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지도 못했고,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내려가지도 못했으며, 아버지의 적들을 사면하고 아버지의 완전 복권을 성취하지도 못했다. 그로부터 99년 뒤인 1899년에 고종황제에 의해 사도세자가 임금으로 추존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정조가 갑작스레 급사하지 않고 1804년 갑자년에 자신의 프로젝트를 세상에 내놓았다면, 조선의 정치질서가 어떻게 변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물론 그가 계속 살았더라도, 반드시 승리했으리란 보장은 없다. 정조가 계속 생존했더라도, 갑자년 프로젝트는 실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기득권층은 상당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의 도전을 꺾고 기득권을 수호하는 대가로 그들은 인명·재산상의 출혈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조가 갑자년에 실패했더라도, 조선의 정치질서는 일정 정도 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개혁군주 정조가 그처럼 웅대한 계획을 품고 살았기에, 우리는 '정조가 4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조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흥미진진한 상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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